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해철 떠난 지 9년, 여전히 당신이 그립습니다

김태훈 2023. 10. 27. 1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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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곡진 신해철의 삶과 음악... 다음 생에도 '내 친구'로 태어나주길 바라며

[김태훈 기자]

신해철이 노란 병아리 얄리를 집 앞뜰에 묻었던 1974년의 봄을 기억했듯, 우리도 갑작스럽게 그를 마음 속에 묻어야 했던 2014년의 가을을 여전히 기억한다. 어느덧 그가 하늘의 별이 된 지도 9년이 지났다. 까칠한 인상과 언변으로 논란을 몰고 다니기도 했던 그의 굴곡진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다양한 그의 모습과 마주하게 된다.

덕분에 우리는 다양한 모습으로 그를 떠올린다. 싱어송라이터, 미디(MIDI)의 선구자, 소신 발언을 주저하지 않는 논객, 유쾌한 라디오 DJ,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좋은 어른이자 인생의 멘토다. 미움받을 말과 행동을 주저하지 않았음에도 많은 이들의 가슴에 멋진 사람으로 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 답에 다가가고자 그의 삶과 음악을 회고한다.

신해철의 삶과 음악
 
 10월 27일은 신해철 9주기이다.
ⓒ 신해철닷컴
 
"숨 가쁘게 살아가는 순간 속에도/ 우린 서로 이렇게 아쉬워하는 걸/ 아직 내게 남아있는 많은 날들을/ 그대와 둘이서 나누고 싶어요."
무한궤도 '그대에게' 중에서.

서강대 철학과에 재학 중이던 신해철은 친구들과 함께 밴드 무한궤도를 결성해 1988년, MBC <대학가요제>의 마지막 팀으로서 대중 앞에 처음 등장했다. 적막이 감도는 공연장 안에 화려한 신시사이저 음이 겹치며 울려퍼지자, TV를 보던 사람들도, 심사위원으로 앉아 있던 조용필도 그들이 대상임을 직감했다. 청춘의 영원한 송가 '그대에게'가 첫선을 보이는 순간이었다. 

<강변가요제>에 출전했다가 탈락의 고배를 마신 신해철은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을 수 있는 곡을 만들고자 했다. 길고 웅장한 전주, 따라 부르기 쉬운 멜로디의 후렴, 모든 세션이 화려하게 몰아치는 구성 등 치밀한 전략들로 이루어진 '그대에게'는 성공적이었다.

무한궤도는 순식간에 세간의 관심을 받았고, 신해철은 아이돌 스타가 되었다. '그대에게'는 무한궤도 해체 후 솔로 활동을 할 때나 후술할 넥스트(N.EX.T) 활동기간에도 그의 셋리스트에서 빠지지 않았으며, 여러 차례 리메이크를 거치며 손을 보기도 했다. 히트곡이기도 했지만, 그만큼 그는 이 곡에 상당한 애착이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신해철은 가수의 삶을 꿈꿨으나 집안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혔다. 그는 아버지에게 혼날까 봐 몰래 이불을 뒤집어쓰고 멜로디언을 조금씩 불어가며 '그대에게'를 작곡했다. 그렇게 열심히 만들어놨더니 가요제 공연 직전, 신시사이저가 디스켓에 저장된 음원을 인식하지 못하는 오류가 터지기도 했다. 우여곡절 끝에 공연을 마친 그는 대상을 받았고, 그토록 원하던 가수가 되었다. 이 점을 생각하며 듣는 '그대에게'는 사랑하는 이에 대한 애정을 넘어 간절한 부르짖음으로 다가온다. 자신이 염원하는 어떠한 존재, 자유로운 음악가가 되고 싶다는 꿈, 음악 그 자체, 이 모든 것이 합쳐져 '그대'라는 한 단어가 되지 않았을까.

"난 변하지 않아 아쉬움은 남겠지만/ 아주 먼 훗날까지도 난 변하지 않아/ 나의 길을 가려 하던 처음 그 순간처럼/ 자랑할 것은 없지만 부끄럽고 싶지 않은 나의 길/ 언제나 내 곁에 있는 그대여/ 날 지켜봐 주오."
신해철 '길 위에서' 중에서.

