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희망고문’ 이번엔 끝낼까

배준희 매경이코노미 기자(bjh0413@mk.co.kr) 2023. 10. 25. 2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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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도체 가격 꿈틀…수요보단 감산 덕
재고 감소·수요 회복 따라야 ‘찐반등’

삼성전자가 올 3분기 영업 적자폭을 크게 줄이면서 반도체 업황 반등론이 곳곳에서 제기된다. 메모리 반도체 현물 가격이 바닥을 찍고 소폭 반등하자 고정 거래 가격이 뒤따라 상승할 것이라는 낙관론도 피어오른다. 현물 가격은 기업 간 계약에 따른 ‘고정 거래 가격’과 달리, 소비자가 직접 거래할 때 적용되는 가격이다. 통상 3개월 안팎 시차를 두고 고정 가격과 비슷한 흐름을 보여 대표적인 시장 선행 지표로 꼽힌다. 그러나 반도체 업황이 과거와 같은 ‘V자’ 반등 패턴을 보일지를 두고는 의견이 엇갈린다. 과거 반도체 업황 침체기와 같은 반등 경로를 밟을지 미지수라는 신중론도 팽배하다. 당시에는 메모리 업체 간 감산 공조를 통해 누적된 재고가 감소할 것이라는 기대감만으로도 주가는 실제 업황보다 대략 6개월 선행해 반등하는 패턴을 보였다. 전문가들은 인공지능(AI) 기술 고도화에 따른 HBM(High Bandwidth Memory·고대역폭메모리) 시장 개화 등으로 메모리 반도체 산업 속성이 중앙 집중적 생산 구조에 기반한 범용 비즈니스에서 주문형, 수주형 산업으로 완전히 바뀌고 있다는 진단을 내놓는다. 달라지고 있는 반도체 산업 속성을 짚어보고 반등론을 집중 분석한다.

최근 반도체 반등론에 군불을 땐 재료는 크게 두 가지다. 첫째는 메모리 반도체 가격 상승이다. 블룸버그 등에 따르면 D램(DDR4 8Gb) 현물 가격은 지난 9월 7일 1.39달러로 1년 전 같은 기간보다 49%가량 하락했다 10월 11일 1.49달러로 반등해 최근 4주 연속 상승세다. 낸드플래시(256Gb) 현물 가격은 지난 6월 말부터 9월 말까지 석 달간 0.98달러에서 정체됐으나 10월 12일 1.11달러로 반등했다. 이런 분위기를 타고 대만 시장조사 업체 트렌드포스는 D램 평균판매단가(ASP)가 올 3분기에는 전분기 대비 0~5% 하락했으나 4분기에는 3~8% 상승할 것으로 내다봤다.

삼성전자가 올 3분기 시장 예상을 웃도는 깜짝 실적을 내놓은 것도 반등론에 불을 지폈다. 다만, 단편적인 사실 두 가지만으로 반도체 반등론에 전적으로 힘을 싣기 힘들다는 신중론도 적지 않다.

과거와 달라진 매크로

반등 경로도 변화

무엇보다 최근 불어닥친 반도체 업황 부진은 공급, 수요 등 양 측면 모두 과거와는 결이 구분된다는 게 전문가들 진단이다.

2000년 중반 이후에는 크게 4차례 반도체 업황 부진과 반등 패턴이 나타났다. 2008~2009년(글로벌 금융위기), 2011~2012년(유럽 재정위기), 2015~2016년(유럽과 중국 경기 둔화), 2018~2019년(미중 무역 전쟁 발발) 등으로 구분된다. 세부적으로는 업황 부진을 초래한 요인과 반등 패턴이 조금씩 달랐으나 대체로 제조사 공급 축소 → 재고 수준 정상화 → PC와 스마트폰 교체 수요 증가 → 북미와 중국향 서버 수요 회복 등의 경로를 거쳤다.

