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만의 탑을 쌓아라” 82세 미야자키 하야오의 응원
어둠 속 도쿄에 공습 사이렌이 울리고, 엄마가 입원해 있던 병원에 불이 났다. 화재로 어머니를 잃은 11살 마히토는 아버지와 외가로 내려가지만 7명의 할머니가 돌보는 큰 집에서 마음 둘 곳을 찾지 못한다. 말하는 왜가리를 만난 마히토는 사라진 새엄마 나츠코를 찾으러 금기의 탑으로 모험을 떠난다.
미야자키 하야오(82) 감독이 10년 만에 내놓은 신작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다. 소년의 성장담, 친절한 할머니들, 비밀을 감춘 듯한 숲속의 집, 말하는 새, 다른 세계의 신비로운 생물…. 명감독마다 단골 배우진이 있듯 ‘미야자키 하야오 월드’의 친숙한 얼굴들을 볼 수 있다. 데뷔작 ‘미래소년 코난’(1978)처럼 입 크게 벌려 빵 베어 먹는 마히토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에서처럼 가족을 구하기 위해 터널을 통과하고, 작고 통통한 할머니들의 도움을 받는다. 다른 시공의 소녀 히미는 ‘마녀 배달부 키키’(1989)처럼 낯선 세계에서 스스로 생활을 꾸려 나간다. ‘천공의 성 라퓨타’(1986)와 같이 비행석이 이세계(異世界)의 균형을 유지하고, ‘모노노케 히메’(1997)의 코다마를 연상시키는 귀엽고 경이로운 존재 와라와라가 생명의 경이로움을 보여준다.
‘모노노케 히메’의 “살아라”라는 메시지가 26년 만에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으로 돌아왔다. 강렬한 제목이 노장의 ‘잔소리’ 같다는 인상도 주지만, 원작인 일본의 아동문학가 요시노 겐자부로(1899~1981)의 1937년작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따왔다. 미야자키 감독은 이 책에 대해 “시대가 파국을 향해 가는 것을 예감하면서, 그래도 ‘소년들이여’라는 느낌으로 썼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읽어 보니, 단지 좋은 이야기를 쓰려고 했을 뿐만 아니라 절박한 심정으로 썼다는 것이 전해져 왔습니다”(미야자키 하야오, 『책으로 가는 문』)라고 돌아본 바 있다. 영화는 원작에서 제목과 주요 모티프를 빌렸을 뿐 자전적 오마주다.
실제로 미야자키 감독은 1941년 도쿄에서 태어났지만 공습을 피해 지방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아버지는 가족이 운영하는 비행기 제조회사의 공장장으로 일했다. 감독은 사춘기에 전쟁 책임을 두고 때때로 아버지와 언쟁을 벌였다고 돌아본 바 있다. 미야자키 감독은 작고 약한 데다가 빨리 뛰지도 못해 방에서 독서와 그림 그리기에 열중했던 소년 미야자키의 모습을 마히토에 투영했다.
애니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 전쟁으로 가족을 잃고도 여전히 전쟁 준비를 하는 어른들의 어리석은 세계를 떠나 소년은 다른 시공을 모험한다. 거기서 만난 큰할아버지는 소년을 세상으로 돌려보내며 이렇게 당부한다. “너만의 탑을 쌓아라. 이 세계가 아름다운 세계가 될지 추악한 세계가 될지 전부 네 손에 달려 있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스즈키 도시오(75) 대표는 “큰할아버지는 5년 전 먼저 떠난 다카하다 이사오에 대한 오마주”라고 설명했지만, 노년의 미야자키 감독이 다음 세대 애니메이터들에게, 나아가 젊은 세대들에게 하고 싶은 말로도 들린다. 그는 2011년 동일본 대지진 이후 “지난 20년간 이 나라에서는 경제 얘기만 있었다”며 “바람이 불기 시작한 시대의 입구에 서 있자니 행복한 애니메이션을 만들려 해도 거짓말하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자성의 목소리를 낸 바 있다.
2013년 7월 자전적 이야기 ‘바람이 분다’를 끝으로 미야자키 감독은 더이상 장편 애니메이션을 연출하지 않겠다고 기자회견을 했다.
“지금까지 몇 번이나 그만둔다고 소동을 일으킨 적이 있는 사람이라, 어차피 ‘이번에도 말로만 그러겠지’ 하시겠지만, 이번엔 진짜입니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2017년 은퇴를 철회하고 만든 신작이다. 여전히 하고 싶은 얘기가 남아 있었던 것. 스튜디오 지브리 사상 최대 제작비, 최장 제작 기간으로 알려졌다. ‘신세기 에반게리온’의 혼다 다케시(55)가 20여명의 애니메이터와 함께 오로지 수작업으로 만들었다. 마히토 아버지 목소리에 기무라 타쿠야, 음악에 히사이시 조 등 ‘미야자키 사단’이 출동했다. 두 달 전 일본에서 먼저 개봉했을 때 “산만하다”“메시지가 불분명하다”는 혹평도 있었지만 첫 주 일본 박스오피스 1위를 했고,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국내에서도 개봉일인 25일 오전까지 예매율 68%, 32만명이 영화표를 미리 샀다. 지난 1월 ‘더 퍼스트 슬램덩크’(475만여명), 3월 ‘스즈메의 문단속’(555만여 명)에 이은 또 한 번의 일본 애니메이션 흥행 붐을 예고하고 있다.
권근영 기자 you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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