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체반정' 거부하며 소신껏 글쓴 이옥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조선왕조에서는 3차례의 반정(反正)이 있었다. 1506년 9월의 중종반정과 1623년 3월의 인조반정은 일반적으로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런데 또 한 차례 반정이 있었다고? 정조 때의 문체반정(文體反正)이다. 앞의 두 반정은 정치적인 데 비해 뒤의 반정은 문화적이라는 데 차이가 있다.
반정이란 백성들의 뜻에 어긋나는 임금을 천명에 순응하여 교체하는 것을 의미하지만, 백성들이 직접 권력을 장악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혁명이나 쿠데타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또 문체반정은 집권자가 직접 집행하므로서 일반적인 반정과는 의미가 크게 다르다. 그럼에도 사서에 '문체반정'이라 하여 그대로 쓰기로 한다.
흔히 호학군주로 알려지고 규장각을 창설하는 등 문화·예술분야에 조예가 남달랐던 정조는 북학파들의 새로운 문체와 기풍을 극단적으로 배척했다. 연암 박지원이 수필과 소설 형식으로 지은 중국 여행기 <열하일기>는 신랄한 풍자와 현실비판으로 사람들에게 큰 인기를 모았다. 이와 유사한 문체의 글(책)이 속속 출간되고, 또 청국에서 각종 소설책이 들어와 백성들에게 널리 익혔다.
정조는 즉위 초부터 당시 풍미하던 의고문체나 소설류에서 파생된 잡문체를 배척하고 주자류(朱子流)의 글쓰기를 강조했다. 조정의 대신들을 비롯 유생들이 지엄한 어명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다산 정약용도 다르지 않았다.
경이 내일 대사성과 같이 성균관에 가서 승보시를 베풀되, 제생(諸生)에게 호유하여 문체를 가볍고 곱고 들뜨고 교묘하게 짓는 자와 필법이 뾰족하고 비뚤고 기울어지고 나부끼게 쓰는 자들 일체 엄금하라.
문체는 진실로 졸지에 크게 변화시키기 어렵다 하더라도 필법은 한 번 보아도 그 전중(典重)하거나 의경한 것을 알 수 있으니, 가르침을 따르지 않는 자는 곧 낙과(洛科)시키도록 하라.
이와 같이 하였는데도 또다시 전처럼 하고 고치지 않는 자는 선비로 대우할 수 없다. 오직 담당 관원이 다스리기를 어떻게 하느냐에 달려 있을 뿐이다.(<정조실록 47권>, <문체반정>)
그런데 여기에 '반역'하는 선비가 있었다. 이옥(李鈺, 1760~1813)이다. 성균관 유생으로서 과문(科文)에 소품체(小品體)를 써내었다. 다른 글도 아닌 과문에 임금이 극력 배척하는 형식의 글을 제출한 이옥의 성깔은, 글쟁이의 참모습을 보여 주었다.
문체반정 정책의 시행에 있어서 사람에 따라 신분과 처지에 따라 문책이 달랐다. 남공칠과 같은 사환가(仕宦家)의 자제에 대해서는 정조가 직접 엄하게 훈계하여 문체를 고치게 하고 안의현감으로 나가 있는 박지원에 대해서는 남공칠을 통하여 "문체를 고치면 남행(南行) 이지만 문임(文任, 홍문관·규장각 등의 청화한 관직)을 주겠다"라고 달래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옥과 같은 한사(寒士)에 대해서는 한 번의 기회도 주지 않고 가차없이 처분을 내려 전도를 막아버렸다. 이 얼마나 불평등 불공정한 일인가?
