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왜 목포 거쳐 부산 갔나... 그것도 19시간 걸리는 배로 [윤태옥의 길 위에서 읽는 한국전쟁]
[윤태옥(답사 여행객)]
▲ 임진강 독개다리. 한국전쟁 당시 폭격을 받아 상판은 파괴되고 교각만 남았다. |
ⓒ 윤태옥 |
임진각에 가면 임진강을 건너는 두 개의 철교를 볼 수 있다. 하나는 경의선 임진강역에서 도라산역으로 이어지는, 실제 열차를 운행할 수 있는 임진강철교가 있다. 그리고 그 옆에 교각만 남은 다리가 있다. 독개다리라고 한다. 원래 있던 임진강 철교인데 한국전쟁에서 폭격을 받아 상판은 파괴되고 교각만 남았다. 교각에는 한국전쟁 당시의 탄흔도 남아 있다.
이 다리는 1950년 6월 26일 국군 1사단(사단장 백선엽)이 개성에서 임진강 남쪽으로 후퇴하면서 폭파하려고 했으나 명령전달 상의 혼란과 기술 부족으로 폭파에 실패했었다. 폭파되지 않은 철교로 인민군 1사단과 6사단이 전차를 앞세우고 임진강을 건너왔다. 서울로 향하는 인민군의 진공로를 보면 개성-문산 축선이 가장 중요했으나 뚫리고 말았다. 그것도 교량을 폭파해서 최대한 지연시켰어야 했지만 그마저도 실패했다.
1사단의 동부, 의정부의 북방인 동두천과 포천 지역은 7사단(사단장 유재흥)이 방어하고 있었다. 7사단 지역에서는 동두천-의정부 축선과 포천-의정부 축선이 서울로 가는 중요한 방어지역이었다. 포천 축선에는 인민군 3사단이, 동두천 축선에는 4사단이 각각 1개 전차연대와 합동으로 함께 침공해왔다. 인민군은 개전 당일 오후 4시경 포천 읍내까지, 해질 무렵에는 동두천 시내까지 진입했다. 때문에 동두천 포천 남쪽의 의정부 전선이 대단히 급박해졌다.
육군 총참모장 채병덕은 이미 대전의 2사단, 대구의 3사단, 광주의 5사단 등 후방의 사단들에게 수도권으로 긴급히 이동하라고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이들은 급한 대로 대대별로 출발해 제각각 서울에 도착했다. 채병덕은 참모들과 원로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의정부 전선에 차례대로 투입했다. 그의 명령대로 26일 새벽 7사단이 동두천을, 2사단이 포천의 인민군을 공격하고 나섰다.
그러나 인민군 3사단이 준비되지 않은 국군 2사단을 바로 격파하고 의정부까지 빠르게 진입하자, 동두천으로 잠시 밀고 올라간 7사단의 퇴로가 차단되는 꼴이 됐다. 2사단은 흩어졌고 7사단은 급히 창동까지 철수했다. 성급하게 투입한 2사단이 무너지자 7사단까지 무너진 것이다.
▲ 한국전쟁 개전 초기 38선에서 서울 사이 국군과 인민군의 대치 상황. |
ⓒ 봉주영 |
개성의 서쪽 옹진반도도 다르지 않았다. 이 지역은 인민군 3경비여단의 7개 대대와 6사단 1연대가 공격하고 국군 17연대(연대장 백인엽)가 방어했다. 그러나 개전 당일 오후 인민군이 17연대의 방어선 중앙을 돌파하자 17연대는 동서로 두 토막이 나고 말았다. 26일 오전에 17연대 본부는 옹진반도를 포기하고 부포항에서 인천으로 해군함정을 이용해 철수했다.
임진강 철교 폭파와 같은 작지만 결코 작지 않은 실패, 의정부 전선 축차투입과 같은 중대한 실패까지, 이런 사례들이 한국전쟁 초기전투(6.25~28)에서 서부전선의 실상을 직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대통령부터 국방장관과 총참모장에 이르는 국군 지휘부는 허둥댔고, 결과적으로 전선의 장병들만 화력의 열세와 무모한 작전에 휘둘려 죽어나갔다.
중부전선 춘천-홍천의 6사단(사단장 김종오)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서부전선. 중부전선의 6사단에게 포상을 한다면 서부전선과 육군본부에 대해서는 군법회의가, 국방부와 대통령에 대해서는 정치적 책임을 심각하게 물었어야 하지 않았을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에서 발간한 <한 권으로 읽는 6.25전쟁>에서도 이 대목을 평가하고 있다.
"6.25전쟁 첫날 대한민국의 모습은 국가정책 차원에서 유사시에 대비한 실질적인 비상계획 구상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체계화된 안보정책도 수립되어 있지 않았다. 북한군의 남침 준비에 대한 조기경보 체제도 미흡하였을 뿐만 아니라 북한군의 남침 이후에도 전 전선에 걸친 전면남침이라는 사실 파악이 지연되어 많은 혼란을 야기시켰다."
