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생 노동자의 분신...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박진현 2023. 10. 24. 2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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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석 열사 20주기를 추모하며... 싸우는 비정규직 노동자를 기억하고 만나자

[박진현 기자]

20년 전, 1972년생 노동자의 분신

지금으로부터 20년 전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동자 이용석씨(당시 31세)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03년 10월 26일 이용석씨는 "비정규직을 철폐하라"며 자신의 몸에 불을 붙였다. 이날은 처음으로 서울 종묘공원에서 전국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모여서 전국비정규직노동자대회를 열던 날이었다.

이용석 씨는 나와 같은 1972년생이다. 이용석씨를 비롯한 우리가 대학을 졸업한 1998년, 대한민국은 외환위기로 국가경제가 꽁꽁 얼어 있었다. 경기가 위축되고 일자리는 없었다. 공기업 입사를 준비하던 이용석씨는 선배의 소개로 2000년 2월에 근로복지공단 목포지사에 조사요원으로 입사했다. 고용보험 신고서류를 담당하는 3개월짜리 일용직이었다. 김대중 정부가 공공부문 경영혁신이라는 이름으로 정규직을 줄이고 비정규직을 늘린 탓에 생긴 일자리였다.

그렇게 2년을 거친 후 2002년 1년 계약직 직원으로 채용돼 일해왔다. 그는 좀 더 노력해서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것이 그의 꿈이었다. 그의 평전을 쓴 이인휘 작가는 당시 이용석씨의 희망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목숨 줄이 3개월에서 1년으로 늘어나고, 월급도 정규직의 절반 수준에서 몇십만 원 더 추가됐다. 용석은 정규직처럼 복리후생비는 받지 못했지만, 낮은 수준의 상여금이라도 받을 수 있게 된 걸 생각하며 다시 기운을 냈다." - 이용석 열사 평전소설 <날개달린 물고기>(삶이보이는창)

하지만 그는 비정규직을 대하는 공단의 태도에 인간적 모욕감을 느꼈다. 근로복지공단 지사가 당시 비정규직 임금을 책정한 비용항목은 사업예산의 재료비 중 '잡급'이었다. 내부시험을 거쳐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것만이 비정규직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러나 공단은 간부 적체를 이유로 정규직 전환을 위한 내부 공채의 폭을 좁혔다. 비정규직들의 불만은 최고조에 달했다. 이용석씨가 분신한 2003년 근로복지공단 전체 직원의 34%가 비정규직이었다.
 
 공부방 학생들과 찍은 사진
ⓒ 이용석 노동열사정신계승사업회
 
이용석씨는 신안군의 작은 섬 상태도에서 태어나 전남대 금속공학과를 졸업했다. 바쁜 직장생활 틈틈이 저소득 청소년들에게 공부를 가리키던 반듯한 청년이었다. 그는 학생들에게 "경제적 차별에 굴하지 말고 떳떳하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자신의 현실은 "차별에 대한 노예"였다. 차별에 맞서고자 이용석씨는 노동조합 활동에 나섰다. 남다른 '책임감'이 있었다.
 
 과천 정부종합청사에서 1인 시위 중인 고 이용석 씨
ⓒ 이용석 노동열사정신계승사업회
 
이용석씨의 남다른 '책임감'은 2003년 여름 한 사건에서도 드러난다.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정부과천청사에 가서라도 집회를 하자고 요구했으나, 반응이 냉담하자 그는 '혼자라도 투쟁해야겠다'는 생각에 정부 과천청사로 올라갔다.
뜨거운 여름에 물병 하나만 들고 '근로복지공단의 비정규직 차별을 철폐하라'며 뜨거운 여름에 물병 하나만 들고 1인 시위를 벌였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는 그는 탈진 직전까지 간 후에야 1인 시위를 끝마칠 정도로 그의 책임감은 유별났다. 
 
