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26일에 울렸던 총성, 그날의 진실은?
[이준목 기자]
10월 26일은 박정희 정권의 종말을 불러온 1979년 10.26 사태가 벌어진지 44년이 되는 날이었다. 역사의 거대한 흐름은 사람들의 삶에 예기치 않은 파도를 일으키기도 한다. 44년 전 사상 초유의 '대통령 살인사건'이 벌어진 궁정동에서도 의도치않게 비극적 사건에 휘말려야만 했던 사람들이 있었다.
26일 방송된 SBS 실화 스토리텔링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궁정동의 목격자들, VIP 할아버지'라는 부제로 10.26 사건의 이면을 조명했다.
1978년, 서울 5성급 일류 호텔의 주방장이었던 요리사 이정오 씨는 엄청난 조건으로 종로의 한 신장개업 식당에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호텔보다도 더 나은 월급과 복지 조건에 이정오씨는 결국 이직을 결심했다. 그런데 이 선택으로 훗날 그의 인생이 완전히 뒤바뀔 것은 당시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이직후 약 1년이 지난 1979년 10월 26일, 이정오 씨는 여느 때처럼 식당의 단골 'VIP 할아버지'를 위한 요리 준비로 분주했다. VIP 할아버지라는 인물은 1주일에 1-2회씩 식당을 방문하여 만찬을 즐겼다고한다.
준비한 요리가 다 나가고 겨우 한숨을 돌리려는 찰나, 갑자기 건물이 암전이 되고 이정오 씨는 등허리를 각목으로 치는듯한 느낌을 받았다. 이정오 씨가 허리를 만져보니 뜨끈뜨끈한 선혈이 느껴졌다. 총알이 허리를 관통하여 피가 흐르고 있었던 것. 이어 어디에선가부터 빗발처럼 총탄이 쏟아지기 시작한다.
정오 씨는 다급한 상황에서 앞치마로 상처를 꽉 묶어 지혈하고 바닥에 몸을 엎드렸다. 잠시후 총소리가 멎자 몸을 일으킨 이정오 씨의 눈앞에 총을 맞고 피투성이가 되어 쓰러진 동료들의 모습이 들어왔다. 서울 종로 한복판에서 믿기 힘든 총격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총격이 일어난 지 약 한 시간 뒤, 국군수도병원 김병수 원장은 총상 환자가 있다는 다급한 전화를 받고 급히 병원으로 행했다. 김 원장의 눈 앞에는 신원을 일급비밀에 부친 주검이 등장했다. 입고있던 흰 셔츠 위에는 붉은 피가 흥건했고, 오른쪽 가슴과 머리에는 총상을 입은 상태였다.
이미 소생 가능성은 없어서 의사인 김 원장이 사망 판정을 내려야 했는데, 환자 얼굴을 수건으로 덮어서 못보게 가려놓은 상태였다. 어쩔수없이 김 원장은 시신의 몸을 확인하다가 배꼽 아래쪽 하얀 반점을 보고 비로소 시신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아챘다.
사망한 시신은 바로 대한민국의 집권자였던 박정희 대통령(1917-1979)이었다. 김 원장은 박 대통령을 만나 진료 상담을 한 적이 있었기에 그의 신체적 특징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정오 요리사가 스카우트된 직장은 일반 식당이 아니라 바로 대통령만을 위한 비밀 '안가(안전가옥)'였고 서울 종로구 궁정동에 위치하여 '궁정동 안가'라고 불렸다. 이 식당의 최대 단골인 VIP 할아버지의 정체 역시 박정희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1979년 10월 26일, 이 궁정동 안가에서 박 대통령이 측근이던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에서 암살당하며 대한민국의 역사를 바꾼 '10·26 사태'가 발발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종로에만 궁정동 외에도 5~6군데의 안가를 갖고 있었으며, 정부 고위직 중에도 안가의 존재를 모르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은 이곳으로 사적으로 사람을 만나거나 은밀하게 술을 마시고 연회를 즐겼다.
