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쫓긴 사건 이후... 여기서 그만 둘 수는 없다 [일본정원사 입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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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신준 기자]
하루미씨의 어필로 사부가 일단 레드카드를 거뒀다. 뭔가 찜찜하지만 정원사 수업은 다시 뛸 수 있게 된 것 같다. 단 하루의 쓰라린 경험이었다. 일본의 도제수업 제도라는 것을 다시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
레드카드의 원인은 미궁에 빠질 공산이 크다. 뭔가 오해를 해서 발생한 일이라 해도 사부는 말하지 않고 넘어 갈 테니까. 신뢰를 유보한 채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기로 했다. 관계가 흐트러지고 일상이 달라졌다.
▲ 홀로 각오를 다졌다. |
ⓒ 유신준 |
언제 끝나도 이상하지 않은 관계로 배수진을 쳤다. 그동안 쌓(았다고 믿)은 신뢰는 원점으로 돌아가 버렸다. 이런 삶의 방식이 맘에 안 들지만 이미 일은 벌어져 버렸다. 살다보면 어쩔 수 없는 일도 생기는 법이다.
사부 지시는 어떤 것이든 액면 그대로 따라야 한다? 사부가 무슨 신이야? 제자는 어떤 경우든 입을 닫고 살아야 한다? 시골이라 그런가. 이건 숫제 에도시대다. 이런 도제수업 틀이라면 도시라고 다르랴. 비효율의 극치다.
그러나 어쩌랴. 나는 이미 일본에 와 버렸고, 인연으로 만난 사부가 그런 사람이다. 도제수업이라는 게 그런 거라면 받아들이고 적응할 수밖에. 오랫동안 공들여 준비해 온 일본 정원사 수업을 여기서 그만 둘 수는 없다.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고 처음으로 돌아가 다시 시작해보자. 어젯밤 홀로 각오를 다졌다.
생각을 바꿔보면 여기까지 온 것도 감사한 일이다. 사부가 아니면 드넓은 일본 땅에서 초짜에게 누가 자기 연장을 맡기겠나. 일거리를 나눠서 나를 가르쳐 줄 사람이 누가 있나. 그것만으로도 이번 사태를 내가 수긍해줘야 할 이유로 충분하다. 최대한 사부 마음 살펴가며 다시 시작해 보자.
약속한 오전 7시에 갔다. 어제 하루미씨가 당부한 대로 사과부터 하려니 됐다고 아무 말 하지 말란다. 늘 하던 대로 연장을 경트럭에 싣고 현장으로 향했다. 작업할 곳이 엎어지면 코닿을 거리다. 작업 지시를 받았다. 오늘은 후원 철쭉 둥근 다듬기와 수국 정리다.
비가 내리는 날씨라 라디오까지 놓고 왔다. 평소 같으면 사부 스타일 대로 즐겁게 일하기 위해 내가 좀 떠들어서 밑밥을 깔았을 테지만 오늘은 입이 굳게 닫혔다. 어제 후유증으로 분위기는 무겁게 가라 앉았다.
▲ 언제 끝나도 이상하지 않은 관계로 배수진을 쳤다 |
ⓒ 유신준 |
사부는 어떤 경우든 사과하지 않는 존재라 했으니 혹시 간접사과인가? 이 정도로는 안되지. 감정을 풀려면 원인을 밝히고 제대로 사과를 해야 풀리든지 말든지 하지. 대충 넘어가는 건 어림도 없다.
이 양반 내가 얼마나 뒤끝이 질긴 놈인지 아직 모르시는군. 사람 잘못봤네요. 내가 지금은 어쩔 수 없으니 사부한테 일은 배우겠지만, 어제 당한 수모는 배우는 일이 끝나는 날까지 두고두고 갚아 드릴테니까 기대하시라.
당신께서 마른 하늘에 날벼락을 치신다면 이쪽도 그다지 물렁한 놈이 아니라는 걸 보여줘야 사제 간 구색이 맞을 것 아닌가. 이후 발생할 모든 사태에 대한 책임은 원인 제공자인 사부에게 있음을 밝혀 두겠소. 나는 포커페이스 같은 거 절대 못하는 단순한 인간이다. 얼굴은 굳어지고 입이 굳게 닫혔다.
그렇다 해도 위계가 분명한 사제관계에서 내가 취할 방법은 많지 않다. 물론 일을 태만히 하거나 그러지는 않을 거다. 내가 완성한 일의 품질을 떨어트리는 것은 제자의 우수함에 금이 가는 일이니까. 내 개인적인 명예와도 관련되는 거다. 그건 안되지.