온당한 평가다. 그러나 그에 이어지는 군에 대한 평가에는 쉽게 공감이 가진 않는다.
"정부 및 군 수뇌부의 비현실적인 전황분석으로 조치가 다소 부적절하였으며 전방에 배치된 부대의 주요 지휘관들조차 북한군의 전면남침을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축차적인 병력투입으로 초기전투에서 다소 전력 소모가 있었지만 그들이 보여준 지휘력은 비교적 우수한 편이었다."
▲ 수도 서울의 함락을 가장 극적으로 말해주는 장소 중 하나인 한강대교와 노들섬. |
ⓒ 윤태옥 |
개전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당하면서 몰수패 직전까지 몰렸던 초기전투에 대해 '다소 부적절했고, 다소 전력소모가 있었고, 그래도 비교적 우수한 지휘력이었다'는 평가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있을까. 아무리 보아도 반성과 성찰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나는 의아한 생각을 누르지 못한 채 '수도 서울'로 페이지를 넘기고 말았다.
개전 하루가 지났지만 이미 파주~의정부까지 밀리면서 수도 서울, 곧 대한민국은 벼랑 끝에 서게 됐다. 26일 심야부터 27일 새벽까지 비상국무회의, 비상국회, 국방수뇌회의가 연이어 열렸다. 27일 새벽 6시 정부는 수도를 수원으로 옮긴다고 방송하고, 군은 그래도 서울을 사수한다고 방송했다.
그러나 서울 사수 발표 몇 시간 후인 오전 10시 창동의 저지선이 뚫렸다. 오전 11시 인민군이 창동으로 진입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신성모는 총참모장 채병덕의 서울 포기를 승인했다. 채병덕은 공병감 최창식(대령)에게 '인민군의 서울 시내 진입 두 시간 전에 한강 인도교와 철교를 폭파하라'고 지시했다. 이날 오후 3시 최창식은 한강 다리 폭파 준비를 완료했다고 보고했다.
채병덕은 국방장관에게 서울 철수를 승인받고 육군본부와 재경 부대장들의 연석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해군과 공군 본부는 수원으로, 육군본부는 시흥보병학교로 후퇴한다고 결정했다. 그러나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 전선의 부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었다.
27일 육군본부는 육사생도와 경찰대대는 물론 흩어진 채 밀려오는 장병들을 총동원해 미아리고개에 집결시키고 5사단장 이응준이 지휘하도록 했다. 27일 저녁 7시 인민군 3사단과 4사단이 전차를 앞세우고 미아리고개 저지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28일 새벽 1시경 인민군 전차 2대가 미아리 고개를 돌파하면서 서울의 최후 방어선마저 무너지기 시작했다.
▲ 수도 서울의 함락을 가장 극적으로 말해주는 장소 중 하나인 한강대교와 노들섬. |
ⓒ 윤태옥 |
한강 다리가 끊어지자 서울 시민은 물론 미아리고개를 지키고 있던 국군 장병들 전부는 패닉에 빠졌다. 서울의 강북 지역에서 전선을 지키려던 국군 3개 사단은 한강이란 장애물에 갇혀버렸다. 한강다리는 최악의 경우 인민군의 남진을 저지 내지 지연시키기 위해 폭파할 수도 있다. 그러나 타이밍이 문제였다. 실제 전황을 보면 한강 다리는 6시간 정도 후에 폭파하는 게 최선이었다. 일단 후퇴명령을 내리고 6시간 동안 병력과 무기를 최대한 빨리 한강 건너로 철수시켜야 했다.
국군 지휘부는 당연히 국군의 일선 장병과 국민을 생각해야 했지만 자기들 먼저 강 건너 가기에 바빴다. 국군 3개 사단은 상부로부터 적절한 철수작전을 기대할 수도 없게 됐고 패잔병과 다를 바 없이 뿔뿔이 흩어져 한강을 건너야 했다.
수도 서울의 함락을 가장 극적으로 말해주는 장소의 하나는 한강대교와 노들섬이다. 노들섬을 디딤돌 삼아 건너는 한강대교는 한강에서 처음으로 인도와 차도를 위해 건설되었기 때문에 제1한강교 또는 인도교라고 불렀다. 노들섬 정류장 서쪽의 제1주차장 강가에 한강대교를 바라보는 조형물이 있다. 그 조형물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1950년 6월 28일 새벽 한국군은 서울에 침입한 북한군의 도항을 막기 위해 한강 인도교를 폭파했다. 그때 이 자리에서 원통하게 희생된 분들의 넋을 위로하고 그런 비극이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다짐하기 위해서 추모공간을 조성하고 이 글을 새긴다."
다시 일어나지 않도록 무엇을 다짐할 것인가. 노들섬 북쪽으로 돌아가서 한강대교 교각 근처에는 자그마한 원혼비(寃魂碑)가 세워져 있다. 뒷면에는 한국전쟁전후민간인피학살자유족회가 세운 것이라 되어 있다. 이 단체의 명칭은 일부 칼자국으로 훼손돼 있다. 짐작컨대 이 원혼비의 취지에 반대하는 사람의 소행인 것 같다.
