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거리외교' 펴다 친명사대세력에 쫓겨난 광해군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역사적 인물 중에 잘못 알려지거나 저평가 된 사람이 적지 않지만 그 중의 하나가 조선조 15대 왕 광해군이다. 그는 조선왕조에서 연산군과 함께 '조(祖)'나 '종(宗)'으로 끝나는 묘호를 끝까지 받지 못하였다. 연산군은 자신의 실정과 패악 때문에 반정으로 쫓겨났지만 광해군은 붕당정치로 반대세력에 밀려났다. <조선왕조실록>에도 그는 노산군·연산군과 같이 '실록'이 아닌 '일기' 즉 <광해군일기>로 실렸다. 죽은 뒤에도 왕의 대접을 받지 못한 것이다.
선조와 후궁 공빈 김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난 광해군의 이름은 이혼(李琿),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피난길에서 세자로 책봉되고, 선조와 함께 의주로 피난을 가다가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분조(分朝)가 결정되어 그 책임자가 되었다. 선조는 의주로 가고 그는 평안도 지역으로 떠났다.
▲ 드라마 <왕의 얼굴>의 광해(서인국 분). |
ⓒ KBS |
선조가 피난에 급급하여 도성을 버린 채 북행을 재촉할 때 그는 왜군의 추적에 맞서 분조의 책임을 다함으로써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이것이 화근이 되었다. 전란이 끝나고 선조는 자신의 무능을 덮고자 국난극복의 일등공헌을 명나라 황제와 그쪽 장수들에게 돌렸다.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크게 공을 세운 의병장들을 도외시한 채, 자신과 함께 의주로 피난했던 신료들을 공신으로 우대하였다. 의병장들이 백성들로부터 환대받는 것이 두려웠던 것이다.
전란기에 명나라의 원군이 큰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뿌리를 찾아보면, 왜군을 조선에서 격파하지 못하면 장차 자국까지 밀려올 것을 우려해서 참전을 하게 된 것이다. 왜군이 조선을 침략할 때 내세운 명분이 허튼 수작이지만 "명을 칠 터이니 길을 비껴달라"는 것이었다. 임진·정유 7년 전쟁기 왜군의 패악이 형언키 어렵지만 명군도 못지않았다. "왜군이 얼래빗이라면 명군은 참빗"이란 말까지 나돌았다.
이성계가 위화도회군을 감행하면서 조선왕조를 창업할 때 내세운 외교정책이 '사대교린'이었다. 비록 중국에 조공하는 처지이지만 왕권의 자율성은 보장되었다. 느슨한 동맹관계였다고 할 것이다. 그러던 사이 선조가 명나라를 '재조지은(再造之恩)'으로 섬기면서 스스로 주종관계를 수립하였다. 숙종은 한 발 더떠서 명나라 황제 신종을 기리는 대보단(大報壇)을 지어 직접 참배하고 참전 명나라 장수들의 사당을 별도로 지었다. '재조지은'은 왕조의 국책사업으로 최우선 순위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뒤 선조의 정실 인목왕후가 영창대군을 낳았다. 권력추종자들의 셈법이 복잡해졌다. 적통장자의 왕위 계승이라는 원칙이 흔들렸다. 그동안 이 원칙이 꼭 지켜진 것도 아니었다. 집권세력인 소북(小北)은 후궁의 몸에서 태어난 광해군을 폐하고 적자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아직 어린 아이였다.
1608년 선조가 죽고 대북(大北)의 지지로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그는 현장에서 전쟁을 겪었고 전국의 곳곳을 살폈기에 누구보다 백성들의 어려운 생활을 잘 알고 있었다. 대동법을 실시하는 등 민생정책을 폈다.
이즈음 대륙의 정세가 크게 변하고 있었다. 만주에서는 여진족이 누르하치를 중심으로 부족을 통합하여 후금을 세우고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남만주 일대에서 후금의 공격을 받은 명나라에서 조선에 지원병을 요청했고, 후금은 사신을 보내어 명나라를 지원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명나라는 기울어가고 후금이 중원을 장악하고 있는 형세였다.
명나라의 요청도 거절하기 어렵고 후금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의 광해군은 도원수 강홍립에게 밀명을 내렸다. 사태를 보아 후금에 투항할 것을 지시한 것이다.
1만 3,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출정한 강홍립은 전투에 패하면서 "조선군의 출병은 명의 강요에 의한 것으로 후금과 싸울 의사가 전혀 없다"고 투항의사를 밝혔다.
광해군은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서 실리외교, 곧 중립외교를 펴면서 임진왜란으로 피폐한 나라를 복구하는 정책을 펼쳤다.
▲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의 한 장면. |
ⓒ 리얼라이즈픽쳐스 |
소북세력은 이참에 광해군을 퇴위시키고자 '가짜뉴스'로 광해군이 부왕 선조를 독살시켰다고 패륜으로 몰아갔다. 이에 맞서 광해군과 대북 측에서는 영창대군과 광해군의 친형인 임해군이 소북 측에 가담했다는 등의 혐의로 사약을 내리고 영창대군의 친모 인목대비를 폐위시키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맞섰다. 이것이 또한 소북세력에게 친족에 대한 패륜무도라는 명분을 주었다.
마침내 광해군 15년(1623년 3월) 이귀(李貴)를 비롯한 서인들이 광해군을 쫓아내고 인조를 추대하는 인조반정이 일어났다. 광해군은 평민으로 강등되어 강화도에 유배되었다가 더 멀리 제주도로 옮겨 현지에서 숨을 거두었다.
대륙의 정세를 내다 본 광해군이 명과 후금 사이에 '등거리 외교'를 통해 국가의 안위를 지키고자 했으나, 사대주의 신봉자들은 '재조지은'의 은혜를 모르는 패륜아로 몰아 쫓아내고, 망해가는 명나라를 추종하다가 5년 후 정묘호란, 14년 후 병자호란의 파국을 겪어야 했다. 외교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교훈으로 읽힌다.
인조반정 다음날 인목대비가 내린 교지는 수구파의 역사인식이 담겼다.
우리나라가 중국을 섬겨온 지 2백여 년이 지났으니 의리에서는 군신의 사이이지만 은혜에서는 부자의 사이와 같았고, 임진년에 나라를 다시 일으켜준 은혜는 영원토록 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선왕께서 40년간 보위에 계시면서 지성으로 중국을 섬기시며 평생에 한 번도 서쪽으로 등을 돌리고 앉으신 적이 없었다. 그런데 광해는 은덕을 저버리고 천자의 명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배반하는 마음을 품고 오랑케와 화친하였다.(<광해군일기>, 1623 계해 3월 14일)
이에 반해 역사학자 이기백의 견해는 전혀 다르다.
여진의 후금이 만주에서 일어나는 새로운 국제정세에 처하여 현명한 외교정책을 써서 국제적인 전란에 빠져들어 가는 것을 피하였다. (중략) 반면에 서인세력은 광해군의 대외적인 관망태도를 버리고 향명배금(向明排金)의 정책을 뚜렷이 하였다.(이기백, <한국사신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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