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나가던 정치스타, 시진핑에 밀려났다…한·중관계 중시한 리커창
시진핑(習近平·70) 중국 국가주석의 그림자에 가린 비운의 총리로 지난 3월 정계에서 은퇴했던 리커창(李克强) 전 국무원 총리가 27일 상하이에서 급성 심장병으로 별세했다. 68세.
리커창은 지난 10년간 시 주석과 함께 5세대 지도부의 서열 2위 총리로 중국 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기 위해 노력했다. 대중 창업과 만인의 혁신을 주장한 솽촹(雙創) 정책, 행정 간소화와 규제 철폐에 힘쓴 간정방권(簡政放權) 등이 그의 대표적인 정책이었다.
“뜻은 쉬운 일을 구하지 않았고, 일은 어려움을 피하지 않았다. 행동은 위험을 피하지 않았으며 최대한의 노력을 다했다.” 지난해 3월 리 전 총리는 마지막 내외신 기자회견에서 담담하게 지난 10년을 평가했다. 올해 3월에는 퇴임을 앞두고 “사람이 하는 일은 하늘이 보고 있다(人在做天在看)”는 의미심장한 송별사를 남긴 채 정계를 떠났다.
리커창은 중국 공산주의청년단(공청단)이 키운 차세대 정치 스타였다. 그는 1955년 안후이(安徽)성 딩위안(定遠)현에서 지방 현급 간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문화혁명 당시 명(明·1368~1644)의 개국 황제 주원장(朱元璋)의 고향 펑양(鳳陽)에서 5년 동안 농사를 짓고사는 하방 생활을 했다.
하방 기간에도 틈틈이 독서에 열중에 1만여 권의 서적을 독파했다고 한다. 1978년 대학 입시가 재개되자 베이징대 법학부에 합격했다. 입학 후 학생회 간부 육성 대상으로 뽑힌 그는 졸업 후 토플 성적이 630점에 이르러 미 하버드대 법학과 유학을 갈 수 있는 자격을 얻었지만, 당 중앙조직부의 권유에 정계에 입문하게 된다.
80년대 초 후야오방(胡耀邦) 당 총서기는 공청단 계열의 개혁적인 후계자 찾기에 힘썼다. 빼어난 수재로 차세대 주자군에 포함된 리커창은 베이징대 경제학부 대학원에 진학해 경제학 석학 리이닝(厲以寧) 지도를 받아 경제학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1년 그가 저술한 논문인 ‘중국 경제의 삼원(三元) 구조를 논함’은 중국 최고 권위의 쑨예팡(孫冶方) 경제과학상 논문상을 받았다.
정관계에 본격적으로 활동하면서 리커창은 각종 '최연소' 기록을 깨며 승승장구했다. 38세이던 1993년 공청단 중앙서기처 제1서기로 선출되면서 역사상 가장 젊은 성·부급(장관급) 간부가 됐다. 1997년 15차 당 대회에서 그보다 두 살 많은 시진핑과 중앙위원에 선출되며 5세대 지도부에 안착했다.
43세이던 1998년 허난성의 역대 최연소 성장에 임명됐다. 국가 차원의 동부선행, 서부대개발 사업과 연계한 '중원굴기'를 발전 전략을 내세우면서 부임 당시 4976위안이던 허난성의 1인당 GDP를 2003년 7590위안으로 늘였고, 농민 1인당 소득도 평균 20% 정도 높였다.
2004년 동북부 랴오닝성의 당 서기로 자리를 옮긴 그는 '동북진흥'을 추진했다. 허난성의 경제개혁 경험을 되살린 리커창은 현지 국유기업의 주식제 개혁을 추진했다. 아울러 ‘취업자 0명인 가정을 없애겠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가구당 최소 1명은 취업시키는 정책을 실행했고, 판자촌 문제 해결에 노력했다.
공청단파의 대부인 후진타오 주석이 밀었던 '리커창 대망론'은 그러나 성공하지 못했다. 리커창은 2007년 10월 17차 당 대회에서 장쩌민·쩡칭훙이 후원한 태자당 파벌의 시진핑에 한 단계 밀린 서열 7위의 상무부총리에 올랐다.