되갚아 줄 방법은 한 가지다. 말을 최소 한도로 줄이는 것이다. 답변은 짧게 하이! 끝. 전에 있었던 밝고 쾌활하며 싹싹했던 제자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즐겁게 일하는 것이 일생일대의 목표인 사부에게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이 될 것인지 생각하면 벌써부터 기대 만빵이다.
물이 오를대로 오른 바리캉 솜씨
철쭉 둥근 다듬기는 어느 정원이든 준비된 일거리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기도 하다. 누구든 좋아하는 일은 잘 할 수밖에 없다. 하고 싶은 마음은 뭐든 잘하게 만드는 밑거름이 되는 거니까. 게다가 경험치를 축적한 내 바리캉은 이미 물이 오를대로 올랐다.
요즘 내 작품을 보면 사부도 항상 엄지 손가락을 내밀며 오케, 오케를 연발했다. 그것조차 시들해져서 이제는 아무 말도 안 하는 수준까지 됐다. 만일 달덩이 두부깎기 종목이 올림픽에 있다면 출전이라도 하고 싶다. 60년 경력 사부가 봐도 어디하나 흠 잡을 데가 없으니까.
▲ 첫번째 할 일은 전체 둥치를 확인하면서 죽은 가지들을 잘라내는 일이다 |
ⓒ 유신준 |
장마가 끝나면 수국도 끝난다. 꽃이 지면 수국 전정을 해줘야 한다. 이곳 정원에서 오늘 처음 수국을 만났고 사부에게 수국 전지법을 전수받았다. 한국에서 유튜브 동영상같은 걸 보면 누구는 바닥까지 싹 잘라라. 누구는 얼만큼 아껴라 의견이 분분했다. 그래서 사부 방식이 궁금했었다.
오늘 60년 경력의 쿠마우에류 수국 전지법을 소개한다. 자르는 시기는 꽃진 후 바로다. 이건 모든 화목류에 공통으로 해당하는 원칙이기도 하다. 꽃눈이 생기기 전 잘라줘야 내년에 또 꽃이 필테니까.
첫 번째 할 일은 전체 둥치를 확인하면서 죽은 가지들을 잘라내는 일이다. 다음은 남은 줄기 중 올해 자란 새순의 첫 번째 잎 바로 윗 마디를 잘라낸다. 다음은 외곽의 아래쪽으로 늘어진 가지들을 돌아가며 정리해준다. 그러면 대충 깔끔해진다.
다음은 너무 무성한 곳이 있나 확인하면서 아끼지 말고 솎아준다. 솎아주면 통풍이 좋아지고 햇볕을 고르게 받아 수국이 건강해진다. 게다가 수국 무더기가 전체적으로 가볍고 시원해 보이기까지 하니 일석이조다. 여기까지 하면 어느 정도 단정하게 정리될 것이다.
▲ 멀리서 살펴 고저를 확인하면서 전체 모습을 둥그렇고 매끈하게 다듬어 준다 |
ⓒ 유신준 |
수국은 어느 시점까지 꽃봉오리가 계속 올라오는 경우가 많다. 올라오는 꽃이 아깝거든 꽃이 진 줄기만 먼저 제거하는 것도 방법이다. 아무리 개화가 늦은 품종이라도 8월 상순이 마지노선이다. 개화가 빠른 품종은 물론 더 일러야 한다. 수국이 내년을 준비할 시간을 충분히 줘야 하는 거다.
이제 말 놓겠다는 사부
작업이 끝나고 사부가 다음 작업 일정을 확인해준다. 병원 예약이나 골프 모임을 빼고는 귀국 전날까지 작업 일정이 꽉 잡혀 있다. 언제 어떤 일이 또 발생할지 모르지만 당분간은 함께 가겠다는 거네.
그리고는 앞으로 요비스떼(편한 말) 하겠단다. 그동안 사부는 존대와 하대를 오락가락 했다. 내가 뭔가 좀 어려웠던 건가. 요비스떼 선언은 서양에서라면 '존이라 불러 주세요' 같은 거다. 짧게 줄여 친근한 표현을 쓰게 되는 것이니 한층 가까워진 관계를 암시한다.
지금까지는 내 호칭은 '유'였다. 성이 유이기도 하려니와 영어로 너라는 뜻도 있으니 겸사 겸사 사부는 그렇게 불렀다. 앞으로 전과 다른 날들이 펼쳐진다는 신호다. 어제의 불상사만 없었더라면 얼마나 경하스런 일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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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내 블로그 (https://blog.naver.com/lazybee1)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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