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우의 스포츠 랩소디] EPL에서 자제해야 하는 응원 도구는?

김식 2023. 10. 27.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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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11월 영국 런던에서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은 세르비아와 A매치전을 가졌다. 이 경기는 대표팀이 런던에서 평가전을 가질 때 주로 이용하는 풀럼의 홈구장 크레이븐 코티지에서 열렸다. 당시 필자는 퍼트니 브리지 지하철역에서 구장으로 걸어가던 중 기념품을 파는 노점상을 여러 번 마주쳤다. 눈길을 끄는 상품도 있었다. 바로 코리아와 세르비아가 반반씩 섞인 스카프였다.

두 팀을 섞어 놓은 스카프에 필자는 본능적으로 거부감이 먼저 들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나름 수긍이 갔다. 한국과 세르비아는 축구 라이벌도 아니고, 특히 그 경기는 양국 간에 열리는 첫 번째 공식 경기이자 친선전이기 때문이다. 만약 한일〮전에 앞서 한국과 일본이 섞인 스카프를 판다면 짜증이 났을 것이다. 비슷한 의미로 프리미어리그(EPL)의 라이벌 클럽 2개를 섞어서 스카프를 만든다면, 현지 팬들은 얼마나 화가 날까 하는 생각도 같이 들었다.

이렇게 경기를 갖는 두 팀을 섞어 만든 스카프를 영어로 ‘half-and-half scarves(반반 스카프)’라고 부른다. 반반 스카프의 등장은 현대 축구에 나타난 새로운 특징 중 하나다. 원래 반반 스카프는 특별한 경우에만 등장했다. 컵 파이널, 자선 경기, 국가 대항전, 또는 리버풀과 셀틱같이 특별한 관계에 있는 클럽에 한정해서 쓰인 것이다.

리버풀과 셀틱은 아일랜드의 전통을 공유하는 노동자 계급의 도시에서 탄생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로 인해 상호 존중과 우정이 두 클럽과 팬들 사이에 존재한다. 사진에서 팬들이 들고 있는 반반 스카프는 ‘우정 스카프(friendship scarves)’라고 불릴 때도 있다. 우정 스카프의 중간에는 두 개의 손이 악수하는 장면이 들어가기도 한다. 셀틱 홈페이지
 
치열하게 경쟁하는 일반적인 더비 경기와는 달리 리버풀과 에버튼이 맞붙는 머지사이드 더비는 전통적으로 ‘친선 더비(friendly derby)’라고 불렸다. 1989년 힐스버러 참사로 리버풀 팬 96명이 목숨을 잃은 이후, 머지사이드의 두 클럽과 서포터스들은 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오랫동안 협력했다. 사진은 2012년 9월 에버튼이 리버풀과의 연대를 보여주기 위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행사의 한 장면. 두 클럽의 셔츠를 입은 소녀와 소년의 등에는 사망한 팬들의 숫자인 9와 6이 새겨져 있다. 리버풀과 에버튼이 섞인 반반 스카프는 이런 뜻깊은 행사에 종종 등장한다. 리버풀 홈페이지

반반 스카프는 유럽클럽 대항전에도 등장한다. (좌) 2022년 10월 산 시로에서 열린 첼시와 AC밀란의 챔피언스리그 경기를 앞두고 반반 스카프를 두른 팬의 모습. (우) 2023 유로파 컨퍼런스리그 결승전을 기념해 만든 웨스트 햄과 피오렌티나의 반반 스카프. 이 사진에 등장한 반반 스카프는 클럽에서 판매하는 공식 제품으로 가격은 18파운드다. 그에 반해 축구장 근처 노점상들이 판매하는 반반 스카프는 비공식 제품으로 훨씬 싼 가격에 퀄리티는 떨어진다. 게다가 저작권을 침해해서 만든 이런 스카프 판매 대금의 일부는 범죄조직으로 들어간다는 증언도 있다. 첼시, 웨스트 햄 홈페이지


이렇게 특정한 경우에만 보이던 반반 스카프는 2010년대 초반 이후 EPL 경기장에서 급속하게 늘어난다. 현재는 리그의 모든 경기에서 이런 스카프를 구할 수 있다. 왜 이런 현상이 생긴 것일까?

