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의 구애를 두 번이나 거절한 궁녀

이준목 2023. 10. 26.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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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 리뷰] tvN스토리 <벌거벗은 한국사>

[이준목 기자]

의빈 성씨(宜嬪 成氏, 1753-1786)는 조선 22대 국왕 정조의 후궁으로 본명은 성덕임(成德任)이다. 정조가 가장 사랑했던 여인으로 알려져있으며, 왕정시대의 궁녀로서는 드물게 온전히 이름을 남긴데다 놀랍게도 국왕의 구애를 두 번이나 거절했다는 당찬 일화로도 특히 유명하다. 유난히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정조와 성씨의 '세기의 왕실 로맨스'는 지금도 수많은 대중문화의 소재로 활용될만큼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25일 방송된 tvN 스토리 역사스토리텔링 <벌거벗은 한국사> 79회에서는 '정조는 왜 궁녀 성덕임에게 두 번이나 거절당했나' 편을 통해 정조와 의빈 성씨의 애틋한 사랑이야기를 조명했다.

1762년 음력 5월 13일(영조 38년), 조선 제21대 국왕 영조가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를 폐위시킨 뒤 뒤주에 가두어 굶겨 죽이는 임오화변(壬午禍變)이 발생한다.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아들로 당시 세손이었던 정조는, 임오화변이 발생하자 어머니 혜경궁 홍씨-아내 세손빈 김씨 등과 함께 모든 직위를 박탈당하고 외할아버지 홍봉한이 있는 외가로 잠시 쫓겨온 상태였다.

한켠에서 이러한 정조와 혜경궁 홍씨의 안타까운 모습을 밀리서 지켜보고 있던 어린 소녀가 있었다. 그녀는 당시 10살의 성덕임이었다. 성덕임의 아버지 성윤우는 중인 출신으로 홍봉한의 집에서 청지기(집사)로 일하고 있었다. 성덕임도 당시 아버지의 일을 도우면서 정조와 처음으로 만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정조와 혜경궁 홍씨는 9일만에 영조의 부름을 받고 다시 궁으로 돌아간다. 영조는 사도세자가 사망하자 시호를 내리고 세자의 지위를 복권시켰으며 세손 정조는 할아버지 영조와 함께 경희궁에서 지내게 된다. 창경궁으로 돌아온 홍씨는 사가에서 눈여겨본 성덕임을 본방나인(중전이나 세자빈이 친정에서 데리고온 궁녀)으로 궁궐에 불러들인다.

홍씨는 성덕임이 총명하고 외모가 복스럽다며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어제의빈묘지명'에 따르면 성덕임은 생후 1년 만에 자신의 이름을 구별할 줄 알았고 글을 빨리 깨우칠 만큼 총명했으며, 타고난 품성이 탁월하여 겸허하고 공손한 태도를 유지하고 검소하고 절약함을 실천했다고 칭찬하고 있다. 매사 모범적인 성덕임의 성향이 까다롭고 엄격한 궁궐에서 일하기에 적합한 성격이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 무렵 정조는 궁궐로 돌아왔으나 하루하루가 가시방석이었다. 아버지 사도세자는 비참하게 세상을 떠났고, 정조는 죄인의 아들이라는 꼬리표를 단채 변덕스러운 할아버지 영조와 자신을 후계자의 자리에서 끌어내리는 조정 대신들 사이에서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정조가 궁안에서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을 수 있었던 곳은 어머니 헤경궁 홍씨가 거주하던 창경궁이었다. 정조는 문안인사를 위하여 어머니의 거처를 드나들면서 자연스럽게 본방나인이 된 성덕임과도 자주 마주치게 됐다. 정조는 차분하고 단아한 성덕임의 모습을 보면서 호감을 느끼게 됐다.

'어제의빈묘지명'에 따르면 정조는 성덕임의 첫 인상을 회상하며 '용모가 깨끗하고 단정하며 성품은 단아하고 장중하며 부드러웠다'고 온갖 극찬만을 늘어놓고 있다. 영락없이 사랑에 빠져 콩깍지가 쓰인 남자의 감정을 은연중에 드러낸다. 1766년, 어느덧 15세가 된 정조는 14세의 성덕임을 따로 불러내 마음을 고백하며 승은(承恩, 궁녀 등이 임금과 잠자리를 가져 후궁이 되는 것)을 제안한다.

하지만 성덕임은 눈물을 흘리면서 "그 명은 따 를수 없습니다"라고 답하며 놀랍게도 정조의 구애를 단칼에 거절했다고 한다. 궁녀라면 누구나 선망할만한 일생일대의 기회를 스스로 걷어찼을뿐 아니라, 자칫하면 미래의 국왕에게 불경죄로 죽음에 이르는 처벌을 받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성덕임은 그 이유로 "세손빈이 아직 아이를 낳고 기르지 못하여 감히 승은을 받을 수 없습니다"고 답했다. 정조와 세손빈 김씨는 데면데면했던 사이로 아직 아이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정조의 총애를 받고 후궁이 된다는 것은, 윗전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는 이유였다. 정조는 성덕임의 뜻을 존중하고 물러난다.

