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6을 기념일로..." 한 고등학생의 새롭고 놀라운 제안
[서부원 기자]
▲ 김재규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향해 권총을 발사하는 장면을 재현하는 모습 |
ⓒ 연합뉴스 |
10월 26일을 '탕탕절'로 부르는 이들이 제법 있다. 누가 작명했는지 알 길 없지만, 최근 시민단체는 물론, 몇몇 아이들의 입에서까지 유행어처럼 오르내리고 있다. 부를 때 입에 착착 감긴다면서, 역사에 더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는 좋은 방법이라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누구든 이름에서 당장 총소리를 연상한다. 10월 26일이라는 숫자가 워낙 강렬하게 다가오는 탓이다. '곰탕이나 설렁탕 같은 음식을 먹는 날'이냐고 반문하는 순진한 아이가 아예 없진 않지만, 이내 그는 또래들에게 웃음거리가 된다. 10월 26일의 역사는 아이들에게도 '상식'이다.
한 아이는 가장 먼저 1979년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궁정동 안가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시해한 날이라고 말했다. 또 다른 아이는 1909년 안중근 의사가 하얼빈 기차역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날이라고 이어받았다. 꼭 70년 터울로 두 역사적 사건이 같은 날에 일어났다.
현대사 공부의 재미에 빠져들고 있는 아이들
현대사에 대한 아이들의 관심이 나날이 커지는 건 고무적인 일이다. 이미 지난 이명박 정부의 '건국절 논쟁'과 박근혜 정부 당시 '교과서 국정화' 문제로 시끄러웠을 때 어느 정도 예견됐다. 이후 2015 개정 교육과정이 본격 시행되면서 한국사는 근현대사 위주로 편성됐다. 한국사 교과서의 4개 대단원 중 3개가 근현대사 부분이다.
이른바 '현대사 덕후'들도 덩달아 늘어났다. 소설 <태백산맥>과 <아리랑>에서 최근 출간된 <아버지의 해방 일지>를 읽는 아이들의 모습도 더는 낯설지 않다. 수십 년 전에 제작된 영화 <남부군>을 부러 찾아 시청하는가 하면, <고쳐 쓴 한국 현대사>나 <해방 전후사의 인식> 등 까다로운 책을 읽는 아이도 더러 있다.
기성세대의 눈으로 보면, 격세지감을 느낄 만하다. 불과 이삼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대놓고 읽을 수도, 볼 수도 없었을뿐더러 가방에 넣고 다니는 것만으로도 죄가 되던 시절이었다. 아직은 소수일지언정 아이들은 소설과 영화의 내용에 관해 묻고 토론하며 현대사 공부의 재미에 빠져들고 있다.
더욱 대견하고 뿌듯한 건, 그들의 현대사 공부가 대입을 준비하기 위한 '스펙 쌓기'와는 무관하다는 점이다. 대개 고등학생들의 책 읽기는 서울대를 비롯한 명문대의 이름으로 제공되는 '권장 도서 목록'에 의존한다. 대입이 교육과정은 물론, 독서 습관까지 쥐고 흔드는 셈이다.
▲ 뤼순감옥에서 수형번호를 달고 있는 안중근 의사 |
ⓒ <영웅 안중근> / 눈밫출판사 |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이 공교롭게 한 날짜에 겹친 '탕탕절'에 대해 방과 후에 몇몇 아이들과 대화를 나눴다. 굳이 그렇게 명명한 이유를 추론해보고, 세대별로 그날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겠다며 말문을 열었다. 때마침 한 시민단체로부터 '탕탕절' 관련 행사를 홍보하는 문자가 울렸다.
한 아이는 작년 이맘때 부모님과 나눈 대화를 소개해주었다. 그의 부모님은 10월 26일을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일로만 알고 있을 뿐,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날이라는 걸 까맣게 모르고 계셨단다. 그날 자기가 부모님 앞에서 '일일 역사 교사'였다며 우쭐댔다.