그러나 반도체 산업을 둘러싼 작금의 매크로 환경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무엇보다 업황 둔화를 초래한 공급과 수요 측면 요인부터 다르다. 지난해 이후 심화한 반도체 다운사이클의 수요 측면 요인은 칩 메이커의 시황 오판이다. 코로나 팬데믹 국면을 거치면서 칩 메이커들은 재택근무 확대, 경기 부양 등의 요인으로 과거 3~5년간 성장률보다 높은 수준의 전방 수요를 확인하고 반도체 재고를 크게 늘렸다. 그러나 팬데믹 종료와 맞물려 매크로 환경이 급변했다. 고물가에 따른 고강도 긴축이 이어졌고 최근에는 고금리 시대가 장기화할 것이라는 전망에 힘이 실린다. 이 과정에서 성장률 추세를 일시적으로 웃돌았던 IT 수요는 다시 과거 평균 수준으로 회귀했고 수요 거품은 무너졌다. 그 결과, 과거 다운사이클에서 관찰됐던 수준보다 수요 둔화의 골이 깊은 가운데 재고 수준은 역대급인 상황이 초래됐다.

이에 비춰 최근 목격되는 반도체 현물가 반등 등의 요인을 액면 그대로 해석하기에는 무리라는 주장도 제기된다. 반도체 업황이 바닥을 친 것은 맞지만 바닥이 거의 없거나 아주 짧은 V자 패턴보다는 바닥이 길고 회복 기울기가 완만한 ‘나이키’ 패턴으로 전개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주장이다. 시장조사기관 IDC의 김수겸 부사장은 최근 관찰되는 메모리 반도체 가격 상승에 대해 “수요가 증가해서 나타나는 현상이 아니라 공급사에서 가격 하락을 막기 위한 의지가 강해 발생한 현상”이라며 “특히 공급사들은 낸드 가격 하락을 필사적으로 막으려 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반도체 가격이 저점을 찍은 것은 맞지만, 현재까지는 수요보단 공급 측면에서의 감산 효과가 크다는 것이다.

반도체업계 관계자는 “연말 인사를 앞두고 삼성 경영진 내부에서도 생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반도체 감산 강도나 지속 여부 등을 두고 영업 라인에서는 반발도 거센 것으로 알려진다”며 “최근 메모리, 낸드 가격 인상 검토, 램프업(생산량 증가) 등의 이야기가 외부로 나오는 것도 DS사업부 내에서 벌어지고 있는 생존 경쟁의 일환”이라고 귀띔했다.

일정 수준 수요 회복이 뒷받침되지 않는 감산을 지속하는 것은 삼성과 SK하이닉스에도 적잖은 부담이 된다. 막대한 고정비가 깔리는 반도체 산업 특성상 강도 높은 감산에는 단위 원가가 높아지는 부작용이 뒤따른다. 생산량을 줄여도 고정비는 그대로인 만큼, 단위 원가가 높아지는 것이다. 즉, 대규모 감산으로 칩 생산량을 크게 줄여놓은 상황에서는 단위 원가 부담이 커 판매가 상승으로 매출이 다소 증가하더라도 이에 비례해 영업이익 개선으로 이어지기 힘들다는 분석이다. 결국 원가 부담을 떨쳐내고 실질적인 이익 개선으로 이어지려면 감산뿐 아니라 IT 기기와 서버 등 전방 시장 수요 증가도 뒷받침돼야 실질적인 반등으로 진단할 수 있다는 주장이다.

이에 비춰, 재고 감소와 수요 회복이 동반되는 실질적인 반등은 내년 상반기는 돼야 가능할 것이라는 게 다수 전문가 시각이다. 올 4월부터 시작된 삼성의 감산 효과가 시차를 두고 반영되면서 D램 평균판매단가는 상승세를 타겠지만 분기 영업이익이 조 단위로 회복되기까지는 넘어야 할 장애물이 적지 않다는 것이다.

