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C 셀럽 연암도 예순에야 ‘서울에 집 한 채’
박영서 지음
들녘, 360쪽, 1만8000원
조선 시대에도 서울에서 집을 구하는 건 무척 어려웠다. 18세기의 셀럽이었던 연암 박지원에게도 그랬다. “그는 자기 집을 장만하기까지 서울에서 네 번이나 남의 집을 빌려 살았습니다. 31세에는 이장오의 별장에, 44세에는 처남의 집에, 50세에는 사촌 형의 별장에, 52세에는 사촌 동생의 집에 세 들어 거주하죠. 예순이 되어서야 겨우 서울에 작은 집 한 채를 지을 수 있었습니다.”
선비 성희안은 15세기에 이미 “수도가 만들어진 지 백 년이 지나 거주하는 사람도 매우 많고 다들 조밀하게 모여 삽니다. 이러니 성안 땅 한 치가 금값과 같은 지경입니다”라고 적었다. “서울 땅 한 치가 금값”이라는 말은 오늘날에도 통용된다.
‘시시콜콜 조선복지실록’을 쓴 젊은 역사저술가 박영서(33)의 새 책 ‘시시콜콜 조선부동산실록’은 조선사에서 보기 힘들었던 부동산의 역사를 살핀다. 먼저 집값을 보자. 1800년 조선 인부의 하루 품삯은 대략 2전으로, 월급으로 치면 6냥이었다. 1804년 서울 장통방 소재 가옥이 1040냥이었으니, 약 14년 동안 숨만 쉬고 살면서 돈을 모아야만 서울에 그럴싸한 집을 장만할 수 있었다.
19세기에 서울 집값은 사실상 노동을 통해 집을 구매할 수 없는 지경에 와 있었다. 18∼19세기 서울 사대문 안에 산다는 건 조선이 쌓아 올린 사회적 자산을 고스란히 누릴 기회를 보장받는다는 뜻이었다. 그러니까 ‘서울 집중’과 ‘서울 집값’은 조선 시대부터 있었던 문제였다.
관료들도 서울에서 집을 구하지 못해 월세나 전세로 살았다. 당연히 서울에서 밀려나는 양반들도 있었다. 책에는 집과 부동산 문제로 고심했던 선비들의 일기가 다수 인용돼 있다. 18세기에 서울에서 관직 생활을 했던 황윤석은 월세를 전전하다 전세를 구했다. “당시 110냥짜리 초가집의 일 년 전셋값이 60냥으로 집값의 약 54%나 되었습니다.” 선비 유만주의 일기에는 1784년 한 해 동안 무려 일곱 차례나 집을 사려고 시도하는 과정이 나온다. 유만주는 부동산중개인 ‘가쾌’의 농간에 놀아나기도 한다.
조선 시대에도 전세가 있었고, 부동산중개인이 있었고, 주로 사채 형태인 부동산 대출이 있었다. 또 그린벨트도 있었고, 재개발도 있었고, 화성과 같은 신도시 조성도 있었고, 다주택 규제도 있었다.
“듣건대 소격서 앞에 정효상의 집이 두 채나 있는데 이처럼 고위 공직자가 서울 안에 앞다투어 두 채씩 집을 짓기 때문에 서민들은 서울 안에 발붙이고 살아갈 곳이 없다고 한다. 정말 심각한 일이다. 앞으로 고위 공직자들은 서울 안에 집을 한 채씩만 짓고 살다가 적장자에게 물려주도록 하라.”
1481년(성종 12년) 1월 27일 ‘성종실록’에 기록된 임금의 어명이다. 하지만 ‘1가구 1주택’ 규제는 통하지 않았다. 1552년(명종 7년)에 작성된 정공징 집안의 상속 기록을 보면 그는 서울에 여러 채의 가옥을 소유하고 있었고 이를 자식 7남매에 분배했다.
저자는 실록, 일기, 문중 문서, 편지 등 조선 시대의 기록들과 기존 연구를 조합하는 방식으로 조선의 땅값과 집값 실태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그에 따르면, 조선의 부동산 정책은 혁명적으로 출발했으나 처참하게 실패했다.
“조선의 개국이 혁명이 될 수 있었던 까닭은 토지 국유화의 이상에 입각한 토지 재분배에 있습니다. 조선을 세운 사람들이 고안해 낸 과전법 체제는 오랫동안 고려를 좀먹고 있던 불평등한 토지구조를 해체, 재분배하여 공정하고 평등한 세상을 만들고자 했던 시도입니다.”
과전법은 토지 소유자를 국가로 단일화하고, 현직 관료들에게만 토지를 분배하되 원칙적으로 상속이 불가능하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개국공신들에 공신전을 제공한 것을 시작으로 주로 왕실과 사대부를 대상으로 토지 분배와 상속의 ‘예외적 허용’이 계속 추가되면서 사적 소유가 늘었다. 관직으로 돈을 번 양반들은 어려워진 사람들의 땅과 집을 사들이고, 개간·간척 사업권을 따내 땅을 늘리고, 부동산 세금과 규제를 회피하고, 소작농과 노비를 착취하면서 지주계급, 부동산 특권층으로 형성됐다.
게다가 조선은 지독한 서울 중심 국가였다. 서울의 땅은 좁았고, 사람은 몰려들었고, 집은 너무 부족했다. 현 광화문 인근에 있던 한 가옥의 140년에 걸친 매매 상황 문서를 보면, 1827년과 1836년 사이에 있었던 세 건의 거래에서 모두 1200냥으로 거래되던 집값이 1850년대 들어 두 배 이상 뛰더니, 1890년대에 2만7500냥까지 치솟는다. 60년 만에 무려 20배가 넘게 오른 것이다. ‘서울 불패’와 ‘부동산 불패’는 조선에서도 견고했다.
조선 부동산사는 경자유전(耕者有田·농사 짓는 이가 땅을 가진다)과 거자유대(居者有垈·실거주자가 집 지을 땅을 받는다)라는 이상이 어떻게 허물어져 가는지 보여준다. 토지 국유화를 내건 혁명국가, 시장과 자본이 그리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 선비의 나라였던 조선에서조차 사적 소유에 대한 열망, 부의 대물림에 대한 집념, 불로소득에 대한 추구는 막을 수 없었고 집과 땅은 투기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저자는 조선의 부동산 개혁이 실패한 이유를 “정부가 적절할 때 시장에 개입하지 않았고, 주거난 해소를 위한 장기적인 해법을 고안하지 않았으며, 부동산 시장에서 벌어진 자산 및 소득 불평등을 해소하는 데 소극적이었다”고 분석한다. 이어 “정부가 시민의 살 권리를 위해 끊임없이 시장 논리에 대응하지 않으면 집을 얻는 과정이 아비규환에 이르고 만다”며 “이것이 조선의 주택사가 남긴 귀중한 경험적 자산”이라고 말했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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