일국의 세손이 일개 궁녀에 프로포즈했다가 보기좋게 차인 꼴이었지만, 정조는 '어제의빈묘지명'에 이러한 자신의 연애 흑역사마저도 솔직하게 기록해놓았다. 그만큼 정조의 대인배적인 면모와 함께, 성덕임을 아끼는 마음이 진심이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히려 정조는 성덕임의 이야기를 듣고 '감동하여 더 이상 다그치지 못하였다'고 할 만큼 성덕임의 인품에 더욱 매료된 모습을 보인다.

성덕임은 정조의 구애를 거절한 뒤 묵묵히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성덕임은 재주가 많아 궁안에서도 팔방미인으로 통했고, 특히 글을 예쁘게 잘 써서 필사(筆寫)에 매우 능했다고한다. 오늘날 한글 프로그램 글꼴의 한 종류로 유명한 '궁서체'는 궁중 서체의 줄임말이며 그 시초는 바로 궁녀들의 글씨에서 비롯됐다.

1776년, 25세의 정조는 험난했던 세손 시절과 왕위 계승의 과정을 무사히 통과하여 마침내 조선의 국왕에 등극했다. 정조는 즉위후에도 한동안 후사가 없어서 조정의 우려를 자아냈다.

1778년(정조 2년) 왕대비 정순왕후 김씨는 중전 효의왕후가 후사를 낳지 못하자, 왕실의 어른으로서 정조에게 후궁을 간택할 것을 제안한다. 그해 6월 정조는 최측근이던 홍국영의 누이동생인 원빈 홍씨를 간택하여 후궁으로 책봉했다.

하지만 원빈은 입궁한지 불과 1년 만에 13세의 어린 나이로 갑자기 세상을 떠난다. 누이의 죽음에 분노한 홍국영은 효의왕후가 자신의 동생을 독살했다고 모함하며 궁녀들을 고문하는가 하면, 정조가 새로운 후궁을 들이는 것을 막으려고 하는 등 폭주하다가 정조의 분노를 사 모든 권력을 잃고 실각한다.

믿었던 측근의 사직과 혼란스러운 후궁-후사 문제까지 마음이 복잡했던 정조가 다시 떠올린 인물은 성덕임이었다. 정조는 '성덕임을 처음 본 이후 20년 동안 후궁의 반열에 두었다'고 기록할만큼 그녀가 대한 애틋한 순정을 오랫동안 간직해왔다고 한다. 여기에는 이미 궁궐생활에 익숙하고 별다른 결격사유가 없던 성덕임을 후궁으로 책봉한다면 모든 분란이 정리될 것이는 정치적 판단도 있었다. 이에 정조는 성덕임에 다시 한번 승은을 제안했다.

하지만 성덕임은 이번에도 정조의 고백을 거절한다. 그녀가 왕의 총애와 안정된 지위가 보장되는 후궁 제안을 굳이 왜 한사코 거절하려고 했는지는 지금도 해석이 분분하다.

공식적으로는 성덕임 본인이 내세운 명분처럼 효의왕후에 대한 배려와 의리 차원이었을 가능성도 있다. 당시 효의왕후는 여전히 후사를 낳지 못했고 정조의 사랑도 받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반면 성덕임과의 관계는 오히려 평생 자매처럼 돈독했다고 한다. 두 사람은 동갑내기에다가 입궁시기도 비슷했기에 실제로 신분을 떠나 어릴 때부터 친분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은 편이다.

한편으로는 성덕임이 오랫동안 궁녀로서 조선 왕실 일원의 순탄치않은 삶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봤기에, 진심으로 자신이 후궁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왕의 후사를 낳아야한다는 압박감, 설사 후사를 낳더라도 이후로 후계구도를 둘러싼 미래의 권력투쟁 가능성까지 감안한다면, 성덕임에게는 후궁으로서의 삶이 그리 행복해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해도 무리가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기록에 남겨진 행적으로 봤을 때, 성덕임이 장녹수나 장희빈, 소용 조씨 등 조선시대에 악녀로 이름을 남긴 수많은 후궁들처럼, 왕의 총애를 이용하여 출세나 권력욕을 가진 인물은 아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성덕임에게 두 번째로 거절당한 정조는 1780년, 화빈 윤씨를 두 번째 후궁으로 간택한다. 하지만 윤씨는 '상상 임신' 파동을 일으키며 왕실의 신임을 잃었고, 시기와 질투가 심하여 정조의 사랑을 얻지 못했다.

결국 성덕임을 잊지못한 정조는 포기하지 않고 다시 세 번째로 구애에 나선다. 성덕임은 여전히 거절하려고 했으나, 이번엔 정조도 물러서지 않았다. 정조는 성덕임의 하인에게 가벼운 벌을 내리며 우회적으로 압박을 하면서 한편으로 성덕임에 대한 마음을 공개적으로 드러냈다. 그러자 성덕임도 더이상 거부하기 어렵다는 것을 깨닫고 정조의 마음을 받아들였다.

