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시력 화가의 전시를 보다가 내가 부끄러워진 이유

김규영 2023. 10. 25. 15: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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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귀화 개인전 <나무 - 꿈을 꾸다> ... 오는 29일까지 전북 군산에서

[김규영 기자]

커다란 원 위에 나무가 자라고 있다. 첫 그림의 원은 규칙적인 문양이 배열되어 있어 만다라가 연상된다. 그 위에 뻗어 자라난 나무는 꽃도 잎도 없는 나목이다. 벌거벗은 자신의 몸을 숨김없이 드러내고 스스로를 직면하는 만다라의 나무는 구도자의 형상이다. 화가 문귀화는 무엇을 향한 길을 찾고 있을까.
 
▲ 문귀화 개인전 <나무-꿈을 꾸다> 전시장
ⓒ 김규영
  
전시 <문귀화 개인전 : 나무 - 꿈을 꾸다>, 화가의 작업 노트는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시각장애인이다.
아주 어릴 적부터 안과를 내 집 드나들 듯했고, 인생의 에너지 대부분을 눈을 관리하는 데 탕진하다시피 했는데도 결국 삼십 대 중반에 한쪽 눈의 시력을 잃었다.
 
그래서 두 눈을 뜨고 있어도 눈앞에 빛과 어둠이 공존한다. 왼쪽 눈을 가리면 눈앞에는 오로지 캄캄한 어둠뿐이다."
 
자신의 눈에 만다라를 그려 넣은 문귀화 화가는 이번 전시에서 자신의 '시각장애' 정체성을 정면으로 마주하고 있다. 원은 빛을 받아들일 수 있는 왼쪽 눈이자. 어둠을 직시하는 오른쪽 눈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자, 자신을 들여다보는 눈이다. 확신 없는 의사들의 진료와 추측의 대상이었던 화가의 시신경은 단단한 나무로 자라난다. 가지를 뻗어 위로, 뿌리를 뻗어 아래로 자라난다.
끝마다 잘린 가지들, 그래도 뻗어나가는 
 
▲ 문귀화 개인전 <나무 - 꿈을 꾸다> 전시 작품
ⓒ 김규영
 
나를 사로잡은 나무는 곧게 허리를 펴고 사방으로 가지를 뻗었지만, 그 줄기에는 잘린 흔적이 여럿 남아 있다. 성장에 도움 되라고 했든지, 교통에 방해되어 그랬든지, 누군가의 손에 의해 굵은 가지들이 여러 번 잘렸다. 그에 굴하지 않고 나무는 곧게 일어나 다시 가지를 뻗어간다. 나의 삶을 살아간다.

나무 아래에는 여자가 앉아 있다. 여자의 보랏빛 그림자는 푸른 지구와 같은 눈의 세계에 흘러넘친다. 검은 눈물이 얼룩진다. 세상을 향한 열망이 태양처럼 이글거리는 뜨거운 눈을 '그림자 눈물'이 덮어 흐른다. 불꽃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치열하게 타오를 것이다. 뿌리 같은 그림자와 눈물은 바닥에 잔잔하게 고인다.

정화된 물은 위로 곧게 뻗은 나무에 흡수되어 잎으로, 봄으로, 빛으로 피어날 것이다. 나무 아래의 여자는 등 지고 앉은 모습으로 모든 것을 보고 있다. 격한 감정들이 눈의 세계, 원의 세계, 지구의 세계에서 요동치고 있지만, 그는 가만히 앉아 자신을 다스리고 있다.

 
▲ 문귀화 개인전 <나무 - 꿈을 꾸다> 자수 작품
ⓒ 김규영
   
▲ 문귀화 개인전 <나무 - 꿈을 꾸다> 자수 작품
ⓒ 김규영
 

전시장에는 자수 작품도 걸려 있다. 저시력 장애인이 손으로 만져볼 수 있도록 제작했다. 크기와 문양이 달라도 원과 나무의 형태는 동일하다. 팜플렛도 저시력인이 읽기 쉽도록 큰 활자와 고대비 배경으로 제작했다. 이번 전시는 문체부와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의 후원을 받은 2023년 장애예술활성화 지원사업의 일환이다.

몇 년 전 문귀화 화가와 인사를 나눈 곳은 '미술공감채움'의 스튜디오였다. 소수자 지역네트워크의 공간이자 문화예술공간인 미술공감채움은 십 년 넘게 발달장애인, 여성, 노인 등 소수자와 함께하는 예술활동 프로그램을 이어오고 있다. '미술공감 채움'의 대표 고보연 작가는 내게 문귀화 화가를 목사님이기도 한 특별한 분이라고 소개했다. 시각장애는 그의 핵심 정체성이었지만, 모두가 공유해야 할 정보도 아니었다.

 
▲ 문턱을 넘어 너와 나 "우리" 제5회 장애인 비장애인 사생대회 -미술공감채움
ⓒ 고보연
 

미술공감채움은 장애인과 비장애인의 만남과 협력의 자리를 꾸준히 펼쳐오고 있다. 제5회 장애인, 비장애 사생대회 <문턱을 넘어 너와 나 "우리">를 지난 10월 초 개최했고 성공적으로 마무리했다.

고보연 작가는 시력을 잃어가는 문귀화 화가에게 이번 전시가 어떤 의미인지 글로 담아 전시장에 걸었다. 절절하게 적어 내려간 글이므로 함부로 가져오지는 말아야겠으나, 기록을 위해 끝부분만 옮겨 온다.
 
"우리는 올해 바쁨 속에서도 시간을 정하여 보고 싶던 책 한 권을 전화로 읽어내려가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나 또한 그 시간 속에서 그녀를 포함한 시각장애예술인을 생각하게 되었고, 장애 예술의 방향 제시와 더불어 배려와 깊이, 장애인-비장애인 협업을 다시 한번 소중히 느꼈다.
 
미술에 동지가 있다면 어떤 걸까? 그녀가 끝까지 그리도록, 그리고 손끝의 느낌으로도 그릴 수 있도록 함께하는 것이리라 믿는다. 그녀가 염려하듯 눈으로 보는 세상만큼 마음의 세상이 좁아지지 않도록, 마음을 모아 본다."                                                                                       

장애와 비장애라는 우스운 구분 
이번 문귀화 개인전 <나무 - 꿈을 꾸다>의 전시장에 머물다 보면, 장애와 비장애라는 구분이 우스워진다. 장애인을 '소수자'로 몰아넣는 폭력에 잔인함을 느끼게 된다. 안과를 전전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는 화가의 작업 노트를 읽다 보면, 나의 무관심과 무지가 이들이 마주하는 무례한 현실에 일조했던 것 같아 부끄러워진다. 차마 한 번에 다 읽어 내릴 수 없어서 도망치듯 전시장을 빠져나왔다.
 
▲ 문귀화 개인전 <나무 - 꿈을 꾸다> 전시 작품. 홍보자료물 뒷표지
ⓒ 문귀화
 
곧 다시 전시장으로 갈 것이다. 고통스러웠던 그의 시신경이 아름다운 뿌리와 가지로 뻗은 그림을 다시 만나러 갈 것이다. 전시는 이번 주 일요일까지니, 서둘러야겠다.

<문귀화 개인전 : 나무 - 꿈을 꾸다>
기간_ 2023년 10월 24일(화)~29일(일)
장소_ 전북 군산시 번영로 2 예깊미술관(팔마예술공간)
후원_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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