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 40주년 정지영, 할리우드키드가 리얼리즘 감독이 되기까지…런던아시아영화제 67문답
데뷔 40주년을 맞은 정지영 감독이 한-영 수교 140주년을 맞은 해에 영국 런던아시아영화제가 기획한 특별상영전들을 통해 주목받고 있다.
제8회 런던아시아영화제(LEAFF, 집행위원장 전혜정)는 먼저, 개막작으로 정지영 감독의 ‘소년들’을 선보였다. 삼례 나라슈퍼사건에서 벌어진 강도치사 사건의 주범으로 몰린 소년들을 재수사하는 수사반장(설경구 분), 권력에 맞서 연대하는 시민들의 이야기를 그린 ‘소년들’은 오는 11월 1일 국내 개봉하는 따끈따끈한 신작이다.
전혜정 집행위원장은 “런던 내 시민들이 아껴주시던 LEAFF는 이제 전국 각지의 영화학과 학생들과 교수, 현지민들이 찾아주신다. 영국에 한국을 비롯해 아시아 영화들을 소개하고자 시작된 영화제의 취지가 채 10년이 되기 전에 빛을 보고 있어 감사할 뿐”이라면서 “특히 올해는 데뷔 40주년이 된 거장의 신작이 개막작이라는 소식에 더욱 많은 분이 멀리서 찾아와 주셨다. 스페인, 프랑스, 스웨덴 등 유럽의 각국 분들도 발걸음을 해주셨다”고 밝혔다.
런던아시아영화제 측은 특별 세션으로 ‘정지영 감독 회고전’도 준비했다. 개막작 ‘소년들’을 포함해 ‘남부군’(1990), ‘하얀 전쟁’(1992),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 ‘부러진 화살’(2012), ‘남영동 1985’(2012), ‘영화판’(2012), ‘블랙머니’(2019)까치 총 8편이 상영됐다.
이 가운데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한국영상자료원이 디지털 복원한 후 이번 런던아시아영화제에서 인터내셔널 프리미어로 공개되는 것이라 뜻 깊다. ‘영화판’ 또한, 정지영 감독이 영화계를 바라보며 품은 고민과 해답 찾기를 담은 다큐멘터리라는 점에서 회고전에 제격인 선택이다.
전혜정 집행위원장은 “영화제에서 정지영 감독님의 작품을 접한 관객들의 반응이 예상보다 뜨거웠다.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질문도 많이 나오고 감독님도 소년 같은 미소 속에 솔직하고 즐겁게 대답하셔서 현장 분위기가 매우 좋았다”고 전했다.
이어 “돌비시네마 등 좋은 환경에서 과거 작들이 상영됐고 해외 관객과 진솔한 대화를 나누었다. 감독님도 관객 분들도 활짝 웃으며 돌아가셔서 40년 동안 사회 부조리와 정의에 대해 탐구해 온 발길에 존경의 마음을 전하고자 했던 회고전의 의도가 구현된 것 같아 기쁘다”고 말했다.
회고전으로 끝이 아니다. 정지영 감독의 영화들은 이후 아시아영화 연구가 활발한 대학 도시들에서 찾아온 영화과 교수와 학생들의 필드 트립(현장 학습)으로 이어지고 있 다. “고조되고 있는 영국 내 K-무비에 대한 관심이 다양한 연구로 확산되는 계기를 마련하겠다”는 런던아시아영화제 측의 포부로 가능했던 일이다.
런던아시아영화제 측은 개막작 상영과 회고전을 선보임에 앞서 정지영 감독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정지영 감독의 성장기부터 연출 역사, 회고전에 상영되는 영화들을 소개하는 소책자를 제작하면서 감독의 생생한 목소리를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해서다. 책자에는 영문으로 실렸고, 다음은 정지영 감독과 인터뷰한 원문이다. 감독의 ‘소년미’를 엿볼 수 있는 답변이 인상적이다. 영어로만 공개되기엔 아까워서 런던아시아영화제 측에 원문을 요청했다.
<성장부터 데뷔까지>
1. 1946년 청주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성장했다. 어떤 청소년기를 보냈나?
- 공부를 잘했다(웃음). 모범생이었다고 할까? 가끔 일탈도 했지만, 아무튼 공부를 잘했다.
2. 그 시절 집에서 서점은 운영한 걸로 알고 있다.
- 중학교 때였다. 그때 한국의 전후 문학에 빠져 있었다. 당시 문학계엔 참여 문학과 순수 문학 사이의 논쟁이 있었는데, 난 전자 쪽에 좀 더 가까웠던 것 같다. 그 소설들을 통해 사회를 보는 눈과 삶에 대한 생각을 키울 수 있었다.
3. 일종의 문화적 요람 같은 곳이었나?
- 그런 셈이다. 하지만 문학에 대한 관심은 고등학생이 되면서 영화로 넘어갔다. 유현목 감독의 ‘오발탄’(1961)이 계기였다. 원작 소설은 물론, 영화잡지에 실린 시나리오까지 읽고 영화를 봤는데 뭔가 달랐다. 영화를 그냥 보는 게 아니라 ‘읽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새로운 영화적 감흥이었다. 어떤 이야기가 시나리오로 변형되어 영상으로 옮겨지는데, 그 일을 영화감독이 한다는 걸 깨닫게 된 거다. 그래서 영화감독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다.
4. 그 시절 한국 사회에서 영화는 어떤 위치였나?
