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열며] 슬픔도 여의도에 오면 정쟁이 된다
국가의 무능과 전 국민의 슬픔도 여의도에 오면 정쟁에 파묻힐 때가 많다. 1년 전 이태원 참사도 그랬다. 사고 직후 국민의힘은 여야와 정부,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이태원 사고 조사특위’를 제안했지만, 더불어민주당은 단 이틀 만에 거부했다. “윤석열 정부의 총체적 무능으로 인한 인재(人災)이니 정부에 ‘셀프 조사’를 맡길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야3당은 대신 국회 국정조사를 추진했다. 이번엔 국민의힘이 예산안 협상과 연동하며 차일피일 참석을 미뤘다.
가까스로 열린 국정조사에서 새롭게 밝혀진 사실은 거의 없었다. 각 기관은 수사 중이란 이유로 자료 제출에 소극적이었다. 국회에 출석한 기관장들은 책임 떠넘기기로 일관했다. 여야는 국정조사 직전 이상민 행정안전부 장관 해임건의안과 신현영 민주당 의원의 닥터카 논란으로 기싸움을 벌이더니, 보고서 합의조차 이루지 못했다. 오죽하면 유가족이 국회의원들을 향해 “진상규명은 정쟁의 대상이 아니다”라고 호소했을까.
이후의 상황도 덜하지 않았다. 민주당은 이상민 장관 탄핵소추안을 밀어붙이더니, ‘헌법재판관 만장일치 기각’이란 면죄부를 남겼다. 정치적으로 책임 지워야 할 일을 거대 의석수에 취해 사법기관에 넘긴 결과다. 정쟁의 쳇바퀴가 굴러가는 동안 국민의힘도 과감해졌다. 여당은 야3당이 패스트트랙에 올린 ‘10·29 이태원참사 피해자 권리보장과 진상규명 및 재발방지를 위한 특별법안’(이태원 참사 특별법)을 “수사 결과부터 봐야 한다”며 철저히 외면했다.
그 결과 이태원 참사 특별법은 여당 의원들이 불참한 채 조문 심사가 이뤄졌고, 제대로 된 이견 조율은 한 차례도 없었다. 이대로라면 본회의로 넘어가는 12월, 야당이 단독 처리하고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했던 양곡관리법·간호법의 선례를 따를 가능성이 높다. 용산 대통령실의 눈치만 보는 무능 여당과 “대통령이 거부하면 이득”이란 얄팍한 셈법에 빠진 거대 야당이 도출해 온 최대공약수가 지금껏 그 정도였다.
다행히 최근 정치권에선 변화가 감지된다. 여야 원내대표는 24일 “본회의장과 상임위 회의장에 손피켓을 들고 가지 않기로 했다”고 입을 모았다. 본회의장에서 내지르던 고성·야유도 중단하기로 했다. 총선 6개월 전 으레 있는 이벤트거나 31일 대통령 시정연설을 무난히 넘기려는 셈법이겠지만, 아무튼 긍정적이다. 유의동 국민의힘 정책위의장은 10·29 이태원 참사 1주기 추모행사에 참석하기로 했고, 다른 여당 지도부도 검토 중이라고 한다. 여야가 나란히 희생자를 추모하고, 오로지 진상규명·재발방지를 위한 이태원 참사 특별법 심사를 재개하길 기대한다.
오현석 정치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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