궁정동 안가를 관리한 곳은, 현재 국정원의 전신인 중앙정보부였다. 다시 중정은 어떤 사건도 만들어내고, 멀쩡한 사람도 간첩으로 만들어내는 '공작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당시 김재규 부장이 직접 안가를 관리했고, 이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경비원에서 단순한 요리사였던 이정오 씨까지 모두 전부 중정 소속으로 분류됐다.
당시 안가 경비원으로 근무하던 유석술 씨는 부사관 출신으로 중정에 특채된 인물이었다. 유석술씨는 안가의 존재가 밖에서는 절대 발설해서는 안되는 극비 보안사항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직장이 안가라는 점만 빼면 그저 평범한 가장이자 아버지들이기도 했다.
운명의 10월 26일 그날, 박 대통령은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 참석하는 등 당일 일정을 마치고 궁정동 안가에서 저녁 식사를 하겠다고 통보했다. 안가 직원들은 대통령이 혼자 오는 것은 '소행사', 다른 손님들과 동석하여 연회를 하는 것을 '대행사'로 분류했다고 하며 이날의 모임은 대행사였다.
이날 연회에 참석한 주요 인물들은 박정희 대통령을 비롯하여 김계원 대통령 비서실장, 차지철 경호실장,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등 모두 대한민국 권력을 대표하는 실력자들이었다. 그리고 2명의 여성 참석자가 섭외되었는데 가수 심수봉과 연기를 전공하던 대학생 신재순 씨였다. 안가의 경비원들을 지휘하는 책임자 박선호 과장의 또다른 주요 업무는, 대통령의 연회에 참석할 여성 참석자들을 섭외하는 것이었다.
심수봉의 자서전에 따르면 처음에는 방송국 녹화 때문에 섭외를 거절했지만, 권력의 힘을 앞세워 스케쥴을 일방적으로 취소시키고 안가로 오도록 통보했다고 한다. 심수봉은 이전에도 안가에 온 적이 있었고, 박 과장은 이날 심수봉과의 통화에서 "기타를 가지고 오라. 윗분 모시는 자리니 신경 좀 써 달라"고 특별히 당부했다고 한다.
심수봉은 훗날 한 토크쇼에 출연하여 당시의 정황을 증언했다. 심수봉이 안가에 도착했을 때 이미 연회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하지만 당시 뉴스를 보던 박 대통령은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고, 김재규와 김계원은 굳은 표정을 하고 있어서 분위기가 살얼음판같았다고 한다.
심수봉이 기타를 잡고 노래를 부르면서 무거운 분위기가 다소 풀렸다. 뒤이어 차지철과 신재순 씨가 노래를 이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김재규가 갑자기 바지 주머니에서 권총을 빼들더니 "차지철 이 건방진 놈!" 하고 소리치며 총성이 울렸다. 손목이 관통당한 차지철은 당황하여 피를 흘리면서 화장실로 도망갔다.
이어 김재규는 "각하! 정치를 좀 대국적으로 하십시오!"라고 말하고는 박 대통령의 가슴을 향해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박 대통령은 가슴에 총을 맞고 테이블 위로 쓰러졌다. 그 순간 총기가 고장이 났고, 당황한 김재규가 밖으로 뛰어나는 순간 건물이 암전이 됐다. 기관공이 총소리가 전기합선 소리인 줄 오해하고 전원을 내렸던 것이다.
심수봉은 박 대통령에게 다가가 부축하려고 했으나 그 순간 김재규가 새로운 총을 들고 돌아왔다. 김재규는 다급히 경호원을 찾으며 방을 빠져나오려던 차지철과 마주쳤다. 차지철은 장식장을 들고 저항했으나 김재규의 총탄에 맞고 결국 쓰러졌다. 이어 김재규는 박 대통령에게 다가가 이미 쓰러져 있는 그의 머리를 향해 마지막 발사를 했다. 박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박정희 대통령과 김재규는 원래 끈끈한 사이였다. 두 사람은 같은 경북 구미 출신이야. 육군사관학교 2기 동기였다. 박정희는 김재규를 국회의원과 장관에 이어 '권력의 2인자'로 불리우던 중앙정보부장으로 임명하며 최측근으로 중용했다. 그런 김재규가 왜 박정희를 살해한 것일까.