그러나 이옥은 이로 인해, 그의 불우한 생애와는 반대로 그의 문학은 독자적인 창작 태도로 일관하여 우리나라 소품제문학의 한 고봉을 이루게 됨으로써 그 이름이 영원히 빛나게 될 것이다. (이우성, <역주 이옥 전집>, <간행사>)
임금에게 찍힌 문사가 살아가기란 쉽지 않았다. 여러 차례 국왕의 견책과 두 번의 군입대가 강요되었다. 벼슬길은 멀어지고 귀양길이 가까웠다. 그럴수록 그는 소풍체 작품을 통하여 인정과 소소한 풍물을 있는 그래도 묘사하여 문학의 장르를 넓게 열었다. 몇 가지 주제의 글 중에서 일부를 소개한다.
벌을 읊은 부
벌은 실로 시랑 같은 놈인지라
그 몸에 꿀과 칼을 지니고
망령되이 관아에 나아간다고
공연히 꽃 탐하기를 일삼는다.
벌들이 아침 저녁으로 일정한 시각에 벌집에 출입하는 모양을 관리가 관청에 열지어 참견하는 것에 비유한 것이다.
벼룩을 읊은 부
너는 미물로서
침상과 마루에 모여 사는구나
마침 나는 천성이 게을러서
석 달 동안 소제를 하지 않았으니
목마르면 땀을 마실 수 있고
굶주리면 때를 빨아먹을 수 있다.
사람으로서 너에게
또한 후덕하지 않음이 아니거늘
어째서 너는 만족하지 못하고
와서 감히 나를 침해하는고
내 피는 술이 아니니
어찌 너의 잔질을 용납하리
나의 피부엔 병이 없거늘
어찌 네 침으로 찔러대는고!?
나는 이해할 수 없구나
또한 너의 그 심보를
너는 사람의 고혈을 빨 수 있고
사람의 혈(穴)을 파고들 줄 안다고 한다.
다음은 과거장의 난장판에 관해 쓴 <과책(科策)>의 중간 부문이다.
아! 물을 잘 다스리는 자는 물의 근원을 소통시키고 그 흐름을 막지 않으며, 사람을 잘 다스리는 자는 사람의 마음을 바르게 하고 그 향하는 뜻을 막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저 유생들이 과장에 나아감에 그 바지를 세 번 묶고 등불을 높이 들고 자리를 짊어진 채, 사람이 죽어도 서로 돌보지 않고, 자신이 죽어도 스스로를 아끼지 않는다. 과장의 문을 두드리고 외쳐대는 것은 사나운 군졸이 성을 공격하는 듯하고, 과장에 들어가 달리는 것은 건장한 사내가 토끼를 쫓는 듯하였다. 위의는 아예 논할 것도 없고, 목숨도 또한 보장되지 않는다.
저들도 또한 어찌 즐거워서 그렇게 하겠는가? 진실로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좋은 자리를 얻지 못하고, 좋은 자리를 얻지 못하면 답안지를 일찍 내지 못하며, 일찍 내지 못하면 시험관이 내쫓아 해액(解額)에 들 수 없어서이다. 그러므로 과장의 폐해는 모두 시험관이 답안지를 일찍 거두는 것에서 연유한다. 서리와 노복은 모두 서수(書手)를 데려 오고, 머슴과 군졸과 건부(健夫)들은 모두 수행하는 종자(從者)로서 모인다.
한 사람이 답안지를 내는데 열 사람이 입장하니, 과장은 어쩔 수 없이 어지럽게 서로 다투어 왁자지껄함이 극성하고, 심지어는 서로 밟아 살상하는 지경에 이르고야 마는 것이다. 그런데 그 폐해를 바로잡는 방법을, 답안지를 일찍 내려고 탐하는 마음에서 찾지 않고, 다만 답안지를 먼저 내려고 다투는 행동에 두고 있으니, 과거에 대한 욕심은 사람에게 똑같이 있는 바인데, 누가 천천히 행동하여 뒤처지려 하겠는가? 이것은 모래를 모아 냇물을 막으려다가 무너지면 사람을 다치게 하는 격이다. 일소(一所)의 종장(終場)이 이소(二所)의 초장(初場)보다 흑심한 것은, 곧 금지할 수 없다는 명백한 징험이다.(<역주 이옥전집(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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