 노동조합 활동 중인 고 이용석 씨
ⓒ 이용석 노동열사정신계승사업회
 
직무에서도 남달랐다. 동료들은 이용석씨가 직무를 처리하며 일을 깔끔히 마무리할 정도로 묵묵히 자신의 일을 수행해 선배들로부터도 '성실한 직원'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노조 일을 진행할 때도 그런 그의 과묵함과 추진력 때문인지 너무나 '순박하고 책임이 강한 사람'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노동법에 따라 사용자인 공단은 노조의 교섭 요구에 성실하게 응해야 했다. 그러나 결정권자인 근로복지공단 이사장은 교섭 장소에 나타나지 않았다. 교섭에는 권한이 없는 지역본부장들이 나왔다. 그들은 교섭의 쟁점 사항을 비껴가며 변죽만 울렸다. 이용석씨는 유서에서 "파업을 준비하며 사쪽의 많은 부당노동행위들을 보면서 우리의 싸움이 얼마나 힘들까 가슴이 메어온다"라고 썼다. 사측의 교섭 회피에 분노했다. 결국 그는 분신이라는 극단적 저항의 방식을 선택했다.

이용석씨는 분신 이후 40일 가까이 땅에 묻힐 수 없었다. 교섭이 여전히 답보상태였기 때문이다. 유가족들은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 문제의 가시적 해결 없이는 열사의 장례를 치를 수 없다"라고 뜻을 모았다. 형 이병우씨가 대표로 열사의 장례식 일체를 상급단체인 공공연맹(현 공공운수노조)에 위임했다. 500여 명의 조합원은 노숙농성을 하며 공단을 상대로 투쟁했다. 근로복지공단의 교섭 회피에 대해 여론의 따가운 질책이 쏟아졌다.

결국 파업 41일 만에 근로복지공단 비정규직노조는 '비정규직의 임금인상'과 '처우개선비 지급' '비정규직의 단계적 정규직화 및 비정규직 채용금지' '이용석 열사의 6급 명예정규직 예우' 등의 협상안에 합의했다.
  
 2003년 12월 8일 이용석 노동열사 전국노동자장
ⓒ 이용석 노동열사정신계승사업회
 
자회사를 통한 공공부문 비정규직 전환

이용석씨는 2003년 10월 26일 분신하고 사경을 헤매다 10월 31일 운명했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났다. 노무현 정부도, 이명박 정부도, 박근혜 정부도 그리고 문재인 정부도 공공부문 비정규직 대책을 내놨다.

그런데 이 대책으로 공공부문 비정규직은 사라지고 있는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권리는 신장되고 있는가? 윤석열 정부는 공공기관 경영평가 때 비정규직 정규직화 전환실적을 빼고, 재무성과 배점을 2배로 늘렸다. 그 결과 지난해 공공기관 비정규직 감소세가 멈추고 증가세로 돌아섰다.

공공기관 비정규직 노동자 수는 2018년 말 10만483명에서 2019년말 7만6668명에 이어 2020년 말 5만7650명으로 대폭 줄었고, 2021년 말에는 5만3960명 정도로 더 줄었다가 지난해 증가세로 돌아섰다.
 
 연도별 공공기관 비정규직 직원 수 추이
ⓒ 알리오
공공기관 비정규직이 정규직으로 대거 전환됐지만, 그것에 맞게 정규직 노동자 수가 늘어나지 않았다. 정규직 전환이 이뤄졌지만, 정규직이 늘지 않는 '마법'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공공기관들이 정규직 전환 인원을 직접고용보다는 자회사 설립 등을 통한 간접고용 방식으로 고용했기 때문이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집권 초 공공부문의 제로화를 선언하면 방문한 인천국제공항공사의 경우 정규직(일반정규직+무기계약직) 직원 수가 2018년 말 1368명에서 지난해 말 1843명으로 증가하는 데 그쳤다. 반면 같은 기간 자회사 직원이 2083명에서 8862명으로 늘었다.

자회사 전환 방식으로 공공부문 정규직 전환이 이뤄진 가운데, 자회사 노동자들의 노동조건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다. 아울러 공공기관이 민간 회사와 용역 계약을 맺던 때에는 계약 금액, 계약 조건 등이 노동자에게 투명하게 공개됐던 반면 자회사 전환 이후 모회사와 자회사 간 계약이 비공개로 바뀌어 노동자들이 교섭 등을 통한 노동조건 개선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지적도 나왔다.