김재규는 박 대통령과 이미 저녁 약속이 있는 상황에서 육군참모총장 정승화와 이중 약속을 잡았다. 김재규는 인근에서 기다리고 있던 정 총장에게 잠시후 다시 오겠다고 사과 후 연회장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약 40분후 연회장에서 총성이 울렸다.
이어 김재규는 안가에 있던 중정 요원들에게 총소리가 들리면 청와대 경호원들을 제압할 것을 지시했다. 박선호 과장과 박흥주, 이기주, 유성옥 등 중정 요원들도 당일날 현장에서 사건 발생 몇십 분 전에 지시를 하달받았다고 한다. 박선호는 "혹시 (제거 대상이) 각하(박정희)까지 입니까?"라고 물었고, 김재규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당시 안가에 온 박정희 대통령의 경호원은 총 4명이었다. 안가의 경비는 관행상 중정이 맡고 있었고, 같은 편이라고만 생각했기에 기습을 전혀 예상 못한 경호원들은 무방비 상태였다. 저녁 7시 40분, 김재규의 총성이 울리면서 박선호 과장은 경호원 대기실에 있던 두 경호원을 저격하여 즉사시켰다. 박흥주, 이기주, 유성옥은 주방 쪽을 향하여 총기를 난사했다. 혼란 속에 총 4명이 사망하고, 3명이 중상을 입었으며 이 중에는 이정오 요리사도 포함되어 있었다.
대통령 암살은 성공했지만 정작 범행 이후 김재규의 행보는 의문투성이였다. 유석술 씨와 안가 직원들은 자신들이 공격한 대상이 누구인지, 대통령이 사망했는지도 전혀 몰랐다고 한다. 김재규는 정승화 총장을 데리고 남은 안가 직원들에게는 별다른 후속 지침도 내려주지 않고 안가를 떠나버렸다.
박 대통령의 시신은 김계원 비서실장이 병원으로 옮겼다. 박선호 과장은 안가 내부를 수습하며 부상자인 이정오 씨를 병원으로 보내고, 목격자인 심수봉, 신재순 두 여성도 그대로 돌려 보냈다. 이기주는 유석술 씨에게 박 대통령을 저격했던 김재규의 총을 은닉해줄 것을 부탁했다고 한다.
김재규는 총소리의 정체를 캐묻는 정승화에게 박 대통령의 유고를 알리면서도 자신이 쐈다고는 밝히지 않았다. 또한 김재규는 입이 마른다며 사탕을 까먹거나 구두도 신지 않은 양말 차림을 하고 있는 등, 제 정신이 아닌 상태였다고 한다.
김재규 일행이 탄 차량은 남산 중앙정보부와 용산 육군 본부로 가는 길목 사이에서 갈림길에 놓인다. 김재규는 결정을 내리지 못했고, 정승화는 계엄령을 핑계로 육군본부로 갈 것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만일 김재규가 자신의 수장이던 중정으로 갔다면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수도 있다.
하지만 판단력을 잃고 육군본부로 향한 김재규는, 김계원 실장의 고발로 대통령을 저격한 사실이 드러나며 6시간 뒤에 체포됐다. 아이러니하게도 김재규를 체포한 건, 김재규 본인이 궁정동으로 불러들인 정승화 총장이었다. 김재규는 의외로 순순히 체포를 받아들였다고 한다.
박 대통령의 사망은 다음날 뉴스에 속보로 보도되었다. 유석술 씨도 헌병대에 연행되며 전날의 사건이 대통령 암살이었다는 소식을 뉴스를 보고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김재규 일당은 '내란 목적 살인 및 내란 미수 혐의'로 법정에 세워졌다. 김재규는 법정에서 당당한 모습을 보이며 정권을 잡기 위한 쿠데타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또한 이전에도 박정희의 암살을 여러 번 시도 했었다고 폭탄발언을 하기도 했다. 김재규는 범행동기가 1972년 10월에 발표된 '유신헌법' 때문이라 주장하는 "야수가 된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쐈다"라는 유명한 어록을 남겼다.
