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랭이꽃과 이성계, 고남산 오르며 떠올린 옛이야기들

이완우 2023. 10. 25. 16: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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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이야기] 가을날 찾은 운봉고원의 백두대간 마루금 고남산

[이완우 기자]

 운봉고원 권포리 석장승
ⓒ 이완우
 
늦가을로 접어드는 10월 하순, 전북 남원시 운봉읍 권포리 마을은 추수를 마친 들녘이 한가로웠다. 이 마을은 지리산 자락의 운봉고원에서 석장승이 가장 많이 서 있는 마을인데 남녀 형상의 석장승 두 쌍이 있다. 마을 입구에 한 쌍이 서 있고, 옛날 운봉현으로 가는 길목으로 추정되는 들판에 한 쌍이 있다. 이들 석장승은 마모가 심하여 얼굴과 형태의 윤곽이 희미한 부분이 많다.
권포리에서 좌측 임산 도로를 타고 2km 백두대간 능선으로 오르면 송신탑 시설이 나온다. 도로라고는 하지만 옛날의 신작로 느낌이 나는 시멘트 포장길이다. 임도의 곡선 길모퉁이에는 안전시설로 세워둔 큼직한 노란 색 시멘트 블록이 줄지어 섰다. 송신탑 옆을 지나서 300m 더 오르면 백두대간 마루금의 고남산(846.5m) 정상에 이른다. 
 
 백두대간 고남산 용담
ⓒ 이완우
 
이 고남산은 지리산으로 향하는 백두대간의 마루금이며, 운공고원을 에워싸는 외륜(外輪)의 서북쪽 산봉우리이다. 이 산은 고려 말(1380년)에 고려의 군대가 준동하던 왜구의 기세를 꺾은 황산대첩의 서막을 연 역사적 장소이다. 이성계 장군은 고남산 서쪽 기슭의 약수터(현재 창덕암)에서 목욕재계하고, 이 산의 정상에서 왜구의 소탕을 기원하는 제사를 하늘에 올렸다고 한다. 

단풍이 아직 물들지 않은 산길에는 용담, 산부추와 패랭이꽃 등 여러 가지 가을꽃이 진하게 피어 있었다. 가을 햇살이 청명한데 맑은 아침의 바람결에 청보라빛 고운 색의 용담꽃이 첫눈에 띈다. 용담은 용담과 여러해살이풀로 산지의 풀밭에 자라며 7cm 크기의 종 모양 자주색 꽃이 핀다.

약초 용담과 귀한 부추가 이곳 저곳에 

용담꽃은 꽃이 많이 달리면, 바람이 불 때 쓰러지면서 억새나 싸리나무에 기댄 모습이 애수를 자아내기도 한다. 토끼나 노루가 이 식물의 뿌리를 캐내어 핥는 것을 보고 약초임을 알았다는 전설도 있다. 이 식물은 뿌리가 쓸개처럼 쓴맛이 나는데, 웅담보다 더 효험이 있는 약초라 하여 용담이라고 불린다고 한다.
 
 백두대간 고남산 산부추
ⓒ 이완우
 
산부추는 수선화과 부추속의 여러해살이풀로 비늘줄기이며 마늘 향이 난다. 산과 들에 야생화가 자취를 감추어 가는 시기에 보랏빛 산부추가 두메산골 변두리의 친근한 모습이다. '봄 부추는 인삼 녹용보다 낫다. 부추 씻은 첫 물은 사위 준다. 사월 부추는 사촌도 안 준다'... 부추와 관련된 속담이 이렇게 많다.
부추는 지역에 따라 솔이나 정구지라는 토속적 이름으로도 불린다. 이곳의 산부추는 이 가을 씨앗을 잘 맺고, 내년 봄에 싱싱한 군락을 이룰 것이다. 
 
 백두대간 고남산 패랭이꽃
ⓒ 이완우
 
패랭이꽃은 석죽과 여러해살이풀로 밝은 분홍색의 꽃이 화려하다. 꽃송이가 여러 개 달린 모습이 청순한 이 꽃은 대나무처럼 마디가 있다. 패랭이꽃을 거꾸로 뒤집어 보면 패랭이 모자와 비슷하다. 조선시대에 신분 낮은 사람들은 대나무를 가늘게 쪼갠 댓개비로 엮은 패랭이 모자를 쓰고 다녔다. 패랭이 모자는 천민, 보부상, 백정과 역졸(심부름꾼)들이 많이 쓰고 다녔다고 한다. 이 패랭이 모자를 역졸은 겉면을 까맣게 칠해서 썼고, 보부상은 목화송이 2개를 달아서 썼다. 