지난 4일 공공운수노조 주관으로 국회에서 열린 '공공발주 용역계약 공시의무 강화 및 중간착취 근절방안 마련 토론회'가 열렸다. 이날 토론회에 참석한 공공부문 자회사 정규직 전환 당사자들은 자회사 전환 이후에도 저임금 구조가 개선되지 않았다고 토로했다. 이날 서재유 철도노조 코레일네트웍스지부 정책부장은 "코레인 자회사 코레일네트웍스의 1년 차 역무원이나 20년 차 역장의 임금 수준은 최저임금 수준으로 같다. 저임금일 뿐 아니라 숙련에 대한 보상도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구로역 코레일 역무원과 구일역 코레일네트웍스 역무원은 같은 업무를 한다. 하지만 임금 차이는 거의 2배"라며 모회사와 자회사 간의 임금차별에 대해서도 지적했다. 공공기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자회사로의 정규직 전환이 이뤄져 고용은 안정됐지만, 임금 및 복지 등 노동조건은 개선이 없었다.

비정규직과 불평등에 대한 국민들의 의식

한국비정규노동센터와 노회찬재단이 올해 3월과 4월 '불평등 사회 국민인식조사' 1, 2차 결과를 연이어 발표했다. 국민 2000명을 대상으로 국민의식조사를 진행했다.

소득 불평등의 심각성 인식 정도를 물었더니 응답자 89.5%는 한국의 소득 차이가 크거나 매우 크다라고 답했다. 비정규직 양산되는 것이 양극화의 주된 원인이라는 진단에 동의하는 의견이 58.5%로 반대 11.1%의 5배가 넘었다. 비정규직 규모가 너무 많다고 동의하는 비율은 68.6%다. 임금 등 노동조건 격차가 심각하다는 데 동의하는 비율은 76.0%다. 시민들은 비정규직 규모보다 격차를 더 중요한 문제로 본다.

시민들은 동일노동 동일임금 원칙에 82.3%가 찬성했다. 비정규직을 감축해야 한다는 의견은 40.7%인데 임금격차 해소는 그보다 많은 51.5%다. 시민들은 비정규직 차별 해소를 위해 비정규직을 임금을 올리는 점진적인 해결을 우선에 둔다. 비정규직 노조 운동이 그동안 주로 정규직화를 주력했지만 다양한 경로를 고민하고 개척할 때 시민들의 지지도 더 많이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남, 기억, 희망
 
 이용석 열사 20주기 추모제 포스터
ⓒ 이용석 노동열사정신계승사업회
 
이용석씨가 분신한 이후 많은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죽어 갔다. 2016년 서울지하철에서 홀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던 김군은 달려오던 열차에 치여 목숨을 잃었다. 시간에 쫗겨 일해야만 했던 외주업체 노동자였다. 2018년 서부발전 태안 화력발전소에서 하청노동자로 일하던 김용균은 안전장치 없는 깜깜한 컨베이어를 홀로 점검하다 목숨을 잃었다.

이용석씨가 분신한 이후 많은 공공부문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투쟁했다. KTX에서, 톨게이트에서, 마사회, 콜센터에서 변화를 갈망했던 이들이 있다. 누구는 이용석씨와 마찬가지로 목숨을 던지며 싸웠다. 지금도 싸우고 있다. 앞으로도 싸울 것이다.

이들은 모두 연결돼 있다. 윤석열 정부가 공공부문 비정규직의 시계를 뒤로 돌리더라도 싸우는 노동자는 역사의 수레바퀴를 밀고 갈 것이다. 이용석씨 20주기를 맞아 좌담회, 묘소 참배, 20주기 추모 다큐멘터리 등 추모행사가 열린다. 이는 이용석씨에 대한 추모일뿐만 아니라 싸우는 자에 대한 기억이며, 만남이며, 그럼으로써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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