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학점제, 특목고 폐지... 물 건너갔다
[신정섭 기자]
▲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이 1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정부서울청사에서 2028 대학입시제도 개편 시안 발표에 참석해 선택형 수능 폐지 및 과목 통합과 관련해 발표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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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시 경쟁이 극도로 치열한 한국의 현실에서 '완벽한 대입제도'란 있을 수 없다. 그동안 수도 없이 대입제도 개편이 이루어졌지만, 그때마다 '풍선효과'로 뜨거운 논란이 일었다. 공교육 정상화를 위해 학생부 종합전형 등 수시모집 제도를 도입하면 '공정성' 문제가, 공정성을 높인다고 정시모집 비중을 높이면 '학교 간 교육격차'와 '사교육 팽창' 문제가 등장했다.
대입 제도를 어떻게 바꾸든 비정상적으로 높은 대학 입학률, 심각한 대학 서열화, 학력에 따른 임금 격차 등 잘못된 사회 구조를 뜯어고치지 않으면 개혁에 이르기 어렵다. 어떤 형태로든 부모의 학력과 경제력이 대물림 되고, 일반고냐 특목고냐 학교 특성에 따른 유불리는 늘 있을 수밖에 없다. 대입 제도의 변화가 국민의 삶의 질을 본질적으로 바꾼 적은 거의 없었다.
늘 포장지만 바뀌는 '대입 개편안'
전교조나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참교육학부모회 등의 주장대로 내신을 모두 절대평가로 전환하고 수능을 자격고사화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가능성이 제로에 가깝지만, 만약 윤석열 정부가 2028 대입 개편안에 그 내용을 담았다고 가정해 보자. 아마도 전국의 학부모가 봉기하여 대통령 퇴진을 외칠 것이다.
이쯤 되면, 도대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은 거냐고 반문할 것이다. 독일이나 프랑스, 네덜란드 등 해외 사례를 살펴보면 알 수 있듯이, 경쟁교육 철폐는 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오랜 기간 공론화와 숙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 근본적 개혁은 시도조차 하지 않은 채, 정권이 바뀔 때마다 포장지만 교체하는 대입 개편은 국민을 혼란에 빠뜨리기만 할 뿐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윤석열 정부의 2028 대입 개편안에 기대를 한 건 아니다. 경쟁교육 철폐나 완화 방향성을 제시할 거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다. 하지만, 이전 정부에서 나름 개혁성을 담보하려고 노력한 흔적마저 지워버렸다는 점에서 그리고 경쟁교육 심화로 이득을 보는 자들의 손을 더 높이 들어 주었다는 점에서 이번 대입 개편안은 실망을 안겨 주기에 충분하다.
구체적으로 어떤 퇴행이 이루어졌는지 두 가지 측면에서 따져 보자.
첫째, 이번 개편안으로 학생이 자기 적성과 소질에 따라 과목을 선택하게 한다는 고교학점제의 긍정적 취지가 사라졌다. 고교학점제의 문제점과 한계도 분명 있지만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 내신 상대평가 병기와 수능 9등급제 존치로 학생들은 진로 적성이 아닌 대입에 유리한 과목을 고를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학교 서열화와 사교육의 주범 특목고는 내신 부담 완화로 날개를 달게 되었고, 수능 영향력의 확대로 경쟁 교육은 더욱 심화할 게 불을 보듯 뻔하다.
고교학점제와 엇박자
▲ 고교학점제 홈페이지(https://www.hscredit.kr/)에 올라와 있는 고교학점제 홍보영상 화면 갈무리 |
ⓒ 교육부 |
고교학점제는 윤석열 대통령도 보완하여 추진할 것이라고 밝혔고, 윤석열 정부 교육부는 지난 6월 21일 "고교학점제는 학생의 소질과 적성에 맞는 교육을 위해 다양한 선택 기회를 확대하는 방안"이라며 "예정대로 오는 2025년 전면 시행한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이달 10일 교육부가 발표한 2028 대입 개편안은 고교학점제를 사실상 무력화하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갖게 했다. 내신 5등급 상대평가 병기 및 수능 9등급제 유지는 '따뜻한 아이스 커피'처럼 고교학점제와 엇박자를 낼 수밖에 없다. 학교는 무늬만 고교학점제일 뿐 사실상 수능 맞춤형 교육과정을 운영할 수밖에 없고, 학생들 역시 입시에 유리한 과목 위주로 '편식'을 할 것이기 때문이다.
26일 교육부 국감에서 도종환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그간 이주호 교육부 장관은 고교학점제 안착을 위해 내신뿐 아니라 수능도 절대평가로 전환하는 데 의지를 보였고 고1 공통과목에도 성취 평가를 도입하는 방안을 검토하라고 지시했는데, 그간 기조를 다 뒤엎은 대입 개편안을 발표했다"고 비판했다.
그러자 이주호 장관은 "장기적으로는 그쪽(절대평가)으로 가는 게 맞는다고 본다. 그렇지만 지금 당장은 현장에 준비가 안 돼 있기 때문에 일단 병기를 하는 것"이라고 뜨뜻미지근하게 답변했다.
특목고는 폐지는커녕 '부흥의 날개' 펴나
문재인 정부는 자사고·외고·국제고 등 특목고의 폐지를 추진했다. 특목고가 살인적 입시 경쟁교육과 망국병이라 일컫는 사교육 팽창의 주범이라는 인식에 따른 것이었다. 2020년 당시 교육부는 초중등교육법 시행령에서 자사고·외고·국제고의 설립 근거를 삭제했다[제76조의3(고등학교 유형 구분), 제90조의 제1항 제6호(외고·국제고), 제91조의3(자사고) 등].
하지만, 윤석열 정부는 "공교육 내 다양한 교육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는 이유로 자사고·외고·국제고 등 특목고의 존치를 선택했다. 현 교육부는 이달 13일 자사고·외고·국제고의 설립 근거를 되살리는 초중등교육법 시행령 개정안을 입법 예고했다(11월 22일까지 의견 청취). 법제처 심사와 국무회의 등을 거쳐 시행령 개정이 완료되면 이들 특목고는 2025학년도 이후에도 유지된다.
명맥이 이어지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2028 대입 개편안의 도움으로 '부흥'을 맞이할 것으로 전망된다. 서울 주요 대학이 모집정원의 40% 정도를 (수능 성적으로 줄 세우는) 정시모집으로 선발하는 현실에서, 현재 중2 학생들이 치르는 2028학년도 대입부터는 내신 9등급제 상대평가가 5등급제로 완화되면서 특목고 선호 현상이 두드러질 것이기 때문이다. 내신의 불리함이 상쇄되면 특목고는 전성기를 맞이할 것이라는 게 입시 전문가들의 공통된 견해다.
대입 '개편' 말고 대입 '개혁'
다시 한번 말하지만 비정상적으로 높은 대학 입학률과 심각한 대학 서열화, 학력에 따른 임금 격차 등 잘못된 사회 구조를 근본적으로 뜯어고치지 않는 한 그 어떠한 교육 개혁도 성공할 수 없다. 포장지만 바꾸는 대입 제도의 변화는 국민의 삶의 질을 본질적으로 바꾸지 못한다. 윤석열 정부에 대입 '개편'이 아닌 '개혁'을 추진할 능력이나 의지가 없음을 잘 알지만 이전 정부 흔적 지우기로 비치는 대입 '개악' 방안을 내놓은 데 유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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