- 예술로 생각하지 않았다. 오락이었다. 그때 ‘오발탄’을 만났고, 이후 영화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1960년대는 김기영, 김수용, 이만희, 신상옥 등의 감독들이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만들던 시기다. 그들의 영화를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 같은 감독들의 영화를 보면서 영화적으로 성장했던 것 같다. 그리고 그 시기 앨프리드 히치콕의 ‘싸이코’를 봤는데, 잊을 수 없는 기억이었다.
5. 대학에선 불문학을 전공했다.
- 처음엔 연극영화과를 갔다. 그런데 당시는 제작 실기를 하지 않고, 이론 수업만 했다. 그래서 얻을 게 없다는 생각에 고려대학교 불문과로 편입을 했다. 프랑스 영화에 심취해 있던 시기라 그런 선택을 한 건데, 프랑스어를 제대로 공부하지도 못 한 것 같다(웃음).
6. 영화계로 들어온 계기는 무엇이었나?
- 대학 선배 소개로 우연히 시나리오 고치는 일을 했다. 그때 공모전이 있었다. 연출, 시나리오, 촬영, 연기 부문의 지망생을 뽑는 것이었는데, 그때 선발되었다. 기억나는 게, 연출 지망생이 8명이었는데, 그때 1등을 한 사람이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을 만들게 되는 배용균 감독이었다.
7. 선발된 후엔 어떤 과정을 거쳤나?
- 6개월 동안 강의를 듣고, 이후엔 원하는 감독의 연출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나는 이만희 감독의 연출부를 희망했다. 그때 이만희 감독은 ‘삼포 가는 길’(1975) 후반 작업 중이었는데, 편집실로 가서 만났다. 그런데 그 작품을 유작으로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좌절하고 있을 때 김수용 감독 연출부 제안이 왔다. 그래서 처음으로 현장 경험을 했던 영화가 ‘내일은 진실’(1975)이었다.
8. 오직 김수용 감독 연출부에만 있으면서 8개 작품을 했다.
- 김수용 감독이 계속 일이 있었다. 그러다 보니 계속하게 된 거다. 당시 도제 시스템 속에서 10년 정도 있으면 감독이 될 수 있었는데, 난 감독 데뷔를 서둘렀다. 그러다 기회가 왔다. 김병총 작가의 소설 <내일은 비>가 당시 큰 인기였는데, 그 작품을 각색한 시나리오를 썼다. 그리고 김기영 감독의 프로덕션에서 촬영이 들어갔는데, 이틀 정도 찍고 더 이상 진행을 하지 못했다. 제작자인 김기영 감독과 의견 충돌이 있었다. 이때 친구인 이황림이 외국 소설 하나를 추천했다. 프랑스의 작가 피에르 브왈로와 토마 나르스자크가 쓴 소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사람>(1952)이었다. 앙리 조르주 클루조 감독이 1955년에 ‘디아볼릭’으로 영화화했던 바로 그 소설이었다.
9. 그래서 첫 영화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1983)를 만들게 되는데, 당시 현장 경험은 어땠나?
- 머릿속에서 구상한 화면과 당시 한국영화 현실에서 실제로 찍을 수 있는 화면 사이에 큰 차이가 있었다. 찍고 싶은 장면을 구현하는 게 쉽지 않았다. 그래서 촬영을 50퍼센트 정도 할 때까지 촬영감독이나 제작자에게 끌려 다니다가 이후엔 나름 요령이 생기면서 내가 주도적으로 연출할 수 있었다.
10. 그 시기 충무로의 분위기는 어땠나?
- 새로운 한국영화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있었고, 난 그런 생각을 가진 선후배들과 모두 친했던 것 같다. 프랑스문화원에 가면 그런 의지를 지닌 영화 청년들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영화를 많이 봤다. 그리고 몇 개월 동안이었지만 잠깐 평론가로 활동하기도 했다.
11.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는 1981년에 완성되지만 개봉은 1983년이 되어서야 할 수 있었다. 어떤 이유인가?
- 무슨 생각이었는지 제작자가 개봉을 미루고 있었다. 영화가 개봉을 해야 그 영화를 토대로 다음 작품을 이어갈 수 있는데, 아무 일도 못하고 있었다. 이때 방송사(MBC)에서 연락이 왔다. TV 단막극 연출 제의였다. 그래서 잠시 그곳에 PD로 들어갔다.
12. 어떤 경험이었나?
- 1년 정도 있으며 서너 편의 단막극을 만들었는데, 꽤 반응이 좋았다. 난 사실 그때 영화 만드는 걸 다 배운 것 같다. 멜로, 미스터리, 액션 등 다양한 장르에 걸쳐 나름의 실험을 했다. 일부러 그렇게 다양한 작품을 선택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해야 내러티브가 완성되고 플롯이 전개되는지 배웠다. 소중한 시간이었다.
<여성에 대한 영화들>
13. 두 번째 영화인 ‘추억의 빛’은 프랑수아 트뤼포 감독의 ‘쥴 앤 짐’(1962)을 연상시키는 작품이었다.
- 시나리오를 친구인 이황림이 썼는데, 그 친구는 엄청난 영화광이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영화에 대한 오마주가 있었고, 그런 영향인 것 같다. 기억에 남는 건 유영길 촬영감독과의 작업이었다. 그는 감독이 원하는 그림을 만들어내기 위해 최대한 노력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추억의 빛’의 역동적이면서도 깔끔한 화면이 나올 수 있었다. 나중에 ‘남부군’(1990) 촬영도 그런 이유로 부탁할 수 있었고,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1991)와 ‘하얀 전쟁’(1992)까지 함께했다.
14. ‘추억의 빛’은 사라진 친구를 찾아가는 남녀의 이야기인데, 데뷔작도 그렇고 일종의 미스터리 구조가 일관적으로 드러난다.
