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세조종에 악용된 미수 거래…증권사 리스크 관리 시험대
키움증권, 영풍제지 증거금률 뒤늦게 100%로 올려 비난 자초
금감원, 키움증권 관리 실태 점검…증권가 전반으로 확대 방침
시세조종 의혹으로 지난 19일 거래정지됐던 영풍제지 매매가 오늘(26일)부터 재개됐다. 영풍제지 주가는 장이 열리자마자 하한가로 직행했다. 10시15분 현재 1850만주가 넘는 하한가 잔량이 쌓여 있다. 이에 따라 키움증권의 미수금 회수에도 빨간불이 커졌다. 키움증권은 20일 장 마감 후 "영풍제지 하한가로 고객 위탁계좌에서 4943억원의 미수금이 발생했다"고 공시했다.
지난 18일 영풍제지와 모회사 대양금속이 하한가를 기록하자 한국거래소는 19일부터 이들 종목의 거래를 정지시켰다. 영풍제지 시세조종 의혹으로 관련 일당 일부가 구속된 직후였다. 이들은 키움증권에 100여개 계좌를 만들고 자전거래로 미수까지 사용해 주가를 조작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 때문에 지난 4월 김익래 전 다우키움그룹 회장이 '라덕연 주가조작 사태'에 연루됐다는 의혹으로 홍역을 앓은 키움증권이 영풍제지의 수상한 하한가를 만든 주가조작 세력의 '놀이터'가 됐다는 비난에 휩싸였다. 다른 증권사들은 수상한 흐름을 감지하고 영풍제지의 증거금률을 100%로 상향해 미수거래를 차단했다. 키움증권은 그러나 증거금률을 40%로 유지하다가 영풍제지의 거래가 정지된 19일에서야 100%로 조정했다. 차액결제거래(CFD) 서비스를 활용한 '라덕연 주가조작 사태' 이후에도 리스크 관리를 허술하게 해서 화를 키웠다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게 됐다.
키움증권의 이런 행보에 금융당국은 불편한 심기를 내비쳤다. 특히 금융당국은 이번 사태를 계기로 키움증권을 비롯한 모든 증권사를 대상으로 리스크 관리 실태를 점검할 계획이다. 주가조작 근절에 힘을 쏟고 있는 금융당국의 기조에 따라 시세조종이 의심되는 종목의 미수거래 사전 차단 등이 증권사의 리스크 관리 능력의 주요 항목이 될 전망이다. 영풍제지의 주가를 조작한 세력이 키움증권 계좌를 시세조종 창구로 활용해 1000억원대 부당이득을 취해서다. 신용과 미수 등 증권사의 대출은 주가조작 세력의 자금줄로 악용될 수 있다. 이에 따라 금감원은 키움증권을 포함한 모든 증권사에 리스크 관리 강화를 요구할 예정이다.
영풍제지 작전세력, 키움증권 계좌로 시세조종
키움증권이 공시한 미수금 규모는 이 회사의 연결기준 올 상반기 영업이익(5697억원)에 육박하는 규모다. 이례적으로 미수금 발생 사실을 공시한 것도 액수가 커서 중요 경영사항이라고 판단해서다. 키움증권은 반대매매로 미수금을 회수할 예정이며, 고객의 변제에 따라 최종 미수채권 금액은 감소할 수 있다고 밝혔지만 쉽지 않은 상황이다.
미수거래는 개인 투자자가 증권사에서 돈을 빌려 주식을 매수하고 2영업일 후인 실제 결제일 안에 결제대금을 갚는 초단기 외상 거래다. 만기가 보통 3개월 안팎인 신용융자거래와 구분된다. 미수금은 투자자가 미수거래 대금을 갚지 못해 생긴 일종의 외상값이다. 투자자가 외상값(결제대금)을 납입하지 못하면 증권사가 주식을 강제로 처분해 회수하는데, 이를 반대매매라고 한다.
이번엔 키움증권에서 미수 거래된 금액 상당수가 시세조종 세력이 자전거래로 사용한 100여개의 계좌에서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이 때문에 23일 키움증권 주가는 전 거래일 대비 23.9% 급락한 7만6300원에 마감했다. 강승건 KB증권 연구원은 "영풍제지 미수금 관련 비용 부담을 4분기 실적에 반영함에 따라 올해 연간 이익 전망치를 5293억원으로 직전 대비 23.3% 하향한다"고 설명했다. 정민기 삼성증권 연구원은 "(영풍제지) 하한가 기록 횟수에 따라 키움증권의 손실 규모가 달라질 것"이라면서 "3거래일 연속 하한가를 기록하면 약 2000억원, 5거래일 연속이면 약 3500억원 손실이 예상된다"고 분석했다.