달라진 반등 공식 키워드는

범용 → 커스텀 비즈니스로

반도체 산업을 둘러싼 매크로 환경이 고차방정식으로 변화를 겪으면서 업황 반등을 가늠할 키워드도 달라지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과거와 달라진 반도체 반등 공식의 첫 번째 키워드는 서버 수요다. 2000년 이후 반등 국면에선 PC와 모바일 등 B2C(기업 대 소비자) 교체 수요가 업황 회복을 주도했다면 이제는 B2B(기업 간 거래) 서버 수요가 핵심이라고 전문가들은 입을 모은다.

김수겸 부사장은 “서버 업체들이 투자를 줄이면서 올해 서버 시장은 망가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며 “이르면 2024년 2분기 말부터 서버 수요가 들어올 것으로 보고 있고 메모리 반도체 시장 상승을 이끌 것으로 예상된다”고 진단했다.

두 번째 키워드는 HBM이다.

AI와 HBM 칩 산업의 가파른 성장은 메모리 반도체 산업 속성을 바꿔놓는다. HBM 칩 시장은 주문형, 수주형 산업에 가깝다. 삼성과 SK하이닉스가 지금까지 주력해온 메모리 반도체는 범용 비즈니스에 속한다. 이런 속성의 시장은 자본 집약적, 중앙 집중적 생산 구조가 요구된다. HBM 같은 고부가가치 메모리 칩이나 시스템 반도체, 파운드리 등은 커스텀 비즈니스 영역에 해당한다. 매크로 기반 투자에 강하다는 것과 커스텀 비즈니스에서 두각을 보인다는 것은 전혀 다른 얘기라는 게 반도체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산업 헤게모니가 변화하는 과정에서 조직 자원 분산과 재배치에 기민하게 대응하는 역량에 따라 HBM 시장에서의 성패가 갈릴 것이라는 관측이다.

세 번째 키워드는 후공정 패키징이다. HBM을 비롯한 AI 반도체 산업 성장으로 후공정 프로세스의 기술적 가치가 더욱 주목받는다. 반도체는 크게 웨이퍼를 제조하고 회로를 새기는 전공정, 칩을 패키징하는 후공정으로 나뉜다. 전공정에서 반도체 미세화 공정이 기술적, 사업적 한계에 다다르면서 패키징의 중요성이 점점 더 커진다. 패키징은 반도체 공정에서 생산된 칩을 기판과 연결해 실제 사용할 수 있는 형태로 가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패키징에서 최근 각광받는 기술은 이름도 생소한 ‘칩렛(Chiplet)’과 ‘이종(異種)집적(HI·Heterogeneous Integration)’이다. 칩렛은 독립적으로 생산한 여러 칩을 연결해 블록처럼 조립하는 기술을 말한다. 서로 다른 기능의 반도체 칩을 레고 블록처럼 연결해 고성능 반도체를 생산한다는 점에서 ‘레고 같은 패키지(Lego-like Package)’라고도 불린다. 이종집적은 시스템과 메모리 등 서로 다른 반도체 칩을 하나의 패키지로 구현하는 것을 뜻한다.

특히, 3D 적층은 앞으로 반도체 산업 패러다임을 규정하는 핵심 기술이라는 데 이견이 없다. 시스템과 메모리 반도체를 수평으로 배열하면 2.5D 패키지, 수직으로 쌓는 적층 방식을 쓰면 3D 패키지로 분류된다. 칩을 수직으로 쌓으면 전자 이동 거리가 짧아져 전류의 이동 속도가 개선되고 이는 데이터 처리 속도 향상으로 이어진다. 3D 적층은 CMOS 이미지센서, HBM 등에 적용될 뿐 아니라, 다양한 영역으로 확대 중이다.

