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선지가 아니라 공간에 산수를 그리는 사람이고 싶었다”
공간 속에 산수화를 펼쳐 놓았다. 중견 작가 강서경(46)의 개인전 ‘강서경: 버들 꾀꼬리’가 열리고 있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 리움미술관 전시장 초입에서 바라본 풍경이 딱 그랬다. 초기 대표작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발전된 작품까지 130여점이 로비와 기획전시실 1, 2층을 가득 채운 대규모 전시다. 하지만 높아야 어른 허리 혹은 어깨 높이 설치 작품들이 ‘정답게’ 설치되어 있는 공간 사이를 거닐다보면 마치 한국 특유의 나지막한 동산을 산책하는 기분이 들었다.
암 투병 중인데도 시간을 내 국민일보 인터뷰에 응한 작가를 지난 10일 리움미술관에서 만났다. 항암제 탓에 숱많은 검은 곱슬머리가 하얗게 셌지만, 오랜만의 외출이 즐거운지 작가는 시종 유쾌한 표정으로 삶과 예술세계에 대해 이야기했다. 리움미술관이 개관 20년간 한국 생존 작가의 개인전을 연 것은 서도호, 양혜규, 김범에 이어 네 번째다.
그만큼 국제 미술계에서 중량감이 있는 강 작가의 작품을 2018년 스위스 아트바젤에서 발로아즈 예술상을 받은 ‘그랜마더 타워’로 처음 대했다. 작가의 할머니가 쇠약해져 점점 꾸부정해지는 모습을 표현한 것인데, 둥근 접시 건조대 여러 개를 실로 묶고 쌓아서 기울게 하고 바퀴를 달아 ‘뼈만 앙상한 몸이지만 여전히 고운’ 할머니를 연민과 애정을 담아 의인화했다. 기울어져 있지만 실의 마찰력 덕분에 간신히 지탱이 되는 구조다. 그 작품을 보고 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화여대에서 동양화과를 나왔고 영국 왕립예술대학교에서도 회화를 전공했다.
“예고 다니며 먹 냄새에 매료돼 동양화를 전공하게 됐다. 어렸을 때부터 질문이 많았다. 산수화를 그리면서도 산수화를 그리는 당시 작가의 마음은 어떠했는지가 더 궁금했다. 내게 동양화는 낙관이 있고, 시가 쓰여 있어 화가가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공간으로 해석됐다. 학부 때는 드로잉을 영상으로, 입체로 바꾸는 등 다양한 시도를 했다. 나는 화선지가 아니라 공간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랜드마더 타워는 결혼한 뒤 남편에게 사전 양해도 구하지 않고 ‘통보’하듯이 떠난 유학 중에 탄생했다. 그렇게 미술 앞에서는 당찬 여성 작가였다.
전시는 ‘정(井)’ ‘자리’ ‘둥근 유랑’ ‘좁은 초원’ 등 기존 연작부터 ‘산’ ‘귀’ ‘아워스’ ‘바닥’ 등 신작까지 총출동했다. 출세작인 정(井) 연작은 조선시대 악보인 정간보의 우물 정(井)자 모양의 사각 틀에서 착안한 것으로 영국 유학에서 돌아온 몇 년 뒤인 2015년 대안공간 ‘시청각’에서 처음 선보였다. 세종이 창안한 정간보는 1행 32간(間)을 ‘우물 정(井)’자 모양으로 칸을 질러놓고, 한 칸을 1박으로 쳐서 음의 시가를 표시하고 그 정간(井間) 속에 음의 고저를 표시했다. 동양적 시공간의 개념을 담고 있지만 서울에 왔다가 이 전시를 본 파리의 큐레이터는 서구 모더니즘의 ‘그리드(격자)’와의 유사성에 매료돼 파리의 한 대안공간에서 전시를 열어줬다. 스웨덴 출신 큐레이터 마리아 린드가 파리에서 전시를 본 뒤 이듬해 자신이 감독을 많은 광주비엔날레에 초대됐고 이것이 미국 필라델피아미술관 전시, 미국 출신 랄프 루고프가 감독을 맡은 베니스비엔날레 본전시 등 국제 무대로 이어지는 인연이 됐다.
강 작가는 “미술이 제일 재밌는 사람”이라고 했다. 작업실에 틀어박혀 사는 바람에 마리아 린드가 누군지, 랄프 루고프가 누군지도 몰랐다지만, 세계적인 큐레이터들은 낭중지추 같은 강서경을 찾아냈다. 서촌의 작업실 찾아온 루고프 감독은 강 작가에게 “당신은 공간에 회화를 하고 있군요”라고 단박에 말했다고.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가 좋아서 인왕산이 보이는 서촌에 마련한 작업실이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이 작업 세계의 비결 같았다. 필라델피아미술관에서 처음 선보인 ‘자리’ 연작은 ‘정’ 연작을 하다 춘앵무를 알게 된 것이 가지를 쳤다. 춘앵무는 조선시대 궁중 대잔치 때 화문석(강화도 돗자리) 하나만 깔고 한 사람이 추는 춤이다. 작가는 한 개인의 무대가 되는 그 돗자리에 무늬를 짜 넣어 천장에서 늘어뜨리기도 하고, 그걸 추상화해 설치작품처럼 세우기도 했다. 그래서 모두를 위한 무대로 확장시켰다.
이번 전시에서 공간에 펼쳐놓은 산수화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그의 작품세계에 곡선이 등장한 효과가 크다. 아예 ‘U’자를 거꾸로 한 신작 ‘산’ 연작도 등장했지만 ‘정(井)’ 연작, ‘자리’ 연작의 모서리에 곡선이 둘러쳐졌다.
곡선이 등장한 것은 투병 이후의 일이다. 코로나 시기였다. 미술만을 위해 살다 40대 초반에 엄마가 됐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이지만, 작업과 육아를 병행하는 것은 예술가 엄마에게 힘에 부치는 일이었던 거 같다. 작가는 “출산과 암 투병이 겹쳐지면서 예전엔 거대한 추상의 덩어리로 느껴졌던 산이 어느 순간 제 옆에 살포시 다가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사계절을 모티브로 만든 신작 ‘산’ 연작은 높이가 160㎝를 넘지 않는 이유다. 세상사에 누그러지며 격자는 곡선이 됐다.
강서경의 작품은 모두가 거대하지 않다. 이 스펙터클의 시대에 그는 꾸부정한 할머니 키 만한 작품으로 세상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혼자 감당할 수 있는 크기를 선호했다. 감당할 수 있도록 작은 유닛(단위)을 합체해서 크게 펼쳐 놓는 방법을 쓴다.
작가는 자신을 지속적으로 풍경 작업을 해온 사람이라고 했다. 2018년 베니스비엔날레에서 ‘땅 모래 지류’에서 자신이 한 모든 작업을 넣는데, 사람들이 걸어갈 수 있는 풍경을 만들어준 시작이었다. 이번 전시도 관객이 그림 속 풍경에 들어가 있는 상상하며 설치를 준비했다.
이번 전시에서 ‘풍경 작가’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낸 것은 고미술 상설전시실로 이동하는 로비 벽면에 부조처럼 건 ‘인왕제색도’를 연상시키는 ‘산’ 설치 작업이다. 작은 ‘산’ 연작을 벽면에 합체시켜 거대한 벽화 같은 효과를 냈다. 바라보는 산을 가장 상징적인 장소에 설치함으로써 자신의 모태인 동양화에 헌사를 바친 것 같았다.
손영옥 문화전문기자 yosoh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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