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협의 근대화 뒤집기] 청나라·일본·국민당의 잇단 지배, 타이완이 버틴 힘은?
‘복속과 저항의 섬’ 타이완
펑후(澎湖)군도가 타이완보다 무려 400년 앞서 중국 행정체계에 편입된 사실을 알게 되면서 다시 놀랐다. 타이완해협(약 180㎞ 폭) 중 타이완 쪽 가까이(약 50㎞ 거리) 있어서 타이완의 부속도서처럼 보이는 펑후는 원나라 초(1281) 강절행성(江浙行省) 동안현(同安縣) 관할에 들어갔다. 대만부(臺灣府) 설치는 1684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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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세기 말에야 중국 영토로 편입
해협 건너편은 13세기에 평정돼
중국과 또 다른 ‘남양문명’의 저력?
‘국가의 통치’ 피하고, 이용한 재간
다양한 역사가 쌓여온 주민 구성
‘일국’이 되어도 ‘양제’ 필요한 곳
」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거점
타이완은 왜 그렇게 오래도록 중국인의 관심 밖에 있었을까. 중국과 일본 사이의 징검다리 노릇을 한 류구열도와 달리 배후에 망망대해밖에 없는 타이완의 외진 위치가 지적된다. 하지만 펑후보다도 오래 방치된 사실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푸젠·광둥 등 중국 남해안의 한화(漢化)는 남송시대(1127~1279)에 급속히 진행되고, 이어 중국인의 동남아시아 이주가 시작되었다. 15세기 초 정화(鄭和) 항해 때는 동남아시아 여러 항구에서 중국인 이주민 집단의 존재가 확인되었다.
그런데 17세기 초까지 타이완 이주는 미미했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가 타이난(臺南) 부근에 거점을 만들 때(1624)도 중국인 정착지가 거의 없었다.
타이완의 한화(漢化)가 늦었던 이유를 지도에 나타나는 객관적 조건들로 설명할 수 없다면, 지도에 나타나지 않는 고유한 특성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원주민이 한화를 거부하는 특별히 강한 성향을 갖고 있었던 것일까.
유럽문명에 가려진 ‘남양문명’
여기서 ‘남양(南洋)문명’의 존재를 생각해 보게 된다. 남양어족(Austronesian Language Family) 개념은 19세기에 확립되었다. 언어의 공유가 문명권 형성의 중요한 조건인데도 ‘남양문명’ 개념이 떠오르지 않은 것은 당시의 편협한 문명관 때문이었다. 문명의 표준은 유럽문명에 있었고, 다른 문명권의 존재도 그 잣대에 따라 판정받았다.
한화에 대한 타이완의 저항력을 남양문명 전통의 힘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타이완 원주민은 남양어의 가장 오랜 형태를 지켜온 집단이다. 육지세력이 농업 발전을 통해 큰 힘을 키우기 전에는 남양인이 도서지역만이 아니라 대륙의 해안지역에도 널리 자리 잡고 있었다. 물러나는 남양세력이 끝까지 버틴 곳이 타이완이었다. 21세기 들어 유전자 연구 등을 통해 남양인의 모습을 찾는 노력이 늘어나고 있으나 아직 ‘남양문명’을 논할 단계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다. 장래의 숙제로 남겨둔다.
해적의 본분에 투철했던 정지룡
1662년 정성공(鄭成功·1624~1662) 세력의 네덜란드인 축출 때 타이완의 중국인 이주민은 약 5만 명까지 늘어나 있었다. 식량 생산 등 노동력 확보를 위해 이주를 장려한 결과다.
정성공의 아버지 정지룡(鄭芝龍· 1604~1661)은 당시 ‘해적’의 진면목을 보여준 인물이다. 초년에 마카오에서 포르투갈어를 익히고 일본에 가서 해적이 된 후 그의 강점 하나는 네덜란드인과의 소통 능력이었다. 1628년 명나라에 ‘귀순’한 후에도 해적 노릇을 계속하면서 명 조정과 네덜란드인, 그리고 해적집단, 3개 세력 사이의 줄타기를 통해 세력을 키웠다.
그가 1646년 청나라에 항복한 것도 또 한 차례 줄타기 시도였을까. 북경 함락(1644) 후 남경에 세워진 남명(南明) 조정은 이듬해 남경 함락 후 푸젠으로 옮겨왔다. 지역 최대의 군사력을 가진 정지룡은 조정의 최고 예우를 받았으나(황제가 정지룡의 아들을 양자로 삼아 ‘성공’이란 이름을 지어줌으로써 ‘콕싱가(Koxinga·國姓爺)’란 별명이 생겼다.) 조정 수호에 전력을 기울이지 않았고, 조정이 무너진 직후 청나라에 ‘귀순’했다. 아들 정성공은 항쟁을 계속했다.
