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둠의 시대 백성 위로한 만담가 신불출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우리 민족은 반도국가로 쪼그라든 이래 숱한 외환과 내우를 겪어왔다. 이스라엘과 폴란드의 경우와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민족적 정체성과 고유문화를 유지하며 오늘에 이르렀다.
여기에는 여러 요인이 작동하지만, 빠뜨릴 수 없는 것은 해학·풍자문화가 기층사회에 자리잡아왔다는 점이다. 혹독한 압제와 수탈에서도 혼을 빼앗기지 않았고 자신과 가족 그리고 이웃과 함께 살았다. 전통시대의 남사당놀이, 탈놀이를 비롯 줄광대와 어릿광대, 그리고 만담과 재담을 통해 원과 한을 풀고 평상심을 유지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를 거쳐 일제강점기·해방 후 혼란기와 6.25 전쟁 등 격변과 고난·고통의 시대에 해학과 풍자, 만담과 재담이 없었다면 사람들의 고통은 가중되었을 것이다. 근래에는 이들 용어가 유머, 코미디, 개그로 바뀌었다.
일제강점기 이땅의 백성들은 희망을 잃고 공동묘지와 같은 적막한 시대를 살아야 했다. 간혹 독립지사들의 생명을 건 투혼이 나타나기도 했으나 일회성으로 그치거나 왜곡되어 전해지기 일쑤였다. 그런 속에서 백성들에게 웃음과 화제거리를 준 것은 만담가들의 재치있는 풍자였다.
▲ SBS 드라마 <야인시대> 중 한 장면. 신불출의 만담 공연. |
ⓒ SBS |
여기서 소개하는 신불출은 단연 만담계의 황제였다. 을사늑약의 해에 태어난 것을 두고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으로 이름을 신불출로 고쳤다고 한다. 총독부에서 창씨개명을 강제하자 구로다 구이치(玄田牛一), 검을 현(玄) 자와 밭전(田) 자를 합치면 가축 축(畜) 자가 되고, 소우(牛)와 한일(一)을 합치면 날 생(生) 자가 된다.
일본의 욕설인 '칙쇼(玄生)'를 파자한 것이다. 총독부에 의해 퇴자를 맞았고, '불령선인'으로 찍혔다.
그의 많은 만담 중에 하나를 골랐다. <홍(紅) 백(白) 타령>이다. 동료 만담가 신은봉과 나눈 만담이다.
홍 백 타 령
백 : 흰 게 좋아.
홍 : 허, 붉은 게 좋대도 그러네그려.
백 : 당치 않은 말이지. 흰 게 좋대도 그리거든. 붉은 것은 피를 토하는 것 같아서 싫어.
홍 : 이놈아, 흰 것은 죽은 놈 상판대기 같아서 싫단다.
백 : 원숭이 볼기짝 붉은 것도 자네는 귀염성인 줄 아나?
홍 : 도둑괭이란 놈 수염이 하얀 것이 자네 아버지 닮은 줄은 아주 영 모르네그려.
백 : 이사람아, 매사는 결백이라니 흰 게 좋다네.
홍 : 동가면 홍상이라니 붉은 게 좋지, 무슨 소리야.
백 : 청산에 백운학이라니 운치스러운 것으로 보아도 흰 게 격이지, 어쩐 말이야.
홍 : 욱일승천하는 장엄한 맛이란 붉을수록 좋지 무슨 소린가.
백 : 이사람아, 백두산이라니. 백이지.
홍 : 이사람아 적벽강이라니. 적이지.
백 : 백옥같은 미인이라니. 흰 게 좋지 않은가.
홍 : 허, 자식도 제기! 홍안장군이라는 문자도 네가 못 들어본 모양이로구나.
백 : 맞다. 이놈아 시뻘겋게 술취한 놈 상판때긴 보기 좋더라.
홍 : 분칠한다고 회빡을 뒤집어 쓴 년의 상판때기는 보기 좋더라.
백 : 인석아. 배 속은 흴수록 맛이 난단다.
홍 : 이놈아. 복숭아 속이나 수박 속은 붉을수록 맛이 있단다.
백 : 글쎄 이놈아, 바둑을 두어도 잘 두는 사람이 흰 것을 가지는 법이다.
홍:아, 그 자식, 이놈아, 장기를 두어 보려무나. 노홍소청이라니 웃사람일수록 이놈아, 붉은 걸 가지는 법이다.
백 : 월백 설백 천지백이라는 글은 못보았구나.
홍 : 만록총중에 일점홍이란 글자는 네가 보지도 못한 모양이지.
백 : 이녀석아, 치부책에 적자가 많이 나면 그놈의 집안은 망하는 법이다.
홍 :사람이 죽으면 흰옷을 입는 법이니 이놈아, 흰옷만 입게쯤 되면 그놈의 집안은 안 망하겠다.
백 :집 세간에다 뻘건 딱지를 붙이게 쯤 되면 그놈의 집안이 빵구가 나는 법인데 그래도 붉은 게 좋단 말이냐?
홍 :이놈아. 경제상으로만 보아도 말야 흰 것은 불경제니라. 생기는 돈은 없어 가지고. 요 모양에 흰 것만 좋아하다가는 그놈의 집 기둥뿌리가 천당을 가리킬 줄은(판독불가) 모양이로구나.
백 : 아, 이놈이 사람 죽일 놈 아닌가.
홍 : 가만 있거라. 이놈아. 코 좀 감고 하자.
백 : 코를 감다니. 오라, 푼대서 이녀석아. 부삽질까지 뱉는구나.
홍 : 오라, 가래침이래서! 이놈. 나도 잡놈이지만 너도 말못할 녀석이다.
여 : 아이구, 어쩌면 그렇게도 두 분께서 입심이 좋으세요?
백 : 아니 알토란씨. 이게 웬일이십니까?
여 : 아니 사람이 곁에 서 있는 줄을 모르고 어쩌면 그렇게도 서로 우기십니까? 아니 그런데 백선생께서는 붉은 거라면 왜 그렇게도 질색을 하세요?
백 : 네, 그저 붉은 거라면 송곳니가 방석니가 되도록 이가 갈리는 걸요.
여 : 아니 그러면 백선생께서는 붉은 게 그렇게도 싫으시면 어여쁜 처녀의 앵도같은 입술이 희어야 되나요?
백 : 그야 붉어야 되지요.
홍 : 이놈아, 기어코 그렇댔지.
여 : 홍선생, 가만히 계세요.
홍 : 네.
여 : 아유, 그런데 홍선생께서는 흰 거라면 학질 앓는 놈, 아이그, 놈이라고 그래서 퍽 미안합니다그려.
백 : 그까짓 놈은 그래도 괜찮습니다. 염려 마시오.
홍 : 아서라. 더럽게 망한다. 어서 마저 깔기슈.
여 : 아니 그래, 흰 것이 그렇게도 싫으시면 어여쁜 처녀가 빵긋 웃으려고 할 때 고 귀여운 입속으로 드러나 보이는 이빨이가 빨개야 좋은가요?
백 : 흐흥! 어쩐 말이야. 너도 이놈아. 넓적한 떡이로구나.
홍 : 그러기에 말이야. 붉은 것은 붉어야 하고, 흰 것은 철두철미 희어야 된다는 말이다. (반재식 편저, <만담 10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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