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 폭력에 시달린 아내, 결국 이런 선택을 했다

김성호 2023. 10. 25. 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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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호의 씨네만세 571] 제25회 BIAF 단편C

[김성호 기자]

 
▲ 콜드 수프 스틸컷
ⓒ BIAF
 
인생을 말하는데 필요한 시간이 얼마일까. 제25회 부천애니메이션페스티벌 단편 국제경쟁 섹션 C묶음으로 소개된 <콜드 수프 Cold Soup>는 10분이면 충분하다고 답하는 작품이다. 신변잡기를 떠들기도 부족한 10분의 시간으로 한 사람의 생애를 이야기하는 그 버거운 과제를 이 짧은 애니가 해내는 것이다.

영화는 한 남자의 아내로 평생을 산 여자의 이야기다. 어여쁜 그림체로 그려진 집과 가구들, 식기를 비롯한 온갖 물건과 달리 이 애니 속 사람은 검은 선으로 경계 지어진 하얀 여백으로 표현된다. 영화에 등장하는 인물은 모두 넷, 대부분은 남편과 아내다.

남편은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고 신문을 본다. 집 밖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이따금 제 성이 풀리지 않는 일이 생기면 아내를 때린다. 아내는 결혼 이후 아주 오랫동안 남편을 두려워했다. 자주 맞으면서도 남편이 자식들에게는 손을 대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건너 자식들을 결혼시키고, 막내 아들까지 결혼해 가정을 꾸리고서야 제 삶을 돌아본다.

여자는 아들과 며느리의 도움을 받아 교외에 집을 구하고, 그곳으로 가구며 집기를 하나씩 옮기기 시작한다. 그 많은 물건이 사라지는 동안 남편은 오로지 병 하나의 빈자리만 눈치 챘을 뿐이다. 아내는 제가 병을 깨뜨렸다고 둘러대고 남편은 그 부주의함에 손찌검으로 대응한다. 그리고 마침내 아내는 남편을 영영 떠나버린다.

짧고 건조한 10분 남짓의 애니메이션을 통하여 관객은 영화 속 한 여자의 생애를, 그녀가 대표하는 매 맞는 여성들의 삶을, 국경을 넘어 공유되는 착취와 지배의 치졸한 역사를 생각하게 된다. 포르투갈 작가 마르타 몬테이루는 가정폭력 피해자의 담담하지만 짓눌린 목소리로 이 같은 비극을 그림 위에 재현한다. 선으로 그려질 뿐 색채도 내실도 갖지 못한 인간의 형체가 지켜보는 이를 눈물겹게 한다.
 
▲ 수확의 법칙 스틸컷
ⓒ BIAF
 
1100만명 대학살 비극 다룬 애니메이션

야나 우그레헬리제의 <수확의 법칙 Five Spikelets Law>도 인상적인 작품이다. 소련 최고 의회가 통과시킨 집단농장 재산침해를 다룬 법률 제정으로부터 우크라이나 민중이 기아를 겪는 과정을 참담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이는 역사적 사건을 재현한 것으로, 스탈린 소련이 우크라이나에서 자행한 홀로도모르(Holodomor)를 다뤘다.

홀로도모르는 일명 우크라이나 대학살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우크라이나 공화국에서 1100만 명이 굶어죽은 재난으로,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 전역의 곡식이 소련으로 반출되고 우크라이나 국경을 폐쇄하여 수많은 피해를 발생시킨 인위적 재난으로 평가된다. 극심한 피해에도 나치에 의해 자행된 유태인 학살에 비해 세계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단 점에서 충격을 더한다. 국제사회에서 이를 공식 인정한 것 역시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였고, 여전히 러시아 학자들은 그 피해를 축소하는 형편이다.

우그레헬리제는 이 작품을 통하여 홀로도모르가 평범한 우크라이나 농가에 어떤 비극을 일으켰는지를 조명한다. 법치의 미명 아래 스탈린 치하 소련이 행한 폭력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며, 그것이 짓밟은 인간성을 가슴 아프게 구현한다. 러우 전쟁이 지속되는 현실 가운데 이들이 겪어온 지난 역사를 되짚어보는 작업은 유효하다. 역사와 별개로 존재할 수 있는 현실이란 없다. 홀로코스트에 대한 이해 없이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문제를 바라볼 수 없듯, 홀로도모르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만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사이의 뿌리 깊은 갈등을 해소할 여지를 찾을 수 있는 것이다.
 
