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정의 생활의 발견] 다음 산은 휴대전화 놓고 가기
2박 3일 일정으로 하루 한 지역 한 산 둘레를 걷고 있다. “초록이 지쳐 단풍 드는데”라고 누가 시로 읊지 않아도 물든다는 건, 아침저녁 빛의 스밈이나 옮음이나 번짐이라는 건, 비단 나무만의 사정은 아니리라. 그러니 가을 타느라 네 얼굴이 그렇게 붉은 거냐 쉽게들 묻지 마시라. 이 홍조는 갱년기의 대표적인 증상이니 말이다.
올라가고 내려옴에 특별한 목적을 두고 행한 걸음이 아니니 나는 이번 산행을 등산이라 말하지 않고 산보라 발음하고 있다. ‘산뽀’라 할 적에 절로 오므라드는 입의 뽀뽀 자세가 제법 귀여워서 나는 그 단어를 ‘소풍’처럼 아껴 써오고는 하였는데 무슨 호기심이 일었는지 가을 가뭄에 바싹 마른 혀처럼 납작 엎드려 있던 동학사 계곡 바위 앞에 느닷없이 내가 우뚝 멈춰 서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차례로 두 단어를 휴대전화 속 국어사전에 넣어보는 것이었다.
‘휴식을 취하거나 건강을 위해서 천천히 걷는 일’이 산보라 할 적에 ‘휴식을 취하기 위해서 야외에 나갔다 오는 일’이 소풍이라 할 적에 이 둘 사이의 공통분모 ‘휴식’을 본능적으로 간파해버린 내 몸, 그 몸의 적확해서 더더욱 예민했을 목소리에 나는 왜 그토록 무심했는지 엄마도 실은 그렇게 여성의 나이듦을 홀로 통과했겠지. 공부할수록 깨닫는 머리와 달리 의지할수록 포개지는 마음과 달리 솔직할수록 피해일까 하여 몸의 온갖 항변에도 죽는소리 까먹고 우는소리 잊었던 엄마. 몸의 엄살을 몰라야 엄마가 되고 몸으로 엄포를 못 놓아야 엄마가 되나.
형형색색 저 꼴린 대로 물드는 가을 나무의 자유분방함을 뒤로한 채 등산 스틱으로 탁탁 땅을 짚어가며 산에서 내려오는 엄마들을 보았다. 다 지고 없는 꽃자리를 그들의 웃음이 채운 가운데 어디 꽃무늬로 휘감긴 알록달록한 지팡이 파는 데 없느냐던 엄마의 말이 떠올랐다. “엄마에게 휴식이란 뭘까?” “기다리는 죽음이지.” 산에서 지나친 휴대전화 사용은 이래서 금물인가보다.
김민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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