- 어릴 적에 추리소설을 매우 좋아했다. 첫 작품을 선택한 데도 그런 영향이 있는 것 같다. 영화를 통해 관객과 호흡하는 데 있어서, 뭔가를 찾아가는 구조가 편리하다는 생각을 했다. 따지고 보면 ‘거리의 악사’(1987)도 그런 구조이고,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도 사라졌던 친구를 찾아간다. ‘하얀 전쟁’(1992)도 그렇다.
15. ‘거리의 악사’는 당시 트렌드였던 문학 작품의 영화화를 통해 흥행에 성공했던 작품이다.
- 당시는 한국의 영화감독들이 소설책을 많이 읽을 때였다. ‘거리의 악사’도 마찬가지였다. 여러 소설을 읽다가 직접 선택하게 되었다. 안타까운 건 검열이었다. 데모하다가 연행된다든가 하는 시대적인 배경이 다 삭제되었다.
16. 같은 해 ‘위기의 여자’(1987)가 나왔는데, 어떻게 선택하신 건가?
- 시몬느 드 보부아르의 소설 <제2의 성>을 각색한 연극이 1986년에 나왔고, 그 영화화 제안이 온 거였다. 사실 나는 가정주부의 섬세한 감성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다. 가정적이지 못한 남자이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선택한 건, 대본이 너무 좋았다.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커플 연기를 한 신성일-윤정희 두 배우를 캐스팅 했다.
17. 이 영화는 1980년대 감독님의 최고 흥행작이다.
- 극장에 주부들이 줄을 섰다(웃음). 그런데 비판적인 관객도 있었다. 부르주아들의 사치스러운 세계라는 거다. 그런 점에서 깨달음을 주기도 한 영화였다.
18. 1988년에도 두 편의, 여자가 주인공인 영화가 등장한다. ‘여자가 숨는 숲’과 ‘산배암’이다. 두 편 모두 데뷔작인 ‘안개는 여자처럼 속삭인다’를 연상시키는 섹슈얼 스릴러였다.
- ‘여자가 숨는 숲’은 루이스 브뉘엘 감독의 ‘세브린느’(1971)에서 힌트를 얻은 영화였다. 해리성 장애를 가진 여성의 이야기인데, 영화를 위해 공부를 많이 해야 했다. 그래서 전문의의 자문을 받고, 두꺼운 의학 서적을 독파하기도 했다.
19. 감독님의 영화에 대해 이야기할 때 ‘리얼리즘’을 주로 이야기하지만, 초기작을 보면 ‘섹슈얼리티’에 대한 부분을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 딱히 그쪽에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다. 당시 트렌드였고, 제작자들이 섹스 코드가 영화에 들어가기를 원했다. 그리고 1980년대엔, 정치적이나 사회적인 부분에 대한 검열은 여전했지만 성적인 표현을 어느 정도는 허락함으로써 숨통을 틔워 주었던 것 같다.
20. ‘산배암’은 김기영 감독의 ‘하녀’(1960)을 연상시키는 작품으로, 팜므 파탈 이야기다.
- 사회적 코드를 담으려고 노력했던 영화였다. 그런데 그 방식을 멜로드라마로 풀었기 때문에 성공적이진 못했던 것 같다. 어느 부르주아 집안에 씨받이로 들어온 하녀가 결국 그 집을 장악한다는 얘기를 끝까지 밀어붙여 보려고 했는데, 쉽지 않았다.
<영화관에서 거리로>
21. 1980년대 정지영 감독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은 정치적 행보다.
- 그게 1987년부터인데, 전두환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위해 4‧13 호헌 조치를 발표했고 사회 각 분야에서 성명서가 나왔다. 젊은 영화인들 사이에도 그런 분위기가 있었고, 선배 격이었던 내가 결집해서 성명서를 내게 된 거다. 우리들의 뜻에 동조했던 선배 영화인들도 함께 규합했고.
22. 시국 선언 이후에 어떤 변화가 있었나?
- 당시 시국 선언에 참석한 후엔 정권에서 압력을 넣어서 더 이상 영화 못 할 거라고 했다. 실제로 시국 선언 참여 감독들은 준비하던 영화들이 다 중단되기도 했다. 나도 아내에게, 이제 영화 그만 두고 포장마차나 하자고 했으니까(웃음). 그런데 6월에 거대한 시민 혁명이 일어났고, 6‧29선언으로 대통령 직선제 시대가 열렸다. 살았구나 싶었다(웃음).
23. 이후 직배 반대 투쟁과 영화법 개정과 스크린쿼터 수호 운동까지, 한국영화계의 이슈가 있을 때마다 리더 역할을 하게 되었다.
- 난 그게 내 운명이라고 보는 게, 1987년에 시국 선언을 주도한 이후부터 영화계에 무슨 문제가 생길 때마다 사람들이 나에게 뭔가를 물어왔다. 그러면서 내가 마치, 그들의 대변인처럼 되어 버렸고 어느 순간 보니 대열에서 앞장서 있었다.
24. 1987년 시국 선언에 이어, 1988년 직배 반대 투쟁이 있었다. 1988년엔 서울 올림픽이 열렸고, 대한민국도 어쩔 수 없이 세계화의 시스템 안에 들어가야 했던 시기다. 영화산업도 예외가 될 순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직배 반대 투쟁은 쉽지 않았을 것 같다.
- 당시 직배 반대는 젊은 영화인들이 주도했는데, 내가 그들 중 나이가 가장 많았고 그런 이유로 리더가 되었다. 직배 반대 투쟁을 하긴 했지만, 이기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대신 이렇게 결집된 힘을 영화법 개정과 검열 철폐 운동을 위한 힘으로 전환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25. 그 흐름 속에서 스크린쿼터 감시단을 만들기도 했다.