또한 김재규는 충격적이게도 박정희 정권이 총칼로 국민들을 진압하려는 계획을 구상했음을 폭로했다. 당시 유신헌법을 비판하던 야당 총재 김영삼을 국회의원직에서 제명된 사건을 계기로 부산과 마산 시민들이 들고 일어난 '부마항쟁'이 벌어졌다. 김재규가 상황의 심각성을 보고하자 박정희 대통령은 국민들을 대상으로 발포도 가능하다며 강경 진압할 의중을 내비쳤고, 심지어 차지철은 "캄보디아에선 300만 명이나 희생시켰는데 우리는 1~200만 명 희생한다고 그까짓 거 문제될 거 있냐"는 발언까지 했다는게 김재규의 증언이다.
김재규의 진심은 과연 무엇일까. 권력투쟁에서 밀려나 은인인 대통령을 죽인 파렴치한에서, 오랜 독재자를 몰락시킨 혁명가까지 그를 둘러싼 논쟁은 수십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그런데 재판은 무언가 이상하게 흘러갔다. 공판이 매일 진행됐고 속도도 매우 빨랐다. 재판정 뒤에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고 있었고, 그 중심에는 훗날 권력을 탈취하게 되는 전두환 보안사령관과 신군부가 있었다. 당시 유성옥-이기주 등의 국선 변호인이었던 안성일 변호사는, 전두환이 지휘하던 합동수사본부 관계자들로부터 협박을 당했고, 이들이 법정 상황을 전부 모니터링 해서 지시사항을 재판부로 쪽지에 써서 보냈다고 주장했다.
당시 군부 실세였던 전두환은 10.26 합동수사본부장을 맡으면서, 권력 서열이 수직상승했다. 박 대통령 사망 약 두 달 후인 1979년 12월 12일에는 결국 '12.12 신군부 쿠데타'를 일으키며 권력 공백에 빠진 대한민국의 정권을 탈취했다. 12.12 이후 10.26 판결은 더욱 속전속결로 진행됐고, 대법원 판결까지 초고속인 5개월 밖에 걸리지 않았다.
김재규는 마지막까지 부하들은 자신의 지시에 따른 것뿐이라며 극형만은 면하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부하들도 잘못은 인정하지만, 다시 그 순간이 온다 해도, 명령에 따를 수 밖에 없다고 이야기했다. 또한 이들의 가족들은 어느날 갑자기 남편이, 아버지가, 대통령을 살해한 내란 미수범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쓰고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는 고통을 겪어야했다.
대법원은 김재규를 포함한 모든 피고인들을 사형으로 확정했다. 범행에는 가담하지않았던 유석술 씨는 범행도구인 총기은닉죄로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변호인측은 사형집행을 연기하기 위하여 재심 신청서를 제출했지만 최종판결 4일 후 속전속결로 사형이 집행되었고 재심신청서는 사후인 1980년 8월에 기각됐다. 이중 대령으로 현역 군인이었던 박흥주는 단 한 번의 재판 후 사형이 집행되었고, 나머지 주동자인 김재규, 박선호, 이기주, 유성옥, 김태원의 5명은 한 날에 사형에 처해졌다.
한편 궁정동에서 살아남은 사람들도 적지 않은 후유증을 겪어야했다. 요리사 이정오 씨를 비롯해서 직원들은 모두 실직자가 됐다. 이정호 씨는 재취업도 쉽지 않아서 결국 미국으로 이민을 가야 했다. 유일하게 사형을 면한 유석술 씨는 40년이 흘렀지만 아직도 그날이 생생하게 기억난다며 매일 보던 사람들이 뜻하지않은 사건에 휘말려 사형까지 당한 것이 믿기지 않는다고 밝혔다.
주범인 김재규는 사형을 당하기 전에 "난 오늘 이 나라의 자유민주주의를 회복시켜 놨다. 이런 자부를 하고 있다. 내가 못 봤다 뿐이지, 틀림없이 오기 때문에 나는 웃으면서 갈 수 있다"라는 말을 남겼다. 하지만 이후 전두환이라는 또다른 독재정권이 등장하면서 김재규가 생각했던 '1980년의 봄'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그로부터 다시 수년의 희생과 시행착오를 겪고나서야 봄을 되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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