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이 왕위를 지켰다면 이익을 봤을 나라들

김종성 2023. 10. 26.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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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성의 사극으로 역사읽기] MBC <연인>

[김종성 기자]

MBC 사극 <연인>은 병자호란 뒤에 백성과 조정이 겪는 시련을 묘사하고 있다. 백성들은 청나라에 끌려가 고초를 겪고, 인조 임금의 조정은 청나라의 과도한 물자 요구로 허리가 휘어질 정도다.

당시의 청나라 수도인 심양에서 인질 생활 중인 소현세자 부부는 무리한 요구를 해대는 청나라 관원들 앞에서 난처할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럴 때마다 만주어도 잘하고 장사도 잘하고 거기다가 무예까지 뛰어난 주인공 이장현(남궁민 분)이 그런 미션을 척척 해결해낸다.

인조 임금의 전임자인 광해군은 겉으로는 중립외교를 했지만 실제로는 여진족에 유리하게 행동했다. 그런 광해군이 1623년에 왕위를 빼앗기지 않았다면 역사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광해군이 48세 나이로 왕위를 잃지 않았다면, 조선 백성과 조정이 고초를 겪는 사극 속의 장면도 많이 수정돼야 했을 것이다.
 
 MBC <연인>의 한 장면.
ⓒ MBC
 
광해군의 '균형외교'가 미친 영향

광해군의 균형외교를 싫어하는 세력은 인조의 쿠데타를 '정(正)의 회복'을 뜻하는 반정(反正)으로 평가했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인조반정으로 친명외교가 회복된 것이 '정'의 회복이었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광해군이 계속 집권하는 것은 여진족에 유리했다. 하지만 길게 보면 그렇지 않았다. 광해군의 균형외교가 여진족의 남진을 지연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전통적인 도읍인 뤄양(낙양)은 인천 서쪽인 산둥반도 남부와 위도가 대략 비슷하다. 산둥반도 칭다오시에서 서쪽인 뤄양까지의 거리는 오늘날의 고속도로 기준으로 약 900킬로미터다.

바로 그 뤄양을 기준으로 할 때, 서기 9세기까지 중국 내륙의 한족 왕조와 패권을 다툰 국가들은 주로 9시에서 12시 방향에 있었다. 9세기까지 순차적으로 부각돼 중국 내륙과 경쟁했던 흉노족·선비족·돌궐족·위구르족은 뤄양에서 볼 때 9~12시 방향에 있었다.

그랬다가, 한반도에 고려왕조가 들어선 서기 10세기부터는 0~3시 방향 국가들이 강성해져 중국 내륙과 경쟁했다. 이때부터는 0~3시 방향인 거란족·여진족·몽골족·만주족이 번갈아가며 중국을 압박했다.

9~12시에서 0~3시로 패권 대결의 축이 회전하면서 한반도의 전략적 위상도 바뀌었다. 0~3시 국가들의 입장에서 보면, 바로 옆의 한반도를 사전에 제압하지 않고 중국 내륙으로 남진하는 것은 위험했다. 한반도가 중국 내륙과 동맹해 자신들의 뒤통수를 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거란족의 요나라와 여진족의 금나라가 중국 전역이 아닌 그 일부만 차지하는 데 그친 것은 사전에 한반도를 굴복시키지 못한 데 기인했다. 원나라와 청나라가 중국 전체를 정복한 것은 미리 한반도를 자기편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서기 10세기 이후로 한반도는 0~3시 국가들의 중국 진출을 위한 전초기지로 변모했다.

여진족이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일으킨 것은 그 같은 정치 지형 때문이었다. 조선을 굴복시킨 뒤 마음놓고 남진할 목적에서였다. 그렇기 때문에 광해군이 계속 집권하면서 명나라와 여진족 사이의 균형을 유지했다면, 여진족의 남진은 그만큼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광해군이 결과적으로 자신들의 발목을 잡는다고 해서 여진족이 조선을 함부로 침공할 수도 없었다. 지금이나 그때나 전쟁 수행에는 명분이 필요했다. 광해군 정권은 여진족을 함부로 자극한 인조정권과 달랐기 때문에, 여진족 입장에서는 광해군이 계속 집권했다면 침공 명분을 찾는 데 시일이 더 걸릴 수밖에 없었다.