▲ 노들섬 북쪽, 한강대교 교각 근처에 세워진 자그마한 원혼비. |
ⓒ 윤태옥 |
우리가 다짐을 해야 할 것에는 군을 포함한 정부와 국민 사이의 커뮤니케이션도 있다. 그것은 인민군이 서울에 진입하면서 정부와 군이 서울을 포기하고 한강을 넘어 탈출하는 비극적 상황에서 더욱 두드러졌다.
한국전쟁에 관한 첫 번째 방송은 6월 25일 7시의 전쟁 발발보도였다. 이때부터 28일 한강 인도교가 폭파될 때까지 정부의 방송은 서울 시민, 아니 국민의 동요를 막기에만 충실한, 그러나 내용은 거짓과 기만 투성이었다.
26일에는 국군은 해주를 점령한 기세로 평양과 원산을 향해 진격중이라는 어처구니없는 가짜 뉴스가 국방부 보도자료로 방송됐다. 27일에는 의정부를 탈환했고(동두천으로 일시 북진한 적은 있었다) 수원으로 천도하는 것도 취소했다고 방송했다.
27일 오후 4시에는 '내일부터 미군이 참전한다'는 뉴스를 특별방송으로 내보냈다. 27일 밤 10시에는 이승만의 육성이 방송됐다. 꽤 오랫동안 이승만이 육성으로 서울을 사수하니 안심하라고 방송했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이승만의 실제 육성은 "미국이 유능한 장교와 군수물자를 보낸다는 좋은 소식을 전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서울이 아니라 대전의 충남도지사 관사에서 녹음된 것이다.
상식적이지 않았던 이승만의 피란 동선
이승만은 27일 새벽 3시 부인과 비서 셋이서 서울역에서 특별열차를 타고 서울을 빠져 나갔다. 열차는 대구까지 갔다가 열차를 돌려 대전에 머물렀다. 대통령은 국가안보에 중요한 요소인 만큼 대통령을 위험지역에서 피신시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서울 시민에게 예고도 없이 한강다리부터 폭파시킨 정부의 처신과 결합하면 뭐라 해석해야 할지. 게다가 당시 이승만의 육성을 녹음한 방송인 유병은에 의하면 녹음을 대전에서 한 사실을 절대 발설하지 말라고는 협박성 다짐까지 받았다니.
이승만의 피란도 상식적이지 않았다. 아직 한강 방어선이 유지되고 있던 7월 1일 이승만은 승용차로 대전을 떠나 익산(당시의 이리)에서 기차를 타고 목포로 갔다. 기차에서 해군 소해정이 준비되기를 기다렸다가 목포에서 소해정을 타고 19시간이나 항해를 해서 부산으로 갔다. 부산에서 7일을 머물렀다가 7월 9일 대구로 다시 올라왔다.
대구가 목적지였으면 대전에서 두 시간이면 갈 수 있었는데 왜 목포로 가서 바닷길로 부산으로 갔고, 왜 다시 북상하여 대구로 온 것일까. 열흘 동안 대통령은 부재중과 다를 바 없었다. 아무리 상황이 급박하다 해도 대전에서 아직 전투가 벌어진 것도 아닌데 이게 정상적인 정부의 정상적인 대통령이라 할 수 있을까.
정부와 국민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은 어떤 형태로, 어떤 수위에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지 다양한 주장과 논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적어도 서울을 점령당하는 과정에서 보여준 대국민 방송과 비밀스럽고 이상한 대통령의 행보는, 우리의 역사를 읽어가는 나에게 분노가 뒤섞인 부끄러움만 안겨줄 뿐이다.
유재웅 위기커뮤니케이션연구소 소장은 한국전쟁 초기전투의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전쟁의 승패는 무기와 병력으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군인만 전쟁을 수행하는 것도 아니다.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지휘부와 일선 병사가 혼연일체가 되어야한다. 정부와 군에 대한 국민의 신뢰도 필수적이다. 6.25 발발 전후에 우리 정부와 군이 보여준 커뮤니케이션 행태는 위기극복과는 너무나 거리가 먼 분열과 불신을 조장한 것과 다름 아니다. 그 결과는 전쟁 초기 어이없이 무너진 전세가 말해준다. 전쟁이라는 최고의 국가위기상황에서 국가통수권자의 소임은 막중하다. 6.25 당시 우리 대통령의 행보와 메시지는 안타깝고 실망스럽기 그지없다. 과거의 실패에서 타산지석의 교훈을 얻는 게 중요하다."
이제 서울의 강북에서 한강 이남으로 이동할 차례지만, 한강에서 잠시 멈춰 인도교 폭파 사건은 어찌 처리됐을까. 이승만은 수도를 탈취당한 책임을 물어 채병덕을 좌천시켰다. 그 자리에는 미국 참모대학에 유학하다 급거 귀국한 정일권(33세)을 준장에서 소장으로 진급시켜 임명했다. 채병덕은 7월 27일 낙동강 전투에서 전사했다.
▲ 한강 인도교에 남은 총탄 자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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