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남성과 젊은 여성이 만드는 자연밥상
[김성호 기자]
▲ 영화 <열두 달, 흙을 먹다> 포스터 |
ⓒ 얼리버드픽쳐스 |
집 앞 텃밭에서 시금치를 뽑아온 남자가 물을 틀고 시금치를 손질한다. 시금치 뿌리에 묻은 흙을 흐르는 물에 살살살 문지르는 장면 위로 남자의 독백이 나레이션으로 흘러나온다.
그의 목소리가 말한다. 시금치 뿌리는 씻기가 어렵다고, 그래서 멋모르던 시절엔 가위로 잘라냈다고 말이다. 그런데 한 스님이 그 모습을 보았다는 것이다. 스님은 동자승으로 음식을 준비하던 저를 혼내지 않고, 떨어진 뿌리를 주워들었다고 한다. 그리고는 말하길, "제일 맛있는 부분을 버리면 안 되지"라고 하였고. 사내는 그 뒤로 시금치 뿌리를 잘라 버리는 대신, 뿌리째 씻어 손질한다고 하였다.
▲ <열두 달, 흙을 먹다> 스틸컷 |
ⓒ 얼리버드픽쳐스 |
땅을 뒤져 죽순을 뽑는 동자승
영화엔 이런 장면도 있다. 봄이 와 푸릇한 죽순이 돋는 봄철이다. 그는 어릴 적 동자승으로, 나이든 스님과 함께 죽순을 캐러 나왔던 시절을 떠올린다. 스님이 어린 저에게 말한다. "땅 위로 솟은 것은 딱딱하단다"라고. 스님은 이어 "속에서 죽순이 밀어 올려 금이 간 땅을 찾아라"고 지시한다. 어린 동자승은 살짝 솟아 금이 가 있는 땅을 찾아 손을 밀어 넣는다. 그렇게 죽순을 캔다. 죽순을 감싼 두터운 껍질을 스님이 벗겨준다. 스님이 말씀하신다. "껍질은 버려라"고, "거름이 된다"고.
<열두 달, 흙을 먹다>는 한국 배급사가 적어놓은 '일본판 <나는 자연인이다>'라는 카피대로 자연과 그곳에서 사는 사람, 그를 찾는 또 다른 사람의 이야기다. 노년에 접어든 소설가 츠토무가 자연인이라면, 그를 찾는 중년의 편집자 마치코(마츠 다카코 분)가 방송인의 역할을 담당하는 듯하다.
▲ <열두 달, 흙을 먹다> 스틸컷 |
ⓒ 얼리버드픽쳐스 |
제 철 재료로 지어먹는 열두 달 이야기
쌀을 씻어 아궁이에서 밥을 짓고, 된장에 가지며 오이를 묻어두고, 시금치나 죽순을 캐어 그때그때 철에 맞는 음식을 해먹는 이들의 모습이 가만히 지켜보는 것만으로 휴식이 된다. 제철 재료를 수확하고 요리하는 과정의 아기자기함과 이를 진지하게 대하는 츠토무의 자세가 보는 이의 마음을 정화한다. 얼핏 비슷하리라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열두 달 스물네 절기의 선명한 변화와 그에 따라 달라지는 밥상 위 재료들의 모습은 영화를 다채롭게 이끈다.
영화는 츠토무의 밥상이 변하는 모습을 비추는 한편으로, 츠토무를 둘러싼 삶의 변화 또한 담박하게 그린다.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펼쳐지는 이야기는 인근에 홀로 사는 츠토무의 장모와 그녀의 죽음, 장례까지로 이어진다. 장모와 불편한 사이였던 처남 부부는 장례를 츠토무의 집에서 치르자고 권해오고, 도리가 아니라고 거절하던 그도 마침내 제안을 받아들일 밖에 없게 된다. 나름대로 장모와 교류하던 츠토무였고, 시신을 그저 방치해둘 수도 없었던 탓이다. 대신 상주는 처남부부가 맡고, 자신은 부엌에서 조문객들을 대접하기로 한다. 영화는 일본의 전통적 장례 과정을 그대로 내보이며, 손님들을 정성 다해 대접하는 츠토무의 음식 등을 인상적으로 잡아낸다.
▲ <열두 달, 흙을 먹다> 스틸컷 |
ⓒ 얼리버드픽쳐스 |
계절이 변화하듯 마음 또한 흘러가네
그러나 츠토무도, 마치코도 호감일 뿐, 누구 하나 분명하고 선명하게 관계를 진전시키자는 말을 밖으로 꺼내놓지 못한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계절이 변화하듯 이들의 마음 또한 스리슬쩍 흘러가는 것이다.
특별히 한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세월은 흘러만 가고 머리 위엔 허옇게 서리가 내려버렸다. 츠토무는 누가 보아도 노년의 초입에 들어선 초라한 사내다. 마치코는 도시에 사는 아직은 젊은 여성, 매력을 느낀다곤 하지만 무리하게 들이대기도 어려운 노릇이다. 둘 사이의 미묘한 관계와 감정, 변화하는 거리감을 보는 것 또한 <열두 달, 흙을 먹다>를 즐기는 방법이라 하겠다.
▲ <열두 달, 흙을 먹다> 스틸컷 |
ⓒ 얼리버드픽쳐스 |
기승전결 서사 없이 아름다움을 빚다
<열두 달, 흙을 먹다>는 미덕으로 가득한 영화다. 기승전결의 서사 없이도 삶 가운데 펼쳐지는 일상의 풍경만으로 보는 이를 자극하고 정화한다. 츠토무는 처음부터 끝까지 재료를 구하고 손질해 요리한다. 재료를 고르고 다듬으며 쌀을 씻고 상에 올리는 모든 과정이 정성스럽기 그지없다. 동자승 시절 배운 자세처럼 이 모든 과정 하나하나가 수련이라는 듯이 온 정신을 집중하여 마음을 담아 행한다. 그렇게 내놓는 음식을 카메라 앞에서 준비한 것에 뒤지지 않는 정성스러움으로 맛보고 씹어 삼킨다. 영화를 보는 관객은 그 앞에서 츠토무와 마치코가 느끼는 즐거움을 일부나마 공유한다.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를 지탱하는 중추적인 힘이 무엇인지가 설명되고 남는다.
츠토무가 행하는 많은 것이 이제는 사라진 자세이고 태도다. 그러나 츠토무가 카메라 앞에 있는 한 완전히 사라졌다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그 모습이 가진 아름다움을 그러나 우리 중 많은 이가 알고 있다. 그리하여 이 영화는 아직 힘이 있다.
오래되고 낡은 것에 애정을 드러내온 나카에 유지 감독이 직접 쓴 시나리오를 영화로 만들었다. <나는 자연인이다>가 유행하고 가만히 먹방을 보는 이들이 늘어나는 기묘한 시대, 온 정신을 집중해 맛난 음식을 만드는 이 소박한 사내의 1년을 지켜보는 일이 색다른 감흥을 안겨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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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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