당장 집에 걸린 달력부터 문제 삼았다.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10월 26일에 '박정희 대통령 서거일'이라고 적혀있거나 그냥 비어있는 달력뿐이었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책상 위에 놓인 수험생용 달력엔 'D-day'만 적혀있을 따름이니, 그것만으로도 감사할 일이라며 씁쓸해했다.
10월 달력의 국경일과 기념일은 단지 이 여섯 날이었다고 했다. 국군의 날(1일)과 추석 대체 공휴일(2일), 개천절(3일), 한글날(9일), 경찰의 날(21일), 그리고 박정희 대통령 서거일(26일). 대체 공휴일조차 소상히 적혀있는데, 안중근 의사의 의거일을 누락한 건 당최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자타공인 '현대사 덕후'인 그는 나아가 우리 현대사에서 10월엔 또 다른 기억해야 할 사건들이 있다면서, 그것이 적힌 달력을 지금껏 보지 못했다며 안타까워했다. 대한민국의 4대 민주화운동의 하나로서, 박정희 대통령 서거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부마민주항쟁(16일)과 제주 4.3 사건 당시 제주 출동 명령을 거부하고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봉기한 여순 사건(19일)도 수록되어야 마땅하다고 말했다. 교과서는 이미 근현대사 위주로 바뀌었는데, 달력은 여전히 전근대적 시각에 머물러있다고 비아냥거렸다.
한 아이의 새로우면서도 놀라운 제안
'탕탕절'이 새삼 일깨워준 역사에 주목하는 아이들이 있는 반면에, 지나치게 경박한 표현일뿐더러 자칫 사회적 갈등을 부추길 우려가 있다며 조심스러워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았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의 서거를 희화화하는 느낌이라고 말했다. 이토 히로부미와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을 동일선상에 두고 있는 것 아니냐며 눈을 흘기기도 했다.
그는 역사적 인물의 공과 과를 평가하는 데 있어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는 걸 경계해야 한다고 연신 강조했다. 공이 과에 덮이거나, 반대로 과가 공에 가려 지워지면 안 된다는 거다. '탕탕절'은 박정희 대통령의 시해를 역사적 필연으로 단정하는 듯한 명명이라 짐짓 꺼리게 된다는 뜻이다.
기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아이들의 평가는 기성세대의 그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숫자로 치면, 공과가 어림잡아 반반쯤 된다. 그를 선진 산업국가의 초석을 마련한 위대한 혁명가로 여기는 아이들부터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서 권력에 눈멀어 민주화의 외침을 짓밟은 잔혹한 독재자라는 평가에 이르기까지 극과 극을 이룬다.
시각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탕탕절'의 교육적 효과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달력을 통해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계기가 됐다며, 내년 내후년에도 기억하게 될 것 같다고 말했다. 한 아이는 당장 책상 위 달력에 메모해두겠다고 했다.
대화를 마무리하며 질문 하나를 던졌다. '탕탕절'이라고 하긴 좀 뭣하고, 달력에 빈칸이 부족해 두 역사적 사실을 모두 써넣기 어렵다면 그 중 어떤 걸 적겠느냐고 물었다. 이는 각자의 역사적 관점을 들여다볼 수 있는 근본적인 질문이기도 하다. 어떤 사건에 비중을 두느냐는 사람마다 다를뿐더러 정답이 있을 수도 없다.
한 아이는 답변 대신 새로우면서도 놀라운 제안을 했다. 두 사건에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는 거다. 이후의 행적에 대한 공과를 떠나 일신의 영달을 위해 민족을 배반한 친일파와 대한제국을 식민화한 일본 제국주의자를 단죄한 날이니만큼 언젠가 친일 잔재 청산이 실현됐을 때, 10월 26일을 기념일로 지정하면 어떻겠느냐는 거다.
▲ 대한독립군 총사령관 홍범도 장군 순국 80주기 국민 추모 공간이 25일 오전 서울 서대문형무소역사관앞에 민족문제연구소 주관으로 설치되었다. 홍범도 정군 영정사진이 무궁화와 카자흐스탄 국화인 백합, 혁명을 상징하는 카네이션으로 꾸며졌다. |
ⓒ 권우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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