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품 가이드 30년… 시내산만 500번 올랐다

김변호,목사 2023. 10. 25.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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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변호 목사의 그리스도人 STORY] 지중해 일대 성지순례 가이드 김화연 권사


그리스도인은 시험이 오면 믿음의 수준이 드러난다. 하나님은 종종 시련으로 그리스도인의 믿음을 시험하신다. 시험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오히려 성숙한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주변엔 많다. 오직 성지순례 가이드만을 고집하며 올해 30년을 맞는 김화연 권사(58·사진·청파동교회)가 그런 사람이다. 김 권사를 거쳐간 성지순례객들만 해도 이스라엘과 소아시아, 유럽 등을 합치면 1만 7000명 정도가 된다. 시내산만 해도 500번 정도 다녀왔다. 지난 12일부터 21일까지 김 권사가 가이드로 참여하는 튀르키예와 그리스 성지순례팀과 함께 동행했다.

신앙이 없었다면 지금의 김 권사 삶은 없었을 것이다. 결혼한 지 4년째 3살 된 아들을 남겨둔 채 남편과 사별하고, 공항에서 도와준 외국인 때문에 인신매매 공범으로 몰려 파키스탄에서 1년 6개월간 감옥 생활을 하기도 했다. 멕시코에서 김 권사를 만나러 오던 사랑하는 사람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는 등 숱한 시련을 겪었지만 모두 이겨내고 영적 스토리를 가진 당당하고 멋진 크리스천으로 살아가고 있다.

김 권사는 20대에 유학을 꿈꿨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해외 유학은 꿈도 꿀 수 없을 때였다. 그러나 TV에서 싱가포르에서 근무할 인재를 모집한다는 국영기업 광고를 접하고 무조건 찾아가 까다로운 서류심사와 신원조회, 영어면접까지 합격하여 1988년부터 싱가포르에서 근무하게 됐다. 이때 신기하게도 주변 사람들은 모두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었다. 동료들은 매주 함께 교회 가자고 했지만, 4년 동안 거절하고 버티다가 1992년에 처음으로 교회에 출석하고 세례까지 받게 됐다.

김 권사에게 1993년도 성지순례 가이드의 길을 걷게 된 계기가 찾아왔다. 인류 문명사와 세계역사, 교회사에 관심이 많아 이집트로 배낭여행을 갔다. 배낭여행 중에 외환은행 이집트 지점에서 만난 여행사 대표의 권유로 성지순례 가이드를 시작하게 됐다.

김화연 권사가 지중해 연안 유적지를 찾은 성지순례단을 대상으로 유적의 역사와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김 권사의 해외 생활은 튀르키예 생활 6개월을 포함, 6개국에서 20년을 생활했다. 남편은 국비 장학생으로 유학와서 이집트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공부할 때 만났다. 남편은 석·박사 공부 중에 무슬림이 됐다. 종교적 갈등이 있었지만 각자의 종교를 존중하기로 합의하고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결혼한 지 4년 만에 남편은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지만 교수로 출강을 앞두고 카이로에서 갑자기 위암으로 쓰러져 가정에 시련이 찾아왔다. 김 권사는 “하나님께서 기적을 보여주셔서 남편을 기독교인으로 만들어 주실 줄 믿었다. 그리고 이번 기회에 남편의 치유를 통해 가족들 모두 하나님께 돌아오게 하실거라고 확신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다르게 갈수록 남편의 병세는 깊어졌고, 급기야는 한국으로 나와 두 번의 수술과 재발을 반복하다가 결국 1년 6개월 만에 3살 아들과 김 권사를 남겨둔 채 하늘나라로 떠났다. 남편은 한국에 나와 수술직후 교회에 데려다 달라고 부탁해 1년 6개월간 믿음 생활을 하다가 기독교 장례로 생을 마감했다. 이때 김 권사의 나이는 서른다섯 살이었다.

남편을 떠나보낸 뒤 생활을 위해 어린 아들을 어머니께 맡기고 쉴새없이 해외를 오가며 가이드 삶을 이어갔다. 남편과 사별 후 6년쯤 됐을 때 사랑하는 사람이 나타났다. 멕시코에서 만난 사업가였다. 국제전화로 사랑을 키워가던 중 멕시코에서 만나기로 약속하고 찾아갔지만 9시간이 지나도 연락도 없이 오지 않았다. 급기야 9시간이 지난 후 영사관에서 “차를 운전하고 오는 중에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연락이 왔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으로 앞이 캄캄한 가운데 보호자가 되어 사고 수습을 한 후 장례식을 치르고 유골을 모시고 한국에 돌아와 가족에게 전달했다. 이 일을 겪은 뒤 재혼에 대한 마음을 접고 앞으로는 어려운 사람들을 섬기며 살기로 마음먹고, 항상 성지순례 중에도 시내산에 갈 때면 가난한 베두인 아동들을 위해서 갖가지 학용품, 연필 등을 모아서 가져가 나눈다.

김 권사에게 또 한번의 인생의 커다란 시련이 찾아왔다. 공항에서 만난 외국인을 도와준 것이 화근이 됐다. 영문도 모른 채 파기스탄 공항에서 붙잡혀 구속돼 감옥에서 3개월을 보냈고, 1년 3개월 동안 오도가도 못한 채 억류됐다. 이유는 인신매매 공범이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극단적인 생각까지 할 수도 있었지만, 김 권사는 “공의로우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고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도하며 견뎠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기약없는 긴 법정 싸움은 죽을 만큼 고통이었다. 얼마나 힘들었던지 감옥 벽을 붙잡고 손톱으로 긁으며 기도했다”고 했다. 판사는 죄를 인정하면 강제추방으로 사건을 마무리할 수 있다고 했다. 판사 앞에서 무릎까지 꿇고 “결코 죄를 짓지 않았다. 어려운 사람을 도와준 거다”라며 애원했지만 받아들이지 않았고 오직 말씀에 의지해 기도 드리며 성경을 필사하고 묵상으로 견뎌내 마침내 무죄를 인정받아 석방됐다.

김 권사의 얼굴엔 어둠이 없다. 늘 밝고 겸손하며 해박한 성경지식과 오랜 경험으로 순례객들을 편안하게 인도했다.

김 권사는 “하나님께 약속드린 게 한가지 있다. 그 어떤 시련과 유혹이 있어도 하나님을 절대 배신하지 않고 천국가는 그날까지 믿음을 지켜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것이다. 안타낍게도 많은 사람들이 성지순례 가이드를 하다가 경제적인 부분 때문에 일반 가이드로 바꾼다. 나 역시 여러번 유혹이 있었지만 성지순례 가이드를 고집하며 30년을 달려왔다”고 고백했다.

튀르키예·그리스=김변호 목사 jonggy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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