- 스크린쿼터라는 제도가 멀쩡히 있음에도 극장들이 전혀 지키지 않는 거다. 그것만 지켜내도 한국영화의 상영관이 확보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긴 싸움이 시작된 거다. 당시 극장들이 관청에 거짓으로 신고한 걸 우리가 다 적발했다. 정부에서 해야 할 걸 민간에서 한 거다(웃음).
26. 돌이켜 보면 당시의 투쟁은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나?
- 직배 반대 투쟁은 정부 입장에선 굉장히 큰 사건이었다. 당시 올림픽을 앞두고 서울 도심의 4대문 안에선 데모가 금지되어 있었다. 그런데 우린 했다. 정부의 금지 사항을 정면으로 위반한 거다. 영화계 내부에서의 성과도 있었다. 우리가 시민들에게, 직배 영화 보지 말자고 하면 “한국영화나 잘 만들어라. 너희들이 영화 잘 만들면 우리가 미쳤다고 할리우드 영화 보겠느냐”는 반응을 얻었다. 그런 비웃음 속에서 젊은 영화인들이 각성했다. 그리고 그 세대들이 1990년대에 좋은 한국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남부군’을 만들다>
27. 그 시기 영화 ‘남부군’을 만든 건, 이젠 세상이 바뀌었다는 판단 때문이었나?
- 그렇다. 당시 이 영화가 성공할지 의문을 품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1987년 항쟁을 통해 시민들이 승리했고, 내 영화 뒤엔 그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난 ‘남부군’이 될 거라고 봤다.
28. ‘남부군’은 ‘남프로덕션’에서 제작한 첫 독립 프로덕션 작품이다. 그런데 굉장히 큰 규모였다. 제작 과정에서 부담이 컸을 것 같다.
- 당시 이태 원작의 소설 <남부군>을 영화화하고 싶던 몇몇 감독이 있었다. 나는 사계절을 다 찍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많이 들고, 충무로에선 돈 댈 사람이 없다고 보았다. 일단 지인을 통해 원작자 이태에게 판권을 확보했고, 여러 투자자를 통해 제작비를 확보했다. 당시 제작비가 10억 원이 넘는 수준이었느니, 당시 평균 제작비의 5배였다.
29. 결과적으로 영화는 흥행에 성공했다. 그리고 사회적 의미도 컸다.
- 나는 운이 좋았다. 당시 한국 관객의 관람 패턴으로 보면 흥행이 안 될 영화였다. 당시 개봉 전에 언론 시사를 했는데, 곧장 소문이 돌았다. 정지영 감독 망했다고(웃음). 그런데 대학생 대상 시사회를 한 후에 희망을 얻었다. 그때 설문을 했는데, 관객의 80퍼센트가 이 영화를 주변에 권하겠다고 하더라. 그리고 개봉을 했는데, 많은 관객이 몰려들었다.
30. 원작의 어떤 면을 신뢰해서 이 프로젝트를 밀어붙인 건가.
- 일단 신선했다. 우리가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세계를 경험한 사람이 쓴 글이었다. 그리고 이미 베스트셀러가 되어 10만 부가 팔렸으니, 이미 지식인 10만 명과 교류한 작품이었다. 그런 원작이 영화로 나오면 대중성을 확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31. 아직 심의가 있던 시기인데, 우려되는 점은 없었나?
- 심의하는 데 오래 걸렸다더라. 그런데 무삭제 통과가 되었다. 한쪽에선 이념적으로 위험한 영화라고 하고, 한쪽에선 오히려 반공 영화라고 했다고 하더라. 그만큼 이 영화는 이데올로기를 초월한 영화였고, 궁극적으론 민족 분단의 아픔을 그린 영화다.
32. 반공 영화도 용공 영화도 아닌 셈인데, 빨치산을 표현할 때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려 했나?
- 원작에 충실했다. 다만 마지막 부분이 마음에 안 들었다. 그곳에서 주인공은 산에서 내려가면서 “사람 사는 곳으로 가자”고 한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그 상황에서 그런 생각을 했을 것 같지 않다. 어디로 가자는 목표가 있었을까? 그래서 난 산에서 내려가지 않고 영화를 끝냈다.
33. 감독님의 필모그래피를 흔히 ‘남부군’ 전후로 나눈다. 이런 식의 시기 구분에 동의하는가?
- 종합적으로 본다면 단순히 그렇게 평가할 순 없을 거다. 1980년대엔 혹독한 검열 때문에 감독이 선택할 수 있는 소재 자체가 제한되어 있었다. 사회성이 있는 소재를 영화화할 수 없었고, 멜로드라마 안에서 그런 부분을 언급하려 했다. 하지만 1987년 이후, ‘남부군’ 같은 영화를 만들어도 관객이 내 편을 들어줄 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34. 사실 ‘남부군’ 이전 감독님의 필모그래피에서 가장 중요한 테마는 ‘여성’이었다.
- 아마 당대의 트렌드였을 거다. 나 자신이 젠더에 대해 크게 관심을 가지고 접근하진 않았다. 그리고 난 여성에 대해 잘 모른다(웃음). 여성의 관점에 대해 공감되는 부분은 있지만, 내가 알 수 있는 부분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1980년대에 여성에 대한 여러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 영화들에서 조금 다른 점을 느꼈다면 아마도 당대의 트렌드였던 에로티시즘에 무조건 편승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일 거다.