부자간에 귀순-항쟁의 다른 길을 걸은 데 뭔가 속셈이 있었지 않았나 의심이 든다. 명나라 귀순 때도 속셈이 있었는데, 이번 귀순이라고 달랐겠는가. 아버지의 측근들이 아들 곁에 남아 군사력을 지켜준 사실도 이런 의심을 뒷받침한다.
당장 맞설 수 없는 청나라의 힘 앞에서 정지룡은 자신을 인질로 제공하면서 아들이 세력을 지키게 하여 시간을 두고 협상할 길을 열어놓은 것 같다. 그의 처형은 15년 후(1661) 정성공이 타이완을 점거해 독립을 지킬 뜻을 분명히 한 때였다.
외부의 억압은 내부 대립 불러와
정씨 세력과 네덜란드인 사이에는 수시로 충돌도 있었으나 오랫동안 협력 관계가 많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정씨 세력이 군사비 조달을 위해 네덜란드인과 분점하던 교역 사업의 지분을 늘릴 필요가 생겼고 대륙을 벗어난 근거지 확보도 필요하게 되어 네덜란드인을 축출하기에 이르렀다.
정씨 세력이 동녕국(東寧國)을 세우며 ‘명나라 회복’을 외친 것은 청나라로부터 독립을 지키기 위한 구호였다. 이것이 청나라 체제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대안으로 받아들여져 1683년 평정될 때까지 이주민이 10만 명 선으로 늘어났다. 그래서 청나라가 평정 후 대만부를 설치하게 되었다.
1895년까지 청나라 치하에서 타이완 인구는 약 250만 명으로 늘어났고, 1945년까지 일본 통치 기간을 통해 약 600만 명에 이르렀다. 현재 약 2335만 명으로 집계된다. 그중 원주민은 2.38%를 점하는 약 57만 명으로 파악되고, 95% 이상을 점하는 한족은 본성인(本省人)과 외성인(外省人)으로 구분된다. 본성인은 1945년 이전부터 살아온 집안이고 외성인은 국민당 정권과 함께 건너온 100여만 명 집단과 그 자손이다.
본성인 내에도 갈등이 심한 집단이 있었다. 푸젠 출신 혹로인(福佬人, 인구 70%)과 광둥 출신 학까인(客家人, 15%)은 청나라와 일본 통치 아래 치열한 상쟁을 이어 왔다. 그러나 국민당 정권이 2·28사건(1947) 이래 본성인에 대한 억압정책을 펴면서 외성-본성 대립이 더 크게 부각되었다.
1987년 계엄령 해제 이후 모든 층위에서 인구집단 간의 갈등이 완화되었다. 독재정치가 사회 내 대립을 격화시키는 경향을 확인할 수 있는 사례다. 오랜 억압체제를 벗어난 타이완인이 자기 정체성과 자기 미래를 숙고할 수 있는 모처럼의 환경을 맞았다.
일본어도 중국 표준어도 안 써
청나라-일본제국-국민당정권의 지배를 연이어 겪는 동안 지배자를 대한 타이완인의 자세를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린셴탕(林獻堂·1881~1956)을 살펴볼 만하다. 위세 높은 타이완 5대 가문의 으뜸 우펑(霧峰) 린씨의 가주(家主)로서 타이완 민간 권력을 대표하던 인물이다.
일본 당국은 린셴탕을 일본 귀족원 의원으로 임명하는 등 회유에 많은 공을 들였다. 그러나 그가 적극적 항일을 삼가면서도 친일에까지 나서지는 않았음을 일본어를 익히지 않은 사실이 말해준다.
린이 존경하던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는 무장항쟁보다 실력 양성에 힘쓸 것을 린에게 권했다고 한다. 그 후 린의 정치적 자세는 이 권유에 부합한다. 정치보다 문화사업에 힘을 쏟고, 지방의회 설치와 자치권 획득 등 ‘일본제국 내의 타이완 발전’을 추구했다.
이런 온건노선마저 중·일전쟁 발발(1937)로 좌절된 후 린셴탕이 중국을 바라보게 된 것은 보통화(普通話)를 배우기 시작한 사실에서 알아볼 수 있다. 종전 후 국민당에 가입도 했다. 그러나 국민당정권이 본성인을 참혹하게 탄압한 2·28사건 후 공직을 벗어나려 애쓰다가 1949년 신병 치료차 일본으로 가서 7년 후 죽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일본 통치에 대해서나 국민당 통치에 대해서나 린셴탕의 태도는 ‘쿨한’ 느낌을 준다. 어쩌면 국가에 대한 불가근불가원(不可近不可遠)의 자세를 타이완인의 한 특성으로 볼 수는 없을까. 동남아시아인의 ‘국가기피증’을 그린 제임스C 스콧의 『통치를 피하는 재간』(2009)을 읽으며 떠오른 생각이다. ‘남양문명’의 존재를 상상하는 하나의 실마리다.
김기협 역사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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