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응교의 가장자리] 이 가을에 만나는 권정생의 동화나라

2023. 10. 26. 0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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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의 어린이를 사랑한 권정생 작가가 1967년부터 16년 간 살았던 경북 안동 일직교회 문간방. 서향으로 지어져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웠다. [사진 권정생어린이문화재단]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100년 전 1923년 방정환 선생은 잡지 『어린이』를 내면서 ‘어린이’라는 단어를 널리 사용합니다. 간토대지진 조선인학살 사건이 일어나기 전 3월에 창간된 『어린이』를 떠올리면, ‘어린이’를 주인공으로 세운 권정생 선생이 그립습니다.

1937년 도쿄에서 태어난 소년은 해방 후 열 살 들던 1946년에 귀국합니다. 도쿄에서 8개월, 군마켄에서 8개월, 귀국하여 청송에서 5개월, 1953년 3월 열일곱 살에야 일직국민학교를 졸업합니다. 중학교는 꿈도 못 꾸면서 오스카 와일드 『행복한 왕자』 『이솝 이야기』 『장발장』, 미야자와 겐지의 글을 읽습니다.

「 어린이를 위한 ‘강아지똥’작가
“천한 누구든 귀하게 쓰일 거야”
안동을 지키는 검박한 삶과 글
유산 10억도 어린이들에 남겨

나무장수, 담배장수, 가게 점원 등을 하며 부산 등지를 4년간 떠돌던 소년은 열아홉 살 때부터 늑막염 결핵에 시달립니다. 1957년 스무 살 권정생은 안동으로 돌아와 세 군데에 머뭅니다.

먼저 안동 조탑리 오층석탑에서 코앞에 보이는 일직교회입니다. 1966년 신장결핵 진단받은 그는 부산 성분도병원에서 수술받고, 배에 구멍 뚫고 평생 소변 받는 오줌주머니를 달고 살았어요. 일직교회 종지기로 지낸 그는 평생 조탑리에서 글을 씁니다.

“교회 문간방에 들어가 살게 된 것은 1967년이었다. 서향으로 지어진 예배당 부속건물의 토담집은 겨울엔 춥고 여름엔 더웠다. 외풍이 심해 겨울엔 귀에 동상이 걸렸다가 봄이 되면 낫곤 했다. 그래도 그 조그만 방은 글을 쓸 수 있고 아이들과 자주 만날 수 있는 장소였다.”(‘유랑걸식 끝에 교회 문간방으로’)

이때 쓴 『강아지똥』이 1969년 월간 ‘기독교교육’ 제1회 아동문학상을 받고, 영어·독일어·일본어·중국어·스페인어·베트남어·캄보디아어 등으로 번역됩니다.

“나 같은 더러운 게 어떻게 착하게 살 수 있니?”

콩팥을 떼어내고 ‘오물덩이처럼 뒹굴면서’(첫 글모음집) 살았으니, 이 물음이야말로 자기 고백인 셈이죠. “아니야, 하느님은 쓸데없는 물건은 하나도 만들지 않으셨어. 너는 꼭 무엇인가 귀하게 쓰일 거야.”

들에 핀 백합화든 강아지똥이든 남과 비교해서 스스로 바보로 여기지 말랍니다. 남과 상관없이 우리는 너무도 귀한 존재랍니다.

두 번째는 선생이 살았던 군색한 흙담집입니다. 예배당 문간방에서 16년을 살다가, 1983년 인세 60만원으로 지었대요. 일직교회에서 걸어서 사오 분 걸립니다. 장정이 발 뻗고 눕기도 불편한 작은 방입니다. 이 작은 방에서 다듬은 『몽실언니』 『점득이네』에 나오는 운산리·귀미리·비내미 등은 모두 조탑리 부근 동네들이죠.

인세 1억원, 유산 10억원을 굶주리는 북녘 어린이들이나 가난한 아이들 위해 써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이 흙집을 가벼이 떠나셨죠. 지금도 선생의 인세는 미얀마 메솟 난민 어린이, 팔레스타인 자이투나 나눔학교 등지에 매달 지원되고요.

세 번째 장소는 흙집 바로 뒤에 있는 빌뱅이 언덕입니다. 꽃상여가 많이 올라갔다는, 빌어먹는 이들이 모였을 빌뱅이 언덕이라죠. 선생의 흙집은 본래 빌뱅이 언덕 아래 상엿집 근처였대요. 작은 숲이 있는 여기서 『엄마 까투리』를 썼겠죠. 한 달 생활비 3만원 무소유로 살면서, 죽어서도 수십억 인세를 빈자와 나누는 선생의 뼛가루가 뿌려진 빌뱅이 언덕에 올라 보세요.

‘하늘이 좋아라/ 노을이 좋아라// 해거름 잔솔밭 산허리에/ 기욱이네 송아지 울음소리// 찔레 덩굴에 하얀 꽃도/ 떡갈나무 숲에서 불어오는 바람도// 하늘이 좋아라/ 해 질 녘이면 더욱 좋아라.’(『빌뱅이 언덕』, 1986)

이 언덕에서 선생은 사과나무밭이며 들녘에서 일하는 농부들을 보셨겠죠. 선생을 끝까지 모신 안상학 시인은 말해요.

“빌뱅이 언덕 올라가면 선생의 뼛가루가 더러 남아 있을 거야. 초목이 자라지 않는 곳을 잘 찾아봐. 선생 작품 중에 권하고 싶은 거? 『한티재 하늘』이지.”

『한티재 하늘』(1998)에는 동학농민혁명 이야기가 나옵니다. 동학혁명 이야기라면 지도자나 영웅 이야기가 많으나 『한티재 하늘』은 ‘살구넘어재 넘어 깊은 산에 숨어 살던’ 이름 없는 민초들이 어떻게 고난을 견뎌냈는지 미덥게 주목합니다.

선생의 검박한 글이 아찔한 울림을 주는 까닭은, 글을 몸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밭 한 뙈기/ 돌멩이 하나라도/ 그건 내 것이 아니다/ 온 세상 모두의 것이다’(‘밭 한 뙈기’)라는 공(公)의 사상을 온몸으로 사셨죠.

불교 성지나 로마나 예루살렘 가시려는 분들, 여기 먼저 오셔요. 성지라는 말이 관광지 같아 언짢다면, 밝은터라고 하자요. 폐교에 세운 ‘권정생 동화나라’에 가셔서 꽃 사진도 찍으셔요. 반드시 귀하게 쓰일 님들, 여기서 선생을 만나시고 어디 가시든 성지든 밝은터든 민들레 꽃나라, 날마다 이루시고요.

김응교 시인·숙명여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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