35. 그래서인가 감독님의 에로티시즘은 그다지 관능적이지 않다.
- 장르영화를 찍을 땐 항상 그 영화가 그냥 장르영화로 머물면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장르영화에 뭔가를 더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노력이 실패했던 대표적인 영화가 ‘블랙잭’이었다. 팜므 파탈이 등장하는데 기존의 방식으로 그리고 싶진 않았다. 갈등하는 팜므 파탈을 그리고 싶었다. 그런데 관객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이미지의 팜므 파탈이 아니어서 혼란스러워하더라. 그리고 장르영화를 만들 때 장르적 완성도를 추구하기보다는, 그 안에 사회적 문제를 결합시키려 했다. 내 안에 가지고 있는 리얼리즘에 대한 욕구를 버리지 못해서 자꾸 그랬던 것 같다.
<한국 현대사에 대한 영화들>
36. 이어진 영화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는 필모그래피에서 이질적 작품이다. 가장 순수한 미학적 시도가 보인다.
- 1980년대에 시도했다가 역시 불교를 테마로 한 임권택 감독의 ‘비구니’가 외압으로 제작 중단되는 사태를 겪으면서, 자연스럽게 포기했던 프로젝트였다. 당시 고은 작가의 <파계>라는 소설을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로 바꿔서 만들려 했던 건데, 그때의 아쉬움이 1991년에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를 만들게 한 것 같다. 이 영화에서도 결국 어린 스님인 ‘침해’가 결국은 세상을 향해 나아간다는 점에서 내가 만들었던 리얼리즘 영화와 일맥상통하는데, 드라마가 너무 잔잔해서 어떻게 찍느냐가 중요했다. 다행히 유영길 촬영감독이 내 의도를 잘 알고 카메라에 잘 담아 주었다.
37. 이 작품을 감독님의 숨겨진 보석 같은 작품으로 보는 평론가들도 많다.
- 내가 ‘남부군’ 찍으면서 고생을 많이 했다. 그래서 조용한 영화 하나 찍고 싶다는 생각으로 만든 영화다(웃음). 그런데 이 영화도 고생 많이 했다. 로케이션 헌팅 때문에 전국에 사찰을 100개 이상 돌아야 했으니까. 그래서 선택한 암자가 알고 보니 배용균 감독이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 찍은 곳이더라.
38. 이 영화는 ‘욕망’을 이야기한다는 점에서, 감독님의 필모그래피에서 조금은 독특하다.
- 내가 주로 만든 리얼리즘 영화와 크게 다르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어린 스님인 ‘침해’는 결국 산사에서 나온다. 결국 세상과 부딪히며 경험해야 한다는 의미다. 인간이 사회와 떨어져서 자신만의 철학으로 살아가는 건 불가능하다. 인간은 사회와의 관계에서 그 존재가 자리매김이 된다. 그런 부분을 다루고 싶었다.
39. ‘리얼리즘’이라는 표현을 쓰셨는데, 감독님 영화를 흔히 리얼리즘 영화라고 부르는 점엔 동의하는가?
- 리얼리즘이라고 이야기하기엔 조금 다른 면이 있다. 나는 시나리오를 쓸 때 극적 구성을 많이 한다. 리얼리즘을 추구한다면 구성하기보다는 정직하고 진솔하게 다가가야 한다. 켄 로치처럼 말이다. 하지만 난 극적 구성을 통해 영화적 재미를 만들려고 한다. 그래야 하는 건 내가 재미없는 소재를 선택하기 때문이다. 그걸 관객이 볼 수 있게 만들려면 극적 재미를 만들어내야 한다. 대신 스타일은 최대한 자제한다. 극적 장치가 강한 영화가 스타일까지 강하면, 사람들은 그걸 단지 영화로 보고 현실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40. 이어지는 ‘하얀 전쟁’은 ‘남부군’의 연장선상에 있다. 전작이 냉전 시대의 전쟁이었던 한국전쟁이 배경이라면, ‘하얀 전쟁’은 제국주의적인 베트남 전쟁에 참가한 한국군의 이야기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관심은 언제부터 있었나?
- 군 복무 시절 정보부에 있었는데 참전 신청을 했지만 선발되질 못했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남부군’ 끝난 다음 안성기 배우가 한 번 읽어보라고 해서 안정효 작가의 <하얀 전쟁>을 읽게 되었는데, 그때 생각이 났다. 내가 왜 그때 베트남에 가려고 했지? 어떻게 보면 지적 허영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쟁은 위험한 것인데, 난 장차 영화감독이 될 거니까 이런 경험을 해두는 게 좋을 거라는 생각이었던 거다.
41. 이 영화를 통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나?
- 그때 외무부 장관이 어느 신문과 인터뷰를 하면서 베트남 전쟁에 대해 “그때 우리는 돈이 필요했다”는 말을 했다. 당시엔 베트남의 자유와 평화를 위해 참전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다 용병이었던 거다. 그 부분을 더 깊게 들어가고 싶었고, 원작을 각색하면서 반영했다. 이 부분에 대해 원작자도 흔쾌히 동의했고 베트남 현장에 직접 와서 한 달 정도 머물면서 디테일한 부분을 고증해주었다.
42. 이 영화는 ‘남부군’을 넘어서는 대작이었다. 도쿄영화제 그랑프리 수상 같은 국제적 성과도 있었다.
