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단 39년 만에 나온 벗의 첫 시집을 소개합니다
[정만진 기자]
▲ 김형근 시집 <낙타의 눈물> 표지 |
ⓒ 정연지 |
내가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입학 후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그러니까 벌써 39년 전의 일이다. 같은 학번 가운데서도 차후 유난히 친한 벗이 되는 김형근이 여러 편의 시를 보여주었다. 그 시들 중 '상수리 나무'를 39년이 지나 다시 읽는 이 즐거움, 아마 웬만한 사람은 누릴 수 없는 호사일 것이다.
도마,
더 낮은 곳으로 내려가자.
상수리나무는 잎이 말라 있고
상수리나무는 줄기도 말라 있다.
한숨 소리, 신음 소리
그 아래 있고
온 산야(山野)에도 있다.
알고 보면 기나긴 세월인데
우리는 늘 높은
위만 바라보고 살아왔다.
저물 무렵에는
상수리나무 뿌리 적시는
물 몇 통 부어주고
도마,
네 옆구리 어떤지
깊숙이 만져 보아라.
스무 살 즈음 풋풋한 청년이 이토록 완숙한 시를 썼다는 사실은 김형근의 문학적 재능을 가늠하게 해준다. 이 기사를 쓰는 필자 또한 39년 전에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후 1984년 김형근은 김종인, 김창규, 도종환, 배창환 등과 함께 문학무크 <분단시대>를 창간하면서 창작 활동을 본격화했다.
시집 내지 않고 충실히 살아온 시간
그러나 시집은 내지 않았다. 그 동안 김형근은 고향인 경북 영덕의 바다를 노래하고, 영덕이 낳은 평민 의병장 신돌석을 시로 형상화했으며, 경기 평택고, 서울 상명대부속여고, 신일고 교사를 지낸 이력답게 교육과 관련되는 작품을 창작하기도 했다. '어떤 인연'은 그 중 한 편이다.
사방으로 넓은 들판
서쪽 끝은 천혜의 바다
인심 좋고 덕이 후한 평택
햇수로 삼 년
사제로 만났다가
헤어진 지 어언 삼십 년.
어느 가을날
달 맞으러
동해 가는 길에
가까스로 연락 닿아
다시 만나게 된 인연.
한 해에도 몇 차례
이어지는 정성스런 선물
이번 한가위에도 받고 보니
북경에서 제자 이상적이 보내준
귀중한 많은 서책
유배지 제주에서 받은
추사의 심정 이제
어렴풋이 알 것도 같다.
어떤 인연은
추운 한겨울 소나무, 잣나무가
늘 푸르게 의연히 서 있는
그림을 그리게 하고
어떤 인연은
묵정밭 새로 갈고 일구어
소탈한 삶의 한 풍경 담은
시를 쓰게도 하나 보다.
▲ 시 '풍경 소리' 전문 |
ⓒ 김형근 |
그런가 하면, '그대가 참사람이라면'의 마지막 연인 제3연의 "사랑하는 사람/ 떠난다 하면 보내주고/ 다시 오면 싫다 말라/ 그 여인 가진 것 없이/ 벌거숭이 되어 돌아오더라도/ 온몸으로 따뜻하게 받아주어라/ 그대가 참사람이라면" 같은 시구는 시인이 교육시 범주를 뛰어넘어 깊은 철학적 사유를 갖추고 있음을 보여준다. '낙타의 눈물'도 그런 시의 하나이다.
몽골 고비사막
유목민 촌
간난신고에 지쳐
수유 거부하는 낙타 앞에
구슬픈 마두금 연주되고 있다.
그 곡 구음으로 부르는
젊은 아낙네
따뜻한 손길로
낙타 옆구리 어루만지자
낙타의 둥글고 큰 눈에는
어느새 그렁그렁 눈물 맺힌다.
젖 달라고 울며 보채는 새끼
도리질 치고 발길질하던 에미
애끊는 가락, 소리 어우러지자
마침내 참았던 눈물
방울방울 땅에 떨구고는
굶주린 새끼에게 젖을 물린다.
고달프고 모진 이 세상
같이 이겨내자고.
"고달프고 모진 이 세상/ 같이 이겨내자"라는 부드러운 어조로 강렬한 연대의식과 형제애를 설득력있게 전파하는 시인의 표현력은 그의 시력을 잘 증언해준다. 서정시인 듯 사회시인 듯 그 경계선을 절묘하게 넘나들면서 독자의 마음을 고혹시키는 '고한(古汗) 며칠'도 그런 가작으로 손꼽을 만하다.