부총리가 된 리커창은 전력소비량, 은행대출 잔액, 철도화물 운송량 등의 경제지표가 불투명한 GDP 수치보다 더 객관적이라며 ‘리커창 지수’를 창안했다. 이를 참조해 영국 이코노미스트가 전력소비량 40%, 대출 잔액 35%, 화물 운송량 25%로 가중치를 부여한 단일 지수로 ‘커창 인덱스’를 만들기도 했다. 부총리로 재임하던 5년간 환경·식품안전·의약·부동산 등 각종 현안을 해결하면서 차기 권력 경쟁에서 역전을 노렸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2012년 시작된 '시·리 시대' 내내 리커창은 1인자 시진핑의 견제를 받으면서도 꾸준히 개혁을 추진했다. 특히 그는 2019년 3월 양회 기자회견에서 혁신적인 차세대 산업의 육성을 강조했다. “새로운 업종, 새로운 모델을 멋대로 방치하거나 간섭해 싹을 죽여선 안 된다”며 “우리가 이미 아는 기지(旣知)는 알지 못하는 미지(未知)보다 훨씬 적다. 발전을 허락하고 발전 중에 문제가 나타나면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리커창에게도 역전의 기회가 있는 듯했다. 20차 당 대회를 앞둔 지난해 봄 상하이 봉쇄로 경제 충격이 커지면서 시진핑·리커창 갈등설이 부상했다. 당시 월스트리트저널(WSJ), 파이낸셜타임스(FT) 등은 '리커창 대망론'을 타진했다.
한 때 해외 SNS에서 ‘리의 부상과 시의 퇴조(李上習下)’란 말이 돌았으나 그해 여름 사그라졌다. 리커창은 자신과 같은 공청단파이자 동갑인 왕양(汪洋) 정협주석과 함께 용퇴하는 조건으로 후춘화(胡春華) 부총리를 차기 총리로 밀었으나 끝내 실패했다. 이어 정계에서 전격 은퇴했다.
리커창은 한국과의 관계를 중시하는 편이었다. 부총리와 총리 시절 각각 한 차례 한국을 방문했다. 2015년 10월 말 한·중·일 정상회담 참석을 위해 서울을 방문할 당시 박근혜 대통령과 회담을 갖고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발효를 논의했다.
유족으로는 청훙(程虹·66) 여사와 딸이 있다. 리커창은 베이징대 공청단 서기 시절 칭화대에서 영문학을 배우던 청 여사와 만나 결혼했다. 청 여사는 영문학 교수로 유창한 영어 실력을 지녀 리커창의 소프트파워로 불렸다. 딸도 베이징대를 졸업한 수재다.
한편 리커창의 공식 부고는 27일 오후 늦게 발표됐다. 관영 신화사는 이날 오후 당·전인대·국무원·전국정협 명의의 부고를 발표하고 리커창 동지는 “중국 공산당의 우수한 당원으로 오랜 검증을 거친 충성스러운 공산주의 전사이자 걸출한 무산계급 혁명가이자 정치가, 당과 국가의 탁월한 지도자”라고 그의 일생을 평가했다.
2550여 자의 부고는 “리커창 동지의 일생은 혁명의 일생, 분투의 일생, 빛나는 일생이었으며 온 힘과 온 마음을 인민을 위해 봉사한 일생이었다”며 “그의 서거는 당과 국가의 커다란 손실”이라고 애도하며 끝을 맺었다. 리 총리의 부고문은 지난 2019년 사망한 리펑 전 총리의 2700여자 보다 150여자 짧고, 지난해 11월 숨진 장쩌민 전 국가주석의 부고 5280여 자의 절반에 그쳐 그에 대한 당의 평가를 반영했다.
개혁 성향 지도자가 숨진 뒤 추모 열기가 대규모 시위로 이어졌던 선례가 있는 중국은 긴장하는 모습이 역력하다. 지난 1976년 1월 저우언라이 총리의 사망 이후 그를 추모하는 대학생 시위가 1차 천안문 사건을 유발했다. 1989년 4월엔 개혁파 지도자 후야오방 총서기가 숨지면서 2차 천안문 민주화 시위로 이어졌다가 유혈 진압됐다.
베이징=신경진 특파원 shin.kyung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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