- ‘남부군’이 당시로선 한국영화 최고의 제작비를 썼는데 ‘하얀 전쟁’이 그걸 깼다. 그리고 다행히 도쿄영화제에서 수상도 했고. 그리고 소규모지만 미국의 LA 지역에서 개봉도 했다. 당시 미국 평단의 평가는 좋지 않았다. 베트남 전쟁을 멜로드라마로 그렸다는 식으로 평가했던 것 같다. 그리고 ‘한국과 미국의 관계’는 내 영화의 지속적인 테마다. ‘남부군’도 그랬고, ‘하얀 전쟁’과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그리고 최근에 만든 ‘블랙머니’까지 그렇다. 미국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인데, 그런 부분에 대해 미국 평단에선 부정적이었던 것 같다.
43. ‘하얀 전쟁’은 반전의 메시지 외에도 다른 요소를 지닌다. 이 영화에서 베트남 전쟁을 어떻게 보여주고 싶었나?
- 전쟁이 지니고 있는 정치경제적 함수 관계를 그리고 싶었다. 어떤 평론가는 ‘남부군’ ‘하얀 전쟁’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를 아울러 ‘한국 현대사 3부작’라고 말한다. ‘남부군이 정치를, ’하얀 전쟁‘이 경제를,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가 문화를 이야기하고 있다는 거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그럴 듯한 평가라고 본다.
44.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1994)는 할리우드 직배 영화를 반대하는 기록 필름을 영화 맨 앞에 삽입하면서 시작한다. 매우 강한 의도가 느껴지는 구성이다.
- 마침 타이밍이 그렇게 된 거다. 할리우드 직배 반대 투쟁을 하고서 얼마 있지 않아 이 소설이 나왔다. 그때 많은 감독들이 제목에 끌려 이 소설을 읽었는데, 영화화하는 건 힘들 것 같다고 판단했다. 하지만 난 읽자마자 딱 어떤 느낌이 왔고 영화화하게 되었다. 각색하면서는 마지막 장면을 바꾸었다. 나도 한때는 할리우드 키드였고 내 주위에도 그런 사람이 많이 있었다. ‘할리우드 키드’라는 게 무슨 대단한 정체성이 아니다. 자신도 모르게 할리우드 영화에 젖어서 체화되는 거다. 그래서 주인공이, 자신이 할리우드 키드에게 속았다고 하는 대목을 넣었다. 재밌는 건 안정효 씨가 이 소설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영화화할 때 바뀐 부분을 반영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영역판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는 한글판과 엔딩이 다르다.
45. 그런데 굳이 할리우드 영화로 한정하지 않더라도, 영화광 전반에 대한 보편적인 영화로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 그때 해외 영화제에 몇 군데 나갔는데, 다들 영화를 재밌게 보더라. 산세바스티안영화제에선 비평가상을 탔는데, 그때 심사위원 중 한 명이 그러더라. 이 영화가 영화 100주년인 내년(1995년)에 출품되었으면 더 큰 상을 탔을 거라고(웃음).
46. 이 시기에, 감독님의 영화에 대해 ‘정치적’이라는 표현이 붙기 시작한 것 같다.
- 정치적 소재를 끌어온다는 것엔 동의하지만, 나 자신이 정치적이라고 보긴 힘들 것 같다. 모든 영화엔 감독의 정치적 성향이 배어 있다. 그 성향은 좌우의 문제가 아니다.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고, 모든 것이 정치니까. 난 지식인이 사회적 발언에 침묵하는 건 범죄까지는 아니어도 임무의 방기라는 생각이다.
47. 그리고 이 시기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작가 감독으로 평가받게 되었는데, 감독님의 작품에선 어떤 스타일의 일관성은 느껴지지 않았다.
- 어떤 스타일의 새로운 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진 않다. 내용에 맞는 스타일이 무엇일지 영화마다 연구했고 그걸 따라갔다. 그리고 ‘남부군’ 이후의 영화들은 오소독스하게 접근하되, 리얼리즘이라는 전체적인 형식을 무너트리지 말자고 생각했다.
<휴지기의 시작>
48. 다음 작품은 다소 의외다. ‘블랙잭’(1997)은 감독님 작품 중 가장 장르적인 영화다.
-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가 흥행에 실패하고, 당장 어떤 영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없던 중에 ‘블랙잭’ 시나리오가 들어왔다. 보니까 내가 예전에 좋아하던 스타일이었다. 처음엔 이 장르가 지닌 한계를 극복해 보자는 생각을 했다. 다른 영화 찍을 땐 반드시 흥행하겠다는 생각이 별로 없었는데, ‘블랙잭’만큼은 흥행할 거라는 생각으로 찍은 영화였다. 그런데 흥행에 실패했고, 그때 반성했다. 나는 스스로를 대중영화 감독이라고 생각했고, 대중과 호흡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거다. 난 이 영화에서 기존의 팜므 파탈과 다른, 뭔가 고뇌하고 갈등하는 팜므 파탈을 그리고 싶었는데, 그런 부분이 대중의 코드와 안 맞았던 거다.
49. 당시 한국영화의 트렌드가 급변하고 있었다. 이전까진 거친 액션이나 스릴러가 사랑 받았다면, 갑자기 멜로드라마가 강세를 띠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블랙잭’이 트렌드에 안 맞는 점도 있었을 것 같다.
- 그래도 ‘블랙잭’으로 상을 몇 개 받긴 했다. 그런데 상과 상관없이, 이 영화가 실패하니까 나를 불러주는 곳이 아무 데도 없었다. 그래서 자구책을 마련해야 했는데, 마침 영화진흥공사에서 판권 담보 지원책이 나왔다. 그때 우연히 강만홍이라는 친구를 만나서 이야기를 들었고, 그의 이야기를 저예산 영화로 만들어 볼 생각을 했다. 그렇게 <까>(1998)을 만들었다.