하나 남은
탄광이 문을 닫자
광부들 사라지고
인적 끊어진 사택에
찬 이슬 내리는 가을 저녁
떠날 사람 떠난 자리
그래도 연탄은 남아
발갛게 불을 피운다.
여우와 늑대 사이의 어스름
가늘게 눈을 뜨고
먼 데 산을 보노라면
커다란 슬픈 눈동자
얼핏 어려 있는 듯
함백산 고원에
밤은 일찍 찾아와
마주 보고 늘어선
구공탄 화덕 주변에 모인
길손들 머리 위로
이윽고 별이 돋아나는데,
벗이여
이곳에서
한 며칠 머물다
서리 온다는 상강(霜降)쯤
같이 내려 길 나서면
순례자처럼 의연해질까
수도승처럼 초연해질까
▲ 바닷가에서 태어난 김형근 시인의 작품에는 포구의 풍경과 삶을 다룬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
ⓒ 김형근 |
동해 바닷가에서 태어난 김형근 시인의 작품에는 포구의 풍경과 삶을 노래한 내용이 드물지 않다. 최근작 중 한 편인 '그리운 북평장'도 고향에서 그리 멀지 않은 해안의 북평항을 찾았을 때의 감회를 담고 있다.
낮은 곳이 문득
그리워지는 날이면
북평장으로 가 보오.
낡고 오래된
일련의 나지막한 가게와 집들
북편 끝자락엔 전천
그 너머 벌판에는
높고 우람한 산업단지
속 깊고 넓어서
태평한 동해
때로 사납게 뒤척이는
짙푸른 물결도
어느새 고요히 잦아드는
항구 그 아래
작은 칭찬에도 수줍음을 타고
큰 허물도 넉넉히 감싸 안는
동해를 꼭 닮은
순하디 순한 사람과 사람
늘 정겨운 이웃들
밤새워 건져 올린
생선들 넘쳐나고
아, 시인 백석이 사랑한
그 국수
메밀전병에
막걸리 한 잔
낮은 곳이 자꾸만
그리워지는 날이면
북평장으로 가 보오.
시인은 '그런 길이라면'에서 "야트막한 야산/ 자연 그대로의 황톳길/ 걸을 수 있다면 더욱 좋겠네./ 그 길 걷다 보면 어쩌다/ 저승으로 가는 길/ 조금은 보일 것도 같으이."라고 했다. "낮은 곳이 자꾸만 그리워지는 날"에 가 보는 북평장도 바로 그런 곳이다.
이미 39년 전에 시인은 "우리는 늘 높은/ 위만 바라보고 살아왔다"라고 명확하게 짚어주었다. 그만큼 시인은 우주의 천연 질서를 거스르는 인간 삶의 황량함을 직시해 왔던 것이다. 물론 누구나 그런 경지에 이르지는 못한다. "동해를 꼭 닮은/ 순하디 순한 사람"이라야 가능하다. 북평항에 한번 가보아야겠다.
다음은 시인으로부터 받은 시집 후기이다.
"이제야 첫 시집을 내게 되었다. 시를 쓰지 않고 보낸 세월은 참으로 길었지만, 시 곁을 떠난 적은 거의 없었던 듯싶다. 시가 철저히 어떤 수단이 된 이 시대에 시를 쓰고, 시집을 낸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망설이다가 시집으로 묶어 보았다. 1, 2부는 금년 봄부터 쓴 30편 시들이고, 3부는 젊은 날에 쓴 시 일부를 이리저리 찾아서 같이 실었는데, 특히 암울하고 참담했던 1980년대에 쓴 시를 다시 마주하는 데에는 상당한 용기가 필요했다.
시가 피폐하고 강퍅한 시대를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에게 작은 위안이라도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여전하다. 여기 실린 시편들이, 중심부에서 멀어져 허탈감을 느끼지만, 꿋꿋이 건강하게 살아가는 이웃들의 삶에 조금이라도 잇대어 있다면 다행이라 생각한다. 이 시집이 나의 제자들이나 나를 아는 이들에게는 뜻밖에 받는 반가운 선물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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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형근 시집 <낙타의 눈물>(국토, 2023년 10월 25일 발간), 104쪽, 1만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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