물론, 침공에 필요한 명분을 조작할 수도 있었다. 그럴 경우에도 상당한 시간의 소요는 감수해야 했다. 그래서 광해군의 계속 집권은 여진족의 중국 진출에 제약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광해군이 계속 집권했다면 여진족이 중국을 정복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확실한 것은 여진족의 중국 진출이 그만큼 더 지연됐으리라는 점이다.

인조 쿠데타가 일어난 1623년으로부터 14년 뒤인 1637년에 청나라는 조선을 굴복시켰다. 그해에 청나라는 병자호란을 수습하면서 조선을 신하국으로 전락시켰다. 인조 쿠데타를 계기로 적대적으로 돌변한 조선을 굴복시키는 데에 14년이라는 시간이 소요된 셈이다. 이를 발판으로 청나라는 7년 뒤인 1644년에 중국을 정복했다.

광해군의 계속 집권으로 인해 여진족이 조선 침공의 명분을 얼른 찾아내지 못했다면, 위와 같은 시간표에 당연히 변동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1637년보다 나중에 조선이 굴복하거나 아니면 조선이 아예 굴복하지 않았을 수도 있고, 1644년보다 나중에 중국이 정복되거나 아니면 그런 정복이 일어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광해군의 계속 집권이 여진족보다는 명나라에 유리한 측면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광해군의 중립외교로 인한 동아시아 질서의 균형이 명나라를 좀더 오래 버티게 해줬을 수도 있다.

비슷한 이익을 누렸을 또 다른 나라가 있다. 광해군이 쫓겨난 1623년 당시에는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고, 광해군이 죽은 지 3년 뒤인 1644년에 세상에 나온 나라였다. 1623년 당시만 해도 아직 명나라의 '태중'에 있었던 대순국(大順國)이 바로 그것이다.

1592년에 조선에서 임진왜란이 일어날 때부터 명나라는 재정상의 어려움을 겪었다. 당시의 명나라 황제인 만력제는 궁궐 신축과 황태자 결혼에 왕조의 1년 수입을 탕진했다. 거기다가 대규모 전쟁에도 돈을 많이 썼다. 몽골족이 일으킨 보바이반란을 진압하느라 은 180만 냥을 쓰고, 임진왜란 때 일본군의 북진을 막느라 은 780만 냥을 쓰고, 양응룡의 난을 진압하느라 은 200만 냥을 썼다. 임진왜란 10년 전인 1582년에 명나라의 국고 잔액은 400만 냥 이상이었다. '만력 3대정'으로 불리는 위의 3대 군사원정에 쓴 1160만 량은 1582년 국고 잔액의 3배였다.

그처럼 국고가 비어 가는 상황에서 조세 징수도 쉽지 않았다. 1리에 110가구를 묶어 관리하는 지방행정 시스템인 이갑제가 크게 이완된 것도 세금 수취와 요역(노동력) 징발을 어렵게 만들었다. 평화로운 방법으로 세금을 징수하기 힘들어지다 보니 수취 방식이 한층 가혹해졌고 이는 대규모 폭동을 유발시켰다. 이 때문에 세금 징수가 더욱 곤란해졌고, 이는 왕조 유지의 근간인 군대와 관료기구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재정직 기반을 약화시켰다.

상황이 그랬기 때문에 광해군의 중립외교가 여진족의 남하를 막는다 해도 명나라가 그 이익을 오랫동안 누리기는 힘들었다. 결국 명나라는 1644년에 망하고, 농민군 지도자 이자성이 세운 대순국이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됐다.

그런데 대순국은 청나라의 위협이 상존하는 속에서 건국됐다. 이 나라가 안정적인 기반을 구축하려면 청나라의 남하가 좀더 지연돼야 했다. 하지만 대순국이 그런 적응을 하기도 전에 북경(베이징)에 새로운 주인이 들어섰다. 대순국이 건국된 지 불과 2개월 만에 청나라가 그곳을 점령했다.

광해군이 좀더 오래 권력을 유지했고 그래서 여진족이 만주에 더 머물러야 했다면, 여진족의 중국 점령은 적어도 몇 년은 더 지연됐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이자성의 대순국도 좀더 안정을 찾은 상태에서 청나라를 상대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대순국 역시 그 이전에 있었던 광해군 실각이라는 역사적 사건으로 인해 불이익을 입었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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