고남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출전한 이성계 장군이 치열한 전투 중에 왜구의 화살에 왼쪽 다리 상처를 입었다. 이때 면화 상인이었던 한 군졸이 면화를 이용하여 응급처치했다. 이성계 장군은 조선 개국 후에 보부상의 패랭이 모자 왼쪽에 목화송이를 달게 하여 보부상이었던 이 군졸의 고마움을 잊지 않았다고 한다.

병자호란 때 인조 임금이 남한산성으로 피난 중에 약간의 상처를 입었는데, 이때도 그 출혈을 보부상인 솜장수의 솜으로 지혈했다고 한다. 인조는 보부상 패랭이의 오른쪽에 목화송이 하나 더 달라고 어명을 내렸다고 알려져 있다.
 
 백두대간 고남산 정상 등산로 바위 산불 조심
ⓒ 이완우
 
고남산 송신탑을 지나서 고남산 정상에 이르렀다. 고남산 정상 부근의 등산로 바위 위에 '불조심'과 '산불 조심' 글귀가 두 곳에 새겨져 있다. 1960년대에 산림청이 생기고, 치산 녹화 사업에 노력하며 산불 통계를 내기 시작했다. 이 산불조심 구호가 새겨진 암각서에서 그 시대의 상황과 산림녹화에 대한 의지를 읽어본다. 

백두대간 마루금의 고남산은 사방으로 조망이 트여서 지리산 천왕봉, 중봉과 제석봉이 삼형제처럼 보인다. 반야봉이 보이며 만복대, 고리봉, 바래봉 과 덕두산으로 이어지는 지리산 서북능선이 늘어서 있다. 북쪽으로 덕유산, 서쪽으로 내장산과 무등산 방향의 조망도 선명하다. 이러한 지형 조건으로 이곳 고남산에는 삼국시대에 축조된 고남산성 흔적이 남아 있고, 봉수대가 있었다고 하며, 고려 말 이성계 장군의 산신제 제단이 있고, 현재는 송신탑과 산불감시초소가 있다. 

이성계가 올라 적군 동태 살핀 곳
 
 백두대간 고남산 남원시 조망 원경
ⓒ 이완우
 
고려말에 이성계 장군은 이곳 산 정상에서 전쟁터가 될 운봉고원과 왜구의 동태를 살폈다. 또한 백두대간과 지리산의 산줄기를 바라보면서, 14세기 중후반의 동북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조망하였을 것이다. 12세기에 몽골 초원에서 웅기한 칭기즈칸의 몽골 세력은 원나라를 세우고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그러나 200여 년이 지나면서 몽골의 원나라가 쇠퇴하기 시작하면서 14세기에는 동북아시아의 국제적 질서가 어지러운 시대였다. 
중국의 남쪽 옛날 남송 지역에서 백련교를 중심으로 한족의 무장봉기가 일어나고, 일본의 무장 해상 세력인 왜구들이 1350년대부터 동아시아 멀리 필리핀, 중국 동부 해안과 고려의 해안과 내륙 깊숙이 침투하였다. 이 왜구들은 일본의 남북조 시대에 일부 지역의 영주들과 관련되어 조직화한 대규모 군대 세력으로 고려는 심각하게 인적 물적 자원을 약탈당하여 피해를 보았다.
 
 백두대간 고남산 지리산 천왕봉 주능선 조망 원경
ⓒ 이완우
 
중국은 1368년에 명이 건국되어 몽골의 원나라를 북으로 밀어냈고, 준동이 극성한 왜구들은 1380년에 500여 척의 함선으로 금강 하구 진포에서 최무선(1325~1395) 화포 전술에 의해 격파당하였다. 이 전투의 패배한 잔당 왜구들은 금강 상류를 거쳐 운봉고원에 진을 치고 있었고, 고려 군대가 왜구를 공격하여 황산 대첩을 이루게 된다. 

이성계 장군은 이 고남산에서 운봉고원을 조망하며 전투를 준비하면서, 지리산 주능선과 백두대간의 산맥처럼 흘러가는 당시 동북아시아의 국제정세 흐름을 읽고 고려의 앞날을 생각했을 것이다.

백두대간 고남산에서 전쟁터의 지형을 읽는 장수의 지혜와 국제적인 역사의 흐름을 읽는 시대적인 안목은 어느 시대나 필요하다. 조선 개국의 설화가 전승되는 운봉고원의 역사적 유적지인 백두대간 고남산을 찾은 산행은, 가을날 소풍 그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백두대간 고남산 정상 표지석
ⓒ 이완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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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터넷 신문 지리산인에도 게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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