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로 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아야 한다

최순자 2023. 10. 27. 1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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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자 기자]

▲ 국경선평화학교 평화워크숍 지난 9월 이재봉 박사 강연을 듣고 있는 국경선평화학교 평화워크숍 참가자들
ⓒ 최순자
 
내가 민족 문제와 한반도 미래를 위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는 '통일'이다. 대학 학창 시절은 군사독재에 대한 반대급부적 차원에서 '어떻게든 통일이 이루어지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남이든 북이든 거기에 현재 살고 있는, 또 앞으로 살아갈 '사람'을 중심으로 평화를 바탕에 두고 풀어가야 한다는 생각이다.

대학 때 역사학도로 분단은 그 비용이 너무 크다는 생각이 들었고, '통일'이라는 민족 문제가 구조적인 차원에서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인간 발달을 공부하면서는 분단은 한국인의 정서, 심리에 미치는 영향도 크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 두 가지 사례를 들어 본다.

"어디서 왔어요?" "한국(Korea)에서요." "남한이에요? 북한이에요?" "남한에서요." 1995년 도쿄 유학 시 캐나다에서 온 연구자와 나눈 대화다. 나는 내가 한국(Korea) 출신이라고 하면, 당연히 나를 남한 사람으로 생각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가 본 한반도는 남과 북으로 나뉜 나라다. 이는 밖에서 본 한반도의 엄연한 현실이다. 그때 나의 정체성을 놓고 고민했고, 우리가 그토록 불렀던 '우리의 소원은 통일'의 의미가 뼈저리게 다가왔다.

어느 날은 한국에서 온 연구자와 죠오치(上智)대학을 찾았다. 그곳 숙소에서 지내고 있는 당시 일본몬테소리교육합회 회장 독일인 루메르 신부를 만나기 위해서다. 숙소 방문객 관리를 하던 이와 얘기를 나눴다. 그는 재일교포 2세였다. "아버지는 조선 출신이고, 어머니는 남한 출신입니다. 그래서 저는 조선도 남한도 아닌, 통일된 조선에 돌아가고 싶습니다"라고 했다. 젊디젊은 그 학생의 마음이 어떨지 다 헤아리기 어렵지만, 정체성이 고민된다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가슴 먹먹하게 한다.

지난 9월 중순 2박 3일 일정으로 국경선평화학교에서 평화워크숍이 열렸다. 국경선평화학교는 평화학으로 영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정지석 목사가 세운 학교다. 남과 북이 갈등한 세월만큼 평화의 씨앗을 뿌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주로 '피스메이커(평화통일 일꾼)'를 기르는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이번 워크숍 주제는 '분단에서 통일로, 전쟁에서 평화로'였다. 강사는 국경선평화학교 석좌교수이자 원광대 명예교수 이재봉 박사였다. 이 박사는 하와이대학에서 평화학의 창시자 요한 갈퉁을 만났고, 정치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시민 모임 '남이랑북이랑'도 운영하기도 한다.

강연은 네 번에 걸쳐 분단과 통일, 전쟁과 평화, 북한 바로 알기, 한반도 안팎의 정세변화 내용을 다뤘다. 진행은 국경선평화학교 이충재 사무총장이 맡았다. 강연 외 친교의 시간, DMZ 평화순례 시간도 가졌다. 평화순례 때는 국경선평화학교 전영숙 사무국장의 개인사를 포함한 역사 얘기도 들었다. 평화워크숍 모든 강연 내용이 통일, 평화를 고민하는 이들이 알아야 할 내용이었다. 특별히 개인적으로 다음 세 가지 내용이 기억에 남는다.

첫째, 북한은 통일과 평화의 상대라는 것이다. 둘째, 통일의 필요성이다. 분단에 따른 폐해가 너무 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폐해는 정치 체제적으로는 민주주의의 왜곡과 부정, 경제적으로는 국방비가 국가 예산의 15% 정도로 천문학적이라는 것, 사회적으로는 이념 갈등, 지리적으로는 여행의 자유에 제한받는다는 점, 외교적으로는 군사적 자주권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점, 국방에 있어서는 징병제의 문제, 안보적으로 전쟁의 가능성 등을 들었다. 셋째,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해서는 '국제 관계에는 영원한 적도, 영원한 우방도 없음'을 인식, 동맹이 아닌 중립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내가 북한산 언저리 기자촌에서 살 때 같은 마을에서 살았던, 통일운동가 고 백기완 선생을 산책 중에 종종 뵈었다. 선생은 열세 살 때 황해도 은율을 떠나왔다. 노환으로 병원에 계실 때 모 일간지 기자가 찾아가 소원을 물었다. 그는 "고향에 가서 어머니를 뵙고 싶어"라고 했다. 남북의 경계에 살다 보니 아직도 이런 분을 종종 만난다.

유학 중 도쿄에서 2000년 남북 첫 정상회담에 동행했던 고 강만길 교수의 강연을 들었다. 강 교수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 "민족 문제가 잘 풀리려면 20년 정도 걸릴 것 같다"라고 했다는 말을 전했다. 20년이 지났건만, 아직 통일은 멀게 느껴진다. 그래도 우리가 가야만 하는 길이다.

경계를 넘나드는 바람처럼 남북이 오고 가는 날을 위해서는 종전선언, 평화협정, 더 나아가 평화통일로 가는 걸음을 멈추지 않아야 할 것이다. 1987년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자리에서 들었던 고 문익환 선생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역사를 산다는 건 말이야./ 온몸으로 분단을 거부하는 일이라고/ 휴전선은 없다고 소리치는 일이라고/ 서울역이나 부산, 광주역에 가서/ 평양 가는 기차표를 내놓으라고 주장하는 일이라고(문익환, 잠꼬대 아닌 잠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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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개인 SNS, 국경선평화학교에도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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