사실 이때 성덕임은 이미 정조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다. 정조와 성덕임의 관계가 공론화되고, 후궁에 정식 책봉된 것은 화빈 윤씨가 간택되고 나서였다. 훗날 상상임신으로 밝혀지기는 했지만 화빈이 먼저 임신을 했다는 소식이 알려지며, 후사에 대한 정치적 부담을 다소 덜게 된 것도 성덕임이 마음을 돌릴 수 있었던 배경으로 꼽힌다.

당시 상궁이었던 성덕임은 정식 후궁이 되었고, 정조는 5개월만에 종 3품 소용에서 정1품 빈으로 봉하며 '화목하다'는 의미를 담은 '의빈'이라는 봉호를 내린다.

정조와 성덕임의 관계는 매우 화목했다고 한다. '몽오집'에는 '상(정조)이 (의빈의 거처로) 들어오면 항상 웃으며 맞이했고, 발걸음이 문밖으로 나가려고 하면 앙앙 울며 찾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덕임은 1782년(정조 6년) 9월 7일 마침내 아들인 문효세자를 낳으며 정조를 더욱 기쁘게했다.

또한 성덕임은 대단한 지위와 권세를 누리게 되었음에도 매사 겸손하고 신중하게 행동했다고 한다. 성덕임은 후사를 낳지 못한 중전 효의왕후에게 "저는 아이만 낳았을뿐 원자(문효세자)는 중전의 아이입니다"라고 이야기할 만큼 윗전을 공경하고 예의를 지켰다.

효의왕후 역시 그런 성덕임을 질투하지 않았다. 본래 자신의 양자로 입적해야했음에도 친모인 성덕임이 문효세자를 직접 키울 수 있도록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마냥 행복할 것만 같았던 정조와 성덕임 부부에게 오래가지 않아 비극이 연이어 찾아왔다. 1786년(정조 10년) 7월 왕세자로 책봉되어 문효세자가 홍역에 걸려 다섯 살의 어린 나이에 세상을 떠난다.

어머니인 성덕임은 당시 둘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라 죽은 아들 옆에 가까이 갈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성덕임은 아들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성덕임은 "몸은 제 것이 아닙니다. 만약 정에 끌려 방자하게 마음대로 슬퍼하며 제가 스스로 돌보지 않는다면 나라에 죄를 짓는 것"이라고 의연하게 이야기했다고 한다.

비록 겉으로는 태연한 척 했지만 성덕임의 몸과 마음은 속으로는 망가져가고 있었다. 9개월의 만삭이 된 성덕임은 원인 모를 병에 걸리며 건강이 크게 악화되었다. 성덕임은 아픈 와중에도 정조가 찾아올때면 항상 웃음으로 맞이했다고 한다. 하지만 병세가 위독해지자 어느날 운명을 직감한 듯 정조 앞에서 참았던 눈물을 터뜨렸다. 성덕임은 정조에게 "제가 죽어도 중전과의 사이에서 후사를 낳게 된다면, 지하에서라도 즐겁고 좋아할 것"이라는 서글픈 마지막 유언을 통해 마지막까지 남편과 왕실의 미래를 더 걱정했다.

1786년(정조 10) 9월 14일, 성덕임은 태어나지도 못한 복중 아기와 함께 아들 문효세자를 따라 저 세상으로 떠난다. 정조는 4개월 사이에 사랑하던 아내와 두 아이를 모두 잃는 비극을 맞이해야 했다.

아들의 곁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에 따라 정조는 문효세자 옆에 성덕임의 묘를 함께 마련했다. 조선의 예법상 후궁과 세자가 함께 묻히는 것을 불가능했지만, 정조는 신하들의 반대에도 예법까지 무시해가며 성덕임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줬다. 하지만 일제감점기들어 골프장 전설을 이유로 일제가 문효세자와 성덕임의 묘를 파서 이장하면서 모자는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수난을 겪어야했다.

정조는 성덕임과 함께한 모든 순간을 직접 글로 남기기로 했고, 완성된 책을 그녀의 묘에 함께 안장하니 바로 '어제의빈묘지명'이다. 어제비문에서 정조는 "너는 멀리 떠났다. 너를 데려올 방법이 없고, 다른 사람을 보내 물리칠 방법도 없다. 이로서 느끼나 참 슬프고 애달프다. 나는 저승도 갈 수 없다. 너를 생각하면 애통하고 슬프도다"라고 성덕임을 향한 절절한 마음을 표현했다. 또한 정조는 매년 성덕임의 기일마다 빠짐없이 제문을 직접 지어올렸는데, 글 마디마디마다 국왕으로서라기보다는 사랑하는 사람을 잃어버린 한 남자의 애절한 그리움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정조는 성덕임이 세상을 떠난후 14년 뒤에 승하한다. 정조는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뛰어난 군주로 기억되지만 아버지, 아내, 자식 등을 잇달아 먼저 떠나보내며 개인적 삶은 비극의 연속이었다. 사랑했던 여인의 짧은 삶이 애달파서 훗날에라도 오랫동안 기억되기를 바랬던 로맨티스트 정조의 순수한 사랑으로 인하여, 오늘날까지 성덕임의 이름과 흔적이 역사에 남을수 있게 한 마지막 선물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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