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물통 씹고 이상행동" 승마체험시설의 현실…규제할 법은 없다
26일 오전 경기도의 한 승마장. 입구에 있는 큰 마장 울타리 안에 갈색과 흑색 말 8마리가 유유히 걷고 있었다. ‘어린이 승마 체험 2만원’, ‘승마 1회 강습 20분 5만원’이라고 적힌 간판도 세워져 있었다. 말들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가까이서 보니 갈비뼈가 드러나 보였다. 작은 크기의 말은 울타리 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모래를 먹거나, 울타리 모서리에 나있는 잡풀을 먹기도 했다. 이혜원 한국동물복지연구소장(수의학 박사)은 “굶어서 보이는 현상”이라고 진단했다.
동물자유연대와 한국동물복지연구소(대표 조희경)는 4~9월 국내 최초로 경기도, 제주도 등 승마체험시설 48곳에 대한 실태조사를 진행해 26일 결과를 발표했다. 조사 결과, 48곳 승마장 중 36개(75%) 업체에서 야위거나 비만 등 적정 체중에서 벗어나는 말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일부 승마장에서는 말이 여물통을 씹거나, 사물을 핥거나, 몸을 계속 비비는 이상행동도 관찰됐다. 배가 고파 식분증(자신의 배설물을 먹는 행위)을 보이는 말도 있었다.
경찰에 고발할 정도의 동물 학대 정황은 발견되지 않았지만, 말들의 건강상태가 걱정된다는 게 연구원들의 설명이다. 말들이 신선한 물을 마실 수 있는 곳은 11곳밖에 되지 않았고, 말들이 편히 누워 쉴 수 있는 깔집이 있는 곳은 단 2곳 뿐이었다. 실내 마사에 말들을 결박하고 있는 곳도 다수였다. 이혜원 소장은 “장기적인 결박은 말의 행동을 제약하기 때문에 복지에 있어서 반드시 피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동물보호단체가 승마체험시설에 대한 조사에 나선 건 경주마로 활동하다 은퇴한 퇴역 경주마(퇴역마)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국내 퇴역마들은 대부분 은퇴 이후 승마체험시설로 향한다. 미국, 영국과 달리 개인이 경주마를 입양하는 경우가 드물기 때문이다. 퇴역마 복지에 대한 관심은 드라마 ‘태종 이방원’ 촬영 이후 사망한 ‘까미’ 사건 이후로 높아졌다. 2021년 11월 2일 김모(58)씨 등 제작진 3명은 낙마 장면 연출을 위해 말의 앞다리를 밧줄로 묶은 뒤 말을 달리게 해 바닥에 고꾸라지게 하고, 이후 적절한 치료를 하지 않고 방치한 혐의(동물보호법 위반)로 현재 재판을 받고 있다.
당시 파장이 커지자 주무부처인 농림축산식품부(농식품부)는 지난 2월 13일 ‘퇴역 경주마 복지 개선을 위한 국회토론회’에 참석해 “퇴역마의 용도, 소재지 등에 대한 전수조사 결과를 오는 3월 발표하고, 올해 상반기 중으로 말 이력제 의무화에 대한 결론을 도출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지난 24일 농식품부 관계자는 “조사 결과를 분석하고 정리하는 중이다. 아직 언제 발표할지 정한 바가 없다”고 말했다. 이력제 역시 “내부적으로 검토하고 있지만 진전된 상황은 없다”고 한다.
“말 복지 규정 전무”…현장은 혼란
미국은 말 보호법, 동물 결박 규정, 말 등록 규정 등 말 복지 관련 법이 많다. 오하이오주는 말을 등록하지 않고서는 마구간에 사육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영국은 동물복지법으로 말의 복지를 의무화하고 있다. 특히 승마시설은 승마시설법에 따라 부여된 면허가 있어야만 운영할 수 있다. 반면, 한국은 신고만 하면 승마시설을 운영할 수 있고, 경주를 뛰는 말을 제외하고는 말 등록 의무가 없다. 이번 동물자유연대 조사에서도 총 6곳의 승마시설이 미등록 시설로 드러났다. 미국·영국과 한국의 말 사육 환경 차이를 감안하더라도, 평균 3~5살이면 은퇴하는 퇴역마 나이가 비정상적으로 어리다는 점은 업계 전반의 공감사항이다. 영국 경주마는 평균 7~9세 나이에 은퇴한다.
조희경 동물자유연대 대표는 “그동안 촬영 현장에서 말 복지 문제가 심각했는데도 큰 관심을 못 받았는데 이번 조사를 통해 말이 처참하게 고통받는 현실을 알게 됐다”며 “말의 복지와 처우가 개선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과잉 생산되는 말의 수를 줄이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또 “말은 반려동물로 인식되면서도 축산 개념으로 희생되는 경향이 있는데 인식이 개선돼서 잔혹한 처우가 반복되질 않길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장서윤 기자 jang.seo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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