반반 스카프의 대중화는 현대 축구의 소비자가 변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EPL은 더 이상 영국인들만의 리그가 아니다. 수많은 외국 팬들이 EPL을 보기 위해 영국을 찾고 있다. 2019년 올드 트래포드와 안필드를 방문한 외국인 관광객만 44만 명에 달했는데, 반반 스카프는 이들에게 인기 있는 아이템이다. 

게다가 영국의 많은 젊은 팬들은 그들의 부모 세대와 다른 축구관을 가지고 있다. 유럽클럽협회(ECA)가 2020년 축구팬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에 의하면, 24%의 영국인이 두 개 이상의 클럽을 서포트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젊은 세대로 한정하면 이 숫자는 크게 올라간다. 2019년 영국의 16세~24세를 조사한 연구에 의하면, 46%가 최소 2개 이상의 클럽을 서포트한다고 나왔다. 3개 이상의 클럽을 응원한다는 비율도 무려 27%에 달했다. 또한 스타 선수의 존재 여부도 젊은 세대에게는 중요한 요소였다. 기성세대의 ‘찐팬’이라면 뒷 목 잡을 일이 젊은 세대에는 보편적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반반 스카프 중 현지 팬들의 가장 큰 분노를 일으키는 것은 라이벌 팀을 섞은 것이다. 사진은 2022년 8월 올드 트래포드 앞에서 맨유 셔츠를 입은 한 여성이 맨유-리버풀이 섞인 반반 스카프를 들고 있는 모습. 잉글랜드에서 가장 치열한 라이벌인 맨유와 리버풀을 합친 스카프가 존재한다는 자체가 놀랍다. 게티이미지

반반 스카프 금지 펍 사진: 2015년 맨유의 서포터스들이 즐겨 찾는 맨체스터의 한 펍은 더비 경기가 열릴 때 반반 스카프를 착용한 사람의 입장을 금지했다. “예외 없이 반반 스카프는 금지. 제발 그것들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죄책감에서 벗어나라”는 문구가 인상적이다. 축구저널리스트 서지 아담 트위터


반반 스카프의 착용을 두고 찬반양론도 활발하다. 찬성하는 쪽은 “티켓을 기념으로 간직하듯이, 경기 날짜가 인쇄된 반반 스카프는 그 경기를 봤다는 기념품”이라고 반박한다. 특히 “더비 경기를 보기 위해 몇 시간 동안 비행기를 타고 날라온 외국 팬에게 이러한 스카프가 주는 의미는 남다르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축구 문화와 소비자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라”고도 말한다.

반대하는 쪽은 “기념품으로는 반반 스카프보다 매치 데이 프로그램이 더 좋다”, “반반 스카프 대신 두 팀의 스카프를 사는 것이 더 좋은 기념품이다”, “진짜 축구팬이라면 한 팀만 응원해야 한다”, “품위를 가져라”, “반반 스카프는 중산층과 돈 많은 외국 관광객이 노동자들의 스포츠였던 축구를 빼앗아 갔다는 상징”이라고 주장한다.

전통적으로 영국인이 생각하는 축구팬은 단순히 어떤 브랜드의 고객이 아니다. 축구는 사회, 문화, 관습적으로 팬들과 함께 하며 그들 삶의 일부다. 하지만 반반 스카프는 팬을 단순한 소비자처럼 보이게 만들기 때문에, 그들은 화가 나는 것이다.  

코로나 엔데믹 시대를 맞아 영국 축구장을 방문하는 한국인의 숫자가 늘고 있다. 비록 팬 문화는 변하고 있지만, 아직도 많은 찐팬들은 반반 스카프(특히 라이벌 팀이 합쳐진)를 끔찍이 싫어한다. 우스꽝스러운 반반 스카프의 등장으로 라이벌 클럽 간의 열기는 밋밋해졌고, 이는 축구의 근본을 흔든다는 주장도 있다. 아무쪼록 여러분이 영국 축구장을 방문한다면 경기에 좀 더 집중하면 좋겠다. 셀카도 적당히 찍자. 설사 반반 스카프를 구입하더라도 이는 장식용 기념품일 뿐, 실제로 두르고 다니는 우를 범하지 말자. 

경희대 테크노경영대학원 객원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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