▲ 열대의 눈 스틸컷
ⓒ BIAF
 
대만 종이제작 기술로 독특한 영상 구현

단편C 섹션의 또 다른 작품 <열대의 눈 Compound Eyes of Tropical>은 기술적 측면에서 관객의 눈을 사로잡을 만하다. 대만작가 장 쉬잔이 제작한 이 애니는 대만 전통 종이제작 기술을 활용해 완성한 인형을 등장시켜 동남아 전통설화를 영화화한 작품이다. 클레이 애니 등에서 흔히 쓰이는 피사체를 멈춘 뛰 찍은 프레임을 이어 붙여서 만든 이른바 스톱모션 애니라 하겠다.

기본적인 얼개는 '강을 건너는 아기 사슴'이라는 동남아 일대 설화를 재해석해, 사슴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악어로 가득한 강을 건너는 이야기다. 등장하는 동물은 파리와 악어, 사슴이다. 호숫가에서 물을 마시는 사슴이 있고, 이를 잡아채려는 악어와 파리들의 시선을 오가면서 관객은 다층적인 관점으로 사건을 바라보게 된다.

특히 주인공 격인 사슴의 시점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를 낚아채려는 악어의 시선 등을 오가는 점은 적잖이 흥미롭다. 악어의 시선이 등장하는 순간 관객은 비슷한 류의 작품에서 피해자인 사슴의 시선으로만 장면들을 보아왔음을 실감하게 된다. 사슴을 잡아채지 않으면 허탕을 치는 악어의 시선으로 긴장감 있는 장면을 지켜보는 건 애니를 대하는 색다른 재미가 되어주기 충분하다.

또 하나 흥미로운 건 이야기 자체보다 정교하게 만들어져 움직이는 종이 인형이다. 동물의 특징을 세밀하게 표현한 종이인형의 질감이 그려서 만든 애니와는 전혀 다른 인상을 만들어낸다. 사슴이 악어의 머리를 밟아가며 강을 건너는 순간의 경쾌함은 이 종이인형의 생김과 절묘하게 어우러져서 대만 애니의 매력을 한껏 느낄 수 있다.
 
▲ 제25회 부천애니메이션페스티벌 포스터
ⓒ BIAF
 
BIAF, 전 세계 애니메이션과의 만남 이뤄내

마지막으로 미국 애니메이터 마샤 엘스워스의 <리틀 티 Little t>도 인상적이다. 원하는 직장에 들어갈 기회를 잡은 알렉시스의 마지막 면접자리를 다룬 작품으로, 어려움을 딛고 꿈에 다가서려는 주인공의 모습이 진취적인 감정을 안긴다. 제 한계를 넘어 성장하는 소녀의 이야기로 이해할 수 있는 작품으로, 트라우마에 맞서 싸우는 모든 이들이 공감할 법한 소재를 다룬다.

올해로 스물다섯 해를 맞은 부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은 축제라는 이름에 걸맞게 애니를 애호하는 세계 각지의 이들이 찾아 즐기는 행사가 되었다. 각 나라 애니가 취하는 경향성을 한 자리에서 만나고, 그들이 천착하는 주제를 나누는 이러한 국제행사가 한국에서 매년 꾸준히 열리고 있다는 점은 놀랍기까지 하다.

한때 무시되고 시간을 헛되이 쓰는 아이들이나 보는 것으로 금기시되기까지 했던 만화다. 그랬던 만화가 도시의 주된 문화가 되고, 세계의 작품들을 불러 모아 축제까지 이루니 격세지감이란 말이 무슨 뜻인지를 알도록 한다. 페스티벌의 남은 과제는 애니를 애호하는 이들의 층을 지금보다 넓혀 주류 문화로 편입하고, 시민들과 함께 박동하는 진정한 의미의 축제로 만들어가는 것일 테다.

이미 주류의 반열에 접어든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와 함께 BIAF가 문화도시 부천의 양대 영화제로 자리매김하는 날이 오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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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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