50. 사실 ‘까’는 이렇다 할 ‘이야기’가 없는 영화다.
- 강사가 학생들 지도하다가 모두 옷을 벗는 게 이야기의 전부다. 이걸 어떻게 영화로 만들까 싶었고, 저예산이다 보니 실험적인 요소를 도입해 보았다. 그러다 보니 다섯 챕터로 나눈 구조가 만들어졌다. 돌이켜 보면 굉장히 쉬운 이야기를 어렵게 한 건데, 모든 사람들이 누드로 질주하는 엔딩이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줄 거라고 기대했지만, 드라마가 약하니까 그냥 해프닝으로 여기더라. ‘까’는 그렇게 실험작이 되어 버렸다.
51. 이후 10년 넘게 휴지기에 들어간다.
- 쉬었던 건 아니다. ‘아리랑’에 매달렸다. 그 영화 준비를 8년을 했다. 그 기간 동안 몇 군데서 작품 제의가 들어왔지만 다 거절하고 ‘아리랑’에 매진했다. 시나리오를 8년 동안 썼고, 중국에 두 번 다녀왔다. 결국 ‘아리랑’이 영화화되지 못한 건, 중국 당국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우리가 그곳에서 찍은 필름을 그대로 가지고 나오기가 힘들었다. 나오기 전에 중국의 검열을 받아야 했다. ‘아리랑’은 혁명에 대한 영화인데, 중국에선 우리 같은 민간인은 혁명에 대한 영화를 만들 수가 없다. 검열에 걸리는 사항인 거다. 그렇게 8년을 보냈다.
52. 이 프로젝트에 그토록 오래 매달렸던 이유는 무엇인가.
- ‘김산’이라는 인물은 한국의 체 게바라였다. 그는 폐병을 앓았고 게바라는 천식이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시를 쓰고, 여러 언어를 구사하고, 의사였고, 철저한 이상주의자였다. 체 게바라 50년 전에 우리에게 그런 인물이 있었던 거다. 기회가 된다면 김산은 꼭 한 번 다뤄보고 싶다.
53. 이전에도 무산된 작품들이 있었나?
- ‘빅토르 최’도 있었고, 일제 강점기의 위안부 성 노예에 대한 영화도 있었다. 광주 민주화항쟁에 대한 프로젝트도 있었지만 완성하지 못했다.
<‘부러진 화살’로 돌아오다>
54. ‘부러진 화살’(2011)은 어떻게 시작되었나.
- 배우 문성근이 읽어 보라고 준 게 김명호 교수의 공판 기록이었다. 재미있었다. 일단 시나리오를 썼고, 김명호 교수와 박훈 변호사를 만났다. 그리고 투자를 받으려 하는데 쉽지 않더라. 저예산 영화로 제작하기로 했고, 처음엔 제작비가 2억 원이었다. 이때 배우 안성기가 하겠다고 합류하면서 5억 원 규모의 영화가 되었다. 여기엔 많은 배우들과 스태프들의 헌신이 있었고, 그들이 있었기에 가능한 영화였다.
55. 이 영화를 만들면서 느낀 점은 무엇인가?
- 생각해 보니 난 캐릭터 구축에 능하지 못했다. 그런데 이번에 실제 인물을 직접 만나 보니까 그들의 캐릭터가 너무 흥미로웠다. 그래서 실제 인물의 캐릭터를 영화에 그대로 구현했고, 이런 방식에 의해 좋은 캐릭터가 나온다는 걸 깨달았다.
56. ‘부러진 화살’은 대중적 호응을 받은 가장 큰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 영화가 재미있다는 건데... 나도 그 정도의 호응이 올 줄은 몰랐다(웃음). 역시 캐릭터의 힘이었던 것 같다.
57. ‘아리랑’으로 인해 10여 년의 공백이 있었고, 그 기간 동안 디지털 시대로 넘어갔다. 감독님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나?
- 13년 만에 현장에 나왔더니 장비가 놀랍게 발전해 있었다. 옛날엔 구현하기 힘들었던 장면들이 손쉽게 만들어지더라. 그런데 영화가 스타일리시할수록 관객은 그 스타일의 의도를 떠올리며 궁금증을 지니고, 그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이런 부분은 내 영화의 성격과 맞지 않았고, 그래서 스타일을 피했다. 그런데 ‘부러진 화살’이나 ‘블랙머니’나 ‘소년들’은 관객들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소셜한 내용이어서, 영화적 재미를 주면서 동시에 리얼리즘을 구현하는 게 관건이었다. 스타일리시한 테크닉을 거의 사용 안 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리얼리즘 영화에서 흔히 사용하는 롱 테이크를 배제하고, 컷을 짧게 해서 빠르게 편집하는 방식을 사용했다. 그런데 요즘은 회의가 들기도 한다. 감독은 되도록 숨어 있고 관객은 영화를 통해 현실을 볼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반드시 최선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 작품도 리얼리즘 영화가 되긴 할 텐데…, 어떤 방식으로 만들지 고민하고 있다.
58. 2012년에 두 편의 영화가 나온다. ‘영화판’과 ‘남영동 1985’. <영화판>은 허철 감독과 공동으로 연출한 건데, 인터뷰 다큐다.
- ‘부러진 화살’ 이전에 촬영한 작품이다. 영화 못 하고 있을 때, 카메라 들고 다니면서 영화인들을 만난 거다. 처음엔 허철 감독의 제안이었다. 그렇게 수많은 감독과 배우를 만나 인터뷰를 했는데, 아마 200시간 분량은 나왔을 거다.
59. 그 다음 작품이 ‘남영동 1985’였다.