솔로 뮤지션으로 나선 신해철은 1집 <슬픈 표정 하지 말아요>로 데뷔해 절절한 발라드를 불렀으나 자신이 원하는 음악적 방향과는 괴리가 있었다. 이에 그는 어떠한 간섭 없이 혼자의 힘으로 모든 작업을 해보고자 했다. 1991년, 국내 최초로 미디를 활용한 앨범 < Myself >가 탄생했다. 주체적인 것은 작업 과정뿐만이 아니었다. 수록곡들의 내용을 종합해 보면 그에게 인생이란 미래에 대한 불안, 사랑의 아픔, 차가운 세상 속에서의 공허함을 짊어진 채 나만의 길을 한 걸음씩 걷는 것이었다. 이 작품을 발매한 뒤부터 그는 본격적으로 그러한 길을 걸었다. 후회와 부끄러움이 없기 위한 고행길이었다.

"그대여 꿈을 꾸는가 너를 모두 불태울 힘든 꿈을/ 기나긴 고독 속에서 홀로 영원하길 바라는가/ 사라져가야 한다면 사라질 뿐 두려움 없이."
넥스트 'The Ocean: 불멸에 관하여' 중에서.

1992년, 신해철은 밴드 넥스트를 결성해 1집 < Home >을 발매했다. 테크노와 록을 결합하여 삭막한 현대사회를 노래하는 '도시인', 감미로운 발라드 '인형의 기사 Part II' 등이 주목을 받으며 방송 출연이 없었음에도 많은 인기를 끌었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군 복무 도중 대마초 흡연 파동으로 불명예제대 및 방송 출연 금지를 당하게 된 그의 재기는 어려울 것만 같았다.

그러한 최악의 상황에서도 1994년, 2집 < The Return of N.EX.T Part. 1: Being >이 등장했다. 어둡고 강렬한 메탈이자 실험적인 구성으로 가득한 프로그레시브 록 앨범이었다. 이전부터 존재했던 음악가로서의 장인정신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강하게 발현되었다. 교통사고, 다툼 등으로 멤버 변동이 잦았기에 어쩔 수 없이 많은 작업을 신해철이 직접 해야 했고, 그 덕분인지는 몰라도 작품 속에는 그의 의식 또한 강하게 자리잡고 있다.

러닝타임이 10분에 달하는 대곡 'The destruction of the shell: 껍질의 파괴'는 3막 구성으로 나뉘어 변칙적인 리듬과 강렬한 기타 속주가 인상적인 헤비메탈이다. 통제에 대한 분노와 자유에 대한 갈망을 더욱 직접적으로 담아낸 가사 또한 그의 사상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전설적인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킹 크림슨의 영향을 받아 쓰인 마지막 곡이자 넥스트 팬들이 가장 좋아하는 곡 'The Ocean: 불멸에 관하여'는 그가 추구하는 삶이 집약되어 있다.

헛된 불멸보다는 그저 후회 없는 생을 바랄 뿐이다. 사라져야만 한다면 두려움 없이 사라질 뿐이라는 말은 죽음이 결코 두렵지 않을 수 없기에 더욱 비장한 역설을 가진다. 앨범의 대중성을 견인한 곡은 잔잔한 어쿠스틱 발라드 '날아라 병아리'다. 듣기 편안한 멜로디와 음색으로 많은 사랑을 받았으나 이 또한 죽음을 노래한다. 다른 곡에 비해 그저 조금 여리고 따스할 뿐이다.

"아직 단 한 번의 후회도 느껴본 적은 없어/ 다시 시간을 돌린대도 선택은 결국 너야."
넥스트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 중에서.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마 앞만 보며 날아가야 해/ 너의 꿈을 비웃는 자는 애써 상대하지 마."
넥스트 '해에게서 소년에게' 중에서.

1995년, 3집 < The Return of N.EX.T Part. 2: The World >는 더욱 넓어진 시각과 풍부한 사운드로 큰 호평을 받았다. 전작과는 달리 모든 멤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세션 자체의 힘이 탄탄해진 것은 물론, 더 좋은 사운드를 추구한 신해철의 집념이 강하게 작용했다.

대표곡으로는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성수대교 붕괴 사고라는 큰 재난과 마주한 사회의 현실을 직접적으로 비판한 '세계의 문', 동성동본 금혼법 문제를 제기하며 당사자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힘겨워하는 연인들을 위하여'가 있다. 이 사회에 대한 냉소주의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으나, 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에게는 한없이 따뜻한 신해철 특유의 온정주의를 볼 수 있다.

다음 앨범 < Lazenca - A Space Rock Opera >는 무려 한 작품을 애니메이션의 OST로 사용했다. 애니메이션 <영혼기병 라젠카> 자체는 흥행에 실패했지만, 음악은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교향곡의 형식을 빌린 메탈 'Lazenca, save us'는 특유의 비장미로 주목받았다.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앞을 보며 날아가자고 소년을 격려하는 '해에게서 소년에게'에서는 꿈을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에 대한 강렬한 응원가로 다가온다.

