국회, 금 캘까 금 갈까
여야를 막론하고 내년 4월 총선 필승 전략을 물어보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답변이 있다. “외부 인재 10명을 데려오는 것보다 주류 1명을 공천에서 날리는 것이 효과가 더 좋다”는 것이다. 국민의힘 한 의원은 27일 “우리 유권자들은 희생과 헌신의 서사에 유독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 같다”면서 “주류 계파 의원을 공천에서 배제할 때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중진 험지 출마론’은 총선 때마다 어김없이 등장하는 단골 소재다. 이런 얘기가 반복해서 나오는 배경에는 지역주의 구도가 강한 한국 정치의 풍토가 있다. 선거 때마다 보수 정당은 수도권·호남에서, 진보 정당은 영남에서 각각 맥을 추지 못하는 현상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험지 출마는 ‘All or Nothing’(전부 또는 전무)의 위험한 도박이다. 그러나 단번에 대선 ‘잠룡’으로 몸값을 키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대표적 사례가 노무현 전 대통령이다. 노 전 대통령은 1998년 서울 종로에서 보궐선거에 당선(재선)됐으나, 2000년 16대 총선에서 험지인 부산 북·강서을로 출마했다가 낙선했다. ‘지역주의 타파’를 내세워 무모한 도전에 나섰던 것이었다. 노 전 대통령은 이때 ‘바보 노무현’이란 별명을 얻었고, 2002년 16대 대선에서 대권을 거머쥐었다.
보수 정당에는 정몽준 전 한나라당 대표의 사례가 있다. 정 전 대표는 울산 동구에서 5선을 했으나 2008년 18대 총선 때 이명박 당시 대통령과 당 지도부의 요청으로 연고가 없는 서울 동작을에 도전했다. 정 전 대표는 이 지역구에서 정동영 전 의원과 맞붙어 승리했다. 정 전 대표는 오랜 기간 무소속 의원으로 지내다가 이때의 승리를 기반으로 당대표에 올랐다.
내년 총선을 앞두고 부산 해운대갑에서 내리 3선을 한 하태경 국민의힘 의원이 ‘수도권 출마’를 선언하며 험지 출마론의 불을 지폈다. 21대 국회에서 여야를 통틀어 중진급의 험지 출마 선언은 하 의원이 처음이었다.
다만 국민의힘 내부에서는 하 의원의 결정을 두고 불편한 기색이 감지된다. 2020년 총선 당시 김형오 공천관리위원장 체제에서 시도했던 중진 험지 출마가 처참한 실패로 끝난 기억 때문이다. 당시 ‘컷오프’ 아니면 ‘험지 출마’라는 선택지 중 후자를 택했던 의원들은 줄줄이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 했다. 김용태(서울 양천을→서울 구로을), 김재원(경북 상주·군위·의성·청송→서울 중랑을), 이혜훈(서울 서초갑→동대문을) 전 의원 등도 험지에 나섰다가 결국 패배했다.
중진 험지 출마의 성공을 판가름 짓는 핵심 요건은 ‘자발적 희생’이다. 김부겸 전 국무총리의 사례는 모범 답안으로 꼽힌다. 김 전 총리는 경기도 군포시에서 3선을 지내다가 2012년 총선과 2014년 지방선거에서 보수당 텃밭인 대구에 잇따라 도전했다가 낙선했다. 그는 세 번째 시도 끝에 2016년 총선에서 대구 수성갑에 출마해 승리를 거뒀다. 노 전 대통령의 뒤를 이어 ‘지역주의 극복’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타이밍’도 중요하다. 출마의 적기를 놓치면 유권자에게 감동을 주지 못한다는 의미다. 2020년 총선 때 황교안 당시 미래통합당(국민의힘 전신) 대표의 사례는 반면교사다. 2020년 총선 당시 서울 종로에서는 황 전 대표와 더불어민주당 이낙연 전 대표가 맞붙었다. 국무총리를 지낸 거물들의 빅매치였다. 그러나 선수를 친 쪽은 이 전 대표였다. 이 전 대표는 총선 3개월 전이던 그해 1월 종로에 출사표를 던졌다. 황 전 대표는 그보다 늦은 2월 초에 종로 출마 선언을 했다. 선거는 이 전 대표의 승리로 끝났다. 황 전 대표는 “떠밀려서 출마했다” “이길 만한 곳을 찾다 실기했다”는 비판을 극복하지 못했다.
정치권에서는 중진 험지 출마론이 나올 때마다 영화 ‘친구’의 명대사 “니가 가라, 하와이”가 회자된다. 홍준표 대구시장은 2019년 11월 당시 자유한국당 초·재선 의원을 중심으로 험지 출마론이 나오자 “‘니가 가라, 하와이’란 말을 해주고 싶다”고 불쾌감을 드러냈었다.
중진의 불출마도 험지 출마만큼이나 선거에 미치는 파장이 크다. 가장 많이 언급되는 사례는 김종인 민주당 비상대책위원장 시절의 ‘이해찬·정청래’ 컷오프다. 2016년 총선 때 민주당에 영입된 김 위원장은 친노(친노무현) 핵심이었던 이해찬 전 대표와 친노 강경파로 분류됐던 정청래 의원을 공천에서 탈락시켰다. 문재인 당시 민주당 대표는 침묵했고, 비대위에 힘을 실어줬다는 평가가 나왔다.
후폭풍은 컸다. 이 전 대표는 거세게 반발하며 탈당 후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됐다. 정 의원은 재심을 신청했으나 기각됐고, 이후 공천 탈락 후보들끼리 ‘컷오프 유세단’을 만들어 선거 지원에 나섰다. 2016년 총선에서 민주당은 새누리당(국민의힘 전신)에 1석 앞선 123석을 가져가면서 승리했다. 여권 관계자는 “가장 성공적인 읍참마속의 사례”라고 말했다.
여야 모두 공천 작업이 본격화되는 올해 12월 무렵부터 공천장을 둘러싼 혈투가 벌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민주당 고위 관계자는 “‘억지춘향식’이 아니라 어떻게 자발적 결단을 이끌어내는지 여부에 따라 공천의 성패가 좌우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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