- 처음엔 고문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그때 김근태 씨가 돌아가셨다. 그래서 그 분이 쓴 수기를 읽었고, 빠르게 시나리오 작업을 해서 촬영에 들어갔다. 흥행 생각하지 않고 저예산으로 찍으려 했다.
60. ‘고문’이라는 소재가 지닌 어떤 면에 끌렸던 건가.
- 고문에 대한 영화라기보다는, 고문 기술자인 이근안이라는 인물을 담고 싶었다. 난 이걸 픽션으로 만들어 보려 했다. 고문을 당해 피폐해진 친구를 둔 주인공이, 고문 기술자를 찾으러 다니는 이야기다. 구체화하지 못하고 있었는데 김근태 씨의 죽음으로 ‘남영동 1985’를 만들게 된 거다.
61. 실제 고문을 당했던 사람들의 인터뷰 화면이 영화 엔딩에 삽입되었다. 어떤 이유인가?
- 영화에서 나는 김근태라는 이름 대신 김종태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한국 현대사인 김근태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고문을 당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근태 한 명으로 한정하고 싶지 않았고, 여러 사람의 이야기로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민주화 운동 시기에 고문 당한 사람들을 인터뷰 했다. 엄청난 양이었고, 영화엔 극히 일부만 넣었다.
62. ‘블랙머니’가 나오기까지 7년의 시간이 걸렸다.
- 돌이켜 보니까…, 블랙리스트 때문 아닌가 싶었다. 7년 동안 수많은 프로젝트를 시도했는데 전부 안 되더라. 사극도 하나 있었고, 멜로드라마도 있었다. 시나리오가 안 좋아서 그런가 싶었지만 블랙리스트가 큰 이유였던 것 같다. 사실 ‘블랙머니’도 힘들지 않을까 싶었지만 다행히 투자자를 구했다.
63. ‘부러진 화살’부터 ‘남영동 1985’ 그리고 ‘블랙머니’와 최근작인 ‘소년들’까지, 공권력과 개인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 테마에 끌리는 이유는 무엇인가
- 나는 예술가라기보다는 많은 대중과 호흡하고 싶은 영화감독이다. 실제로 있었는데 과연 이게 제대로 알려졌는지 의심을 품게 된 사건. 제대로 알려진다면 우리가 어느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줄 수 있는 사건. 의견이 완전히 다른 사람과 토론이 가능한 사건. 이런 사건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런 사건을 영화에서 다룸으로써,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드러내고 싶다. 그것에 의해 우리가 어떤 영향을 받고 있는지 꾸준히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이런 작업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 같다. 사실 많은 감독들이 이런 소재를 꺼린다. 그래서 나한테는 오히려 기회다. 그런 소재를 선택해서 되도록 많은 관객들과 대화를 나눠 보자는 생각이다.
64. 그런 소재를 다루는 데 있어 부담은 없나?
- 부담은 없다. 난 농담처럼 이야기한다. 한국에서 영화를 제일 어렵게 만드는 감독은 이창동 감독이고 그 다음 정지영이라고. 이창동 감독은 상업영화 예산으로 예술영화를 만드니 얼마나 힘든가! (웃음). 그래서 어려운 거고, 나는 관객들이 선호하지 않는 소재로 흥행을 하려고 하니까 힘든 거다. 그래서 난 예술가라기보다는 사회에 항상 화두를 던지는 감독으로 남는 것 같다.
65, 최근작 ‘소년들’이 전작들과 다른 점은 무엇인가?
- 본 사람들이 “다른 결이 있다”고 하더라. 그 동안엔 이야기를 드라이하게 다뤘다면, 이번엔 감성적인 부분이 많이 발견된다고들 말한다. 이야기 전개 속에서 감정의 변화 같은 디테일들이 잘 살았다는 이야기였다. 난 반가웠다. 관객과 좀 더 밀접하게 호흡하고 있다는 의미니까. 자평하자면, 내 영화 중 가장 대중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누군가가 그러더라. 올리버 스톤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로 변해가는 과정 같다고(웃음).
66. 40주년을 맞이했다. 자신의 작품을 뒤돌아본 소회는 어떤가?
- ‘부러진 화살’은 공권력에 개인이 패배하는 이야기다. 하지만 주인공이 기죽지 않고 도전하면서 끝난다. ‘블랙머니’도 마찬가지다. 결국 주인공은 조사를 완성하지 못하지만, 계속 도전한다. 난 허무주의적 세계관을 가진 편이다. 그런데 영화 속에 패배가 아닌 도전의 모습을 담으면서, 그 허무주의를 극복해 왔던 것 같다. 영화를 통해 관객과 사회에 대해 공유하고 토론하려 했고, 그것이 나를 지탱하는 힘이었던 셈이다.
67. 향후 계획은 무엇인가?
- 계획은 없다. 관객이 원하지 않으면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않을 것이다. 다만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문명 기행 프로젝트’이다. 문명 발상지를 포함해 각 지역의 문화를 알아보는 것인데, 문명의 충돌이 아닌 교류와 흡수를 통해 발전한다는 걸 이야기하고 싶다. 그리고 제주 4‧3 사건에 대한 영화를 준비하고 있다. 4‧3 평화재단 공모전 시나리오를 받았다.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그때 입은 상처에 대한 이야기인데, 더 나아가면 폭력은 어디에서 오고 어떻게 극복하는지에 대한 영화다. 그런데 몇 편 더 찍어야겠다는 식의 욕심은 없다. 어떤 사명감 같은 것도 없고. 그리고 관객이 원하지 않으면 언제라도 그만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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