"저 강들이 모여드는 곳 성난 파도 아래 깊이 한 번만이라도 이를 수 있다면/ 나 언젠가 심장이 터질 때까지 흐느껴 울고 웃으며 긴 여행을 끝내리 미련 없이."
신해철 '민물장어의 꿈' 중에서.

1997년, 넥스트가 해체되었다. 신해철은 영국 유학길에 올라 전자음악을 공부했다. 윤상과 함께 프로젝트 그룹 노땐스로 테크노를 한 차례 선보인 바 있었던 그는 실험적인 솔로 앨범과 밴드 비트겐슈타인으로 자신만의 일렉트로닉을 개척한다. 세기말과 새천년을 향해 달려가던 시기, 사랑하는 이에 대한 애정과 관심으로 가득한 '일상으로의 초대', 그리고 신해철 본인이 자신의 장례식장에서 틀어야 할 곡이라고 언급한 '민물장어의 꿈'이 탄생했다. 2001년부터는 라디오 <고스트스테이션>의 DJ가 되어 FM과 인터넷 방송을 오가며 그 시절 청춘들의 쉼터가 되어주었다.

2000년대 초반에 접어들어 넥스트를 재결합했을 때, 신해철은 사회운동가이자 논객으로서도 주목받았다. 대중에게 자신의 곡을 팔아야 하는 가수이자 발언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연예인의 위치에서도 그는 자신의 소신을 당당하게 밝혔다.

MBC < 100분 토론 >에 자주 얼굴을 비추던 그는 그 당시 사회상으로는 불리할 수밖에 없었던 위치에 주로 앉아 있었다. 대마초 비범죄화, 간통죄 폐지, 학생 체벌 금지 등 발언하는 것만으로도 손가락질받을 것이 뻔했던 주제였다. 하지만 그는 그러한 사실을 알지언정 비난이 두렵다는 이유로 자세를 낮추는 일은 없었다. 미움받을 용기였다.

그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더라도, 합리적인 범위에서 자신의 철학과 구체적인 사례를 근거로 논리정연하게 주장을 전한 뒤 반대의견을 경청하는 모습은 논객으로서 가장 모범적인 자세였다. 딱딱하고 긴장되는 분위기를 푸는 약간의 유머도 잊지 않았던 것은 덤이다. 2008년 한 해, 가장 좋았던 뉴스가 뭐냐고 물었더니 딱히 좋은 뉴스랄 게 없었고 그나마 넥스트 신보 발매 정도가 좋았던 것 같다는 답변이 그 예다.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에서 코미디 연기를 선보이며 마음껏 망가지는가 하면, 독설가 이미지 탓에 그를 잘 모르는 어린 팬들에게는 무서운 인상을 주기도 했다. 그 와중에도 언제나 자신의 위치에서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했다. 그가 그토록 바란 후회 없는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 21세기의 신해철은 쭉 그래왔다. 

갑작스러웠던 이별
 
 고 신해철(자료사진).
ⓒ 이정민
 
2014년 10월 27일, 신해철이 세상을 떠났다. 갑작스러웠다. 넥스트의 재결성을 비롯한 여러 음악 프로젝트와 활발한 방송 출연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였다. 많은 사람이 분노하고 슬퍼했다. 삶과 죽음에 대해 그 누구보다 많이 생각했으며 그것을 토대로 음악을 만들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의 죽음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마지막 방송에서조차 자기 생각을 아낌없이 이야기했다. JTBC <속사정 쌀롱>의 MC로 출연한 그는 이상과 현실 속에서 갈등하는 청춘들의 마음을 어루만졌다.

"1m 앞이 절벽인지도 모르는 어둠 속에서 의미 없는 곡괭이질을 해야 한다. 사람들은 그거라도 하라며 다그치지만, 몸이 힘들어서 못 하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기 때문에 못 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이 정당하다는 것도 아니지만, 일방적으로 비난할 수도 없다."

후회하지 않는 삶, 부끄럽지 않은 삶, 자유로운 꿈을 꾸는 삶. 그의 이상과 신념은 단 한 번도 변질되지 않았고 자신의 생이 끝날 때까지 그것을 지켰다. 그것이 그의 당당한 태도를 만들었을 것이다. 인상은 참 무서웠지만, 가끔 농담도 던져가면서 인생 이야기를 자연스레 풀어나갈 줄 아는 사람이었다.

많은 사람이 그에게 위로받았다. 이 세상은 좋은 음악가 이전에, 훌륭한 어른을 잃었다. 9년이 지난 지금도 그 생각은 유효하다. '날아라 병아리'의 마지막 구절처럼 언젠가 다음 세상에도 내 친구로 태어나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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