금융투자업계 고위 관계자는 "키움증권에서 미수가 발생한 계좌는 영풍제지에만 대규모 금액으로 미수를 사용해 매매한 비정상적인 계좌가 대다수로 파악됐다"면서 "이번 주가조작 세력이 키움증권에 계좌를 개설해 시세조종한 것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라고 짚었다.
다른 증권사 미수거래 막을 때 키움은 유지
대부분의 증권사는 위험을 감지하고 영풍제지 미수거래를 막았지만, 키움증권은 그렇지 않았다. 미래에셋·한국투자·NH투자증권 등은 올해 초부터 지난 7월까지 영풍제지 증거금률을 100%로 상향하는 등 사실상 미수거래를 차단했다. 그러나 키움증권은 영풍제지 증거금률을 40%로 유지하다가 거래가 정지된 19일에서야 100%로 조정했다. 증권사가 증거금률을 100%로 설정하면 해당 종목은 현금으로만 매수할 수 있어 미수거래가 불가능하다. 증거금률을 40%로 설정했다는 것은 현금 40만원만 있으면 주식 100만원어치를 살 수 있다는 의미다.
증권사는 금융투자협회의 '금융투자회사의 리스크 관리 모범 규준'에 따라 종목별 재무현황, 가격변동성, 유동성, 신용거래융자 비중, 기타 시장정보 등 다양한 요건을 토대로 증거금률을 산정한다. 시장 상황에 따른 변동성, 한국거래소의 시장조치 등을 모니터링하며 신용대출 가능 여부를 판단하는데, 결국 증권사 자체의 판단으로 이뤄진다.
금융투자협회 관계자는 "증권사가 신용융자와 담보대출, 미수거래 등을 제한하는 이유는 무리한 '빚투(빚내서 투자)'로 담보 부족 계좌가 속출, 미수 채권이 걷잡을 수 없이 불어나는 것을 방지해야 하기 때문"이라며 "나아가 투자자 보호는 물론 회사의 자본 건전성을 확보하는 게 목적"이라고 설명했다.
이에 증권사들은 리스크를 관리하는 본부를 따로 둔다. 키움증권 역시 관련 본부 안에 위험 종목을 골라내고 증거금률을 산정하는 심사부를 두고 있다. 그러나 이번 영풍제지의 경우 회사에서 정한 위험 종목은 아니었다는 게 키움증권의 주장이다.
한 증권사 관계자는 "영풍제지는 뚜렷한 이유 없이 11개월간 주가가 12배 이상 올라 제지 업체임에도 주가수익비율(PER)이 300배가 넘어 이미 주식 커뮤니티에서 작전이 의심된다는 이야기가 파다했다"면서 "그런데도 사전 조치를 하지 않은 것은 리스크 관리 능력이 떨어지거나, 수수료 수익을 위해 방치한 것과 다름이 없다"고 꼬집었다.
리스크관리 능력 강화 주문
증권가는 얼어붙고 있다. 금융당국이 모든 증권사의 리스크 관리 실태를 점검하고 강화를 주문할 것으로 예상돼서다. 금융당국은 지난 4월 라덕연 사태가 터진 이후 6월에도 시세조종 사건을 적발하면서 리스크 관리에 집중해달라는 암묵적인 압박을 했다. 증권사들이 앞다퉈 미수금 증거금률 상향 등의 선제적 조치를 한 배경이다. 결실도 있었다. 지난 6월 두 번째 '무더기 하한가' 사태로 주가조작 범죄가 드러난 것은 일부 증권사가 동일산업 등 5개 종목의 이상 주가 흐름을 포착하고 신용 만기 연장을 거부하자 관련 종목들이 하한가로 기록해서다.
정민기 삼성증권 연구원은 "4월 CFD 사태 이후 신용거래 관련 리스크 관리 강화가 요구되고 있는 상황"이라면서 "이번 영풍제지 관련 미수금 사태로 리스크 관리와 내부통제에 대한 근본적인 의구심이 발생했다"고 지적했다. 금융투자업계 한 관계자는 "미수·신용거래에서 증거금률이나 거래가능 종목을 지정하는 것은 증권사의 리스크 관리 영역인데, 앞으로는 이를 좀 더 세밀하게 관리하라는 요구가 이어질 것"이라면서 "내부통제 기능이 정상적으로 작동하는지 금융당국의 모니터링이 강화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키움증권은 25일 700억원 규모의 자사주를 매입하기로 하는 한편, 리스크 관리도 강화하겠다고 밝혔다.
이선애 기자 lsa@asia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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