그러나 삼성 역시 대만의 TSMC와 비교하면 첨단 패키징 기술이 10년 가까이 뒤처졌다는 게 산업계 진단이다. 현재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HBM을 생산하더라도 부가가치가 집약되는 AI 반도체의 최종 생산은 TSMC가 맡는다. 문제는 대만과 한국의 반도체 후공정 인프라 차이가 워낙 커 단기간에 이를 따라잡기가 매우 힘들다는 데 있다. 글로벌 10대 반도체 후공정(OSAT) 기업 중 국내 기업은 전무하다.

김동원 KB증권 리서치센터장은 “국내 파운드리 산업 경쟁력은 10점 만점에 6점 수준”이라며 “삼성 파운드리는 GAA 기술 기반 3㎚ 공정을 세계 최초로 양산할 만큼 기술 경쟁력은 높지만 파운드리 생산 역량이 TSMC의 3분의 1 수준이며 파운드리 생태계 활용 능력이 TSMC보다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AI용 반도체인 GPU 등을 설계하는 반도체 기업 엔비디아의 고성장으로 세계 반도체 산업의 판도가 바뀌고 있다. 범용 메모리에 편중됐던 우리 반도체 산업도 HBM을 비롯한 신메모리 산업에서 주도권을 쥐기 위해 사활을 건 설비 투자에 나서고 있다. (AP)
요동치는 반도체 지정학 벨트

낸드 시장 과점 구조 재편 촉각

이런 가운데, 세계 반도체 산업의 지정학적 벨트는 요동치는 중이다. 경우에 따라 국내 반도체 산업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칠 수 있는 변수가 산적해 있다.

눈에 띄는 변화는 낸드 시장이다. 최근 일본 키옥시아와 미국 웨스턴디지털(WD)의 합병 가능성이 거론되자 삼성과 SK하이닉스 등은 세계 반도체업계에 미칠 영향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업계와 외신 등에 따르면 WD와 키옥시아홀딩스(옛 도시바메모리)는 경영을 통합하기로 하고 10월 중 합의를 목표로 최종 조율 중이다. 두 업체는 낸드플래시 메모리업계 2·4위로, 시장점유율 합산 시 1위 삼성전자에 필적한다. 규제당국 심사로 합병 전망은 안갯속이지만 합병이 성사될 경우 시장 판도 변화가 불가피하다.

10여개사가 난립 중인 현 낸드 시장이 빅3(삼성전자·SK하이닉스·키옥시아+WD)로 재편된다면 사실상 D램과 같은 과점 구조로 탈바꿈하게 된다. 과점 구조가 자리 잡으면 상위 3사가 수요에 맞춰 생산량을 탄력적으로 조절할 수 있어 이익 방어 측면에선 유리하다는 분석도 나온다. 다만, 키옥시아의 투자자이기도 한 SK하이닉스는 난감한 상황에 처했다. 삼성 등과 낸드 점유율 격차가 아직 크고 미국 자회사 솔리다임 정상화에 애를 먹고 있어 셈법이 복잡한 구도다.

이스라엘-하마스 무력 충돌에 따른 불확실성 확대는 우려 요인으로 지목된다. 한국무역협회가 발간한 ‘이스라엘-하마스 분쟁의 국내 경제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이스라엘 남부 키르야트가트 지역에 위치한 인텔의 CPU(컴퓨터 중앙처리장치) 공장 가동이 중단되면 CPU 수요와 맞물린 메모리 반도체 수요도 둔화될 가능성이 있다.

이승우 유진투자증권 리서치센터장은 “인텔 공장이 가자지구 북동쪽 끝에서 직선 거리로 22㎞ 떨어져 있어 직접적인 영향권이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피해 가능성이 제로라고 단언할 수도 없는 상황”이라며 “생산에 문제가 생긴다면 반도체 섹터는 그대로 식어버릴 가능성이 있다”고 내다봤다. “결국 메모리 업황과 주가는 과거와 같은 V자형 반등을 기대하기 쉽지 않다. 불확실성을 안고 4분기를 보내야 할 가능성이 높다”고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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