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범도 서거 80주기, 이념에 찢긴 장군의 삶... 흉상 철거 철회해야
[유민 광복회 대외협력국장 기자]
▲ 지난 8월 28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 앞에 설치된 고 홍범도 장군 흉상 모습. |
ⓒ 연합뉴스 |
독립영웅 홍범도 장군이 서거한 지 10월 25일로 80주기를 맞는다. 홍범도 장군의 서거일은 올해 들어 특별히 비상하게 다가온다. 정부 주도의 이념 덧칠 때문에 그의 애국적 삶이 부정되고 있어서다. 한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조국의 총알로 암살되고 있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광복회로 걸려온 일방적 전화... 흉상 철거 시도 막전막후
수 개월 전 흉상철거 문제가 불거졌을 때 광복회에 '긴박한' 순간이 있었다. 언론보도에 앞서 당시 육사로부터 이종찬 광복회장을 찾아오겠다는 전갈이 왔다. 방문해서 설명드릴 일이 있다는 것이었다. 광복회가 다시 물으니 육사는 "육사 내 흉상들을 철거, 독립기념관으로 모실 계획인데 설명 드리겠다"는 일방적 통보였다.
이종찬 회장은 흥분했다. "그런 일이라면 오지도 말라"고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며칠 뒤 육사로부터 또 연락이 왔다. "이회영 선생님만 육사 내에 모시고 나머지 네 분 흉상을 이전하면 어떻겠느냐"는 일종의 '거래시도'였다. 광복회는 무대응으로 일관했다.
철거 계획에 대한 여론이 나빠지자 정부는 계획을 다시 수정했다. 다섯 분의 독립영웅 모두 독립기념관에 보내겠다는 결정에서 이제는 홍범도 장군만 독립기념관으로 '모시겠다'는 것. 표현은 그럴 듯해 보이지만 실상은 네 분은 육사 내 어딘가 가져다 놓겠다는 것이고, 홍범도 장군 흉상은 육사 밖으로 내보내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부당국의 입장 변화는 흉상 이전이 일견 즉흥적으로 추진됐다는 것을 보여준다. 합리적 근거가 있어서 홍범도 장군을 걸러내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 독립영웅 철거를 밀어붙였는데, 여론 추이를 보다가 홍장군을 '찍어낸 것이다.
심각한 사안이다. 역사 왜곡을 넘어 국가정체성을 혼란에 빠트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중에 정부당국은 또다시 '헛발'을 짚었다. 국군의 시작을 일본군관 출신들이 '득실거린' 조선경비대로 하겠다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을 신앙으로 추앙하는 자들이 1948년 정부수립을 건국으로 가져가기 위해 '악수'를 둔 것이다. 1948년을 건국으로 설정했으니 국군의 시작도 1948년 이후에서 찾다 보니 이 사달이 난 것이다.
홍범도, 공산주의도 볼셰비키도 아니고 막스-레닌주의자도 아냐
국방부·육사 등 당국이 홍범도 흉상을 쫓아내기로 한 근거는 홍범도 장군이 공산주의자이기 때문이란 것이다. 홍 장군에게 앞뒤 자른 언어로 이념 덧칠을 한 것이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홍범도 장군은 우리가 이야기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다. 볼셰비기 공산당도 아니다. 홍 장군이 1927년 소련 공산당에 가입한 것은 맞다. 홍 장군이 공산당에 가입할 때 그의 나이는 60세. 양봉조합에서 일하고 있을 때였다. 연금 받는 나이도 훨씬 넘긴 때다. 공산당의 이념에 동조해서 소련 공산당에 가입했다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때의 공산당은 이미 건설된 소비에트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대중정당이다. 그 땅에서 주민으로서 터를 잡고 생활하기 위해 등록하는 그런 정당이다. 만주나 국내로 돌아가지 못한 동료들과 함께 집단농장에서 터를 일구고 살아야 하기 위한 통과의례인 것이다.
홍 장군이 막스-레닌주의에 투철한 공산당이었다면 그는 이전에 얼마든지 공산당에 가입해 활동할 수 있었다. 1918년 한인사회당이 시작됐고, 1921년에는 임시정부 국무령을 지낸 이동휘가 창당한 고려공산당도 있었다. 1925년 국내에서 창당한 조선공산당도 있었지만 홍 장군은 이들 정당에 모두 일정한 거리를 뒀다. 그리고 어느 정파에 가입한 적이 없다. 홍 장군과 그의 가족 생애를 통틀어 행동의 철칙은 '조국의 독립'이 전부였다.
▲ 1920년 10월 24일 <뉴욕트리뷴> 25면에 실린 '일본을 추출하기 위해 조직되고 있는 백만명의 한국인'(Million Coreans Organizing to Oust Japanese)' 기사. 빨간 네모 안에는 '한국인들은 독립을 위해서라면 붉은 러시아든 하얀 미국이든 도움을 구하려 할 것'이란 내용이 담겨있다. |
ⓒ 미국 의회 도서관 데이터베이스 |
공산주의에 대한 홍범도 장군의 입장은 당시 미국 언론을 보면 확연해진다. 1920년 봉오동·청산리 전투를 승리로 이끌 무렵, 한 미국 언론이 한국의 독립투쟁에 대해 보도한 적이 있었다.
<뉴욕트리뷴>이 현지 특파원발로 보도한 내용이다. 당시 나다니엘 페퍼 북경특파원은 1920년 10월 24일 치 보도에서 "만주와 시베리아 한국의 항일운동가들이 볼쉐비키와 손을 잡은 것은 볼쉐비키의 이념에 동조해서 그런 게 아니라 오직 하나의 목적, 조국의 해방 때문이었다"고 보도했다.
당시 미국 등 제국주의자들의 시선은 10월 혁명을 성공시킨 볼셰비키의 움직임에 있었다. 제국주의 모든 국가와 언론들이 유산자의 입장에 서서 프롤레타리아를 대변하는 볼셰비키를 주시했다. 그러나 <뉴욕트리뷴>은 '만주 시베리아에서의 한인 무장독립단체들이 볼쉐비키와 연합한 것은 공산당의 신조 때문이 아니'라고 보도했다.
'홍범도=공산주의자' 안 먹히자 자유시참변 가해자로 몰아가는 당국
정부당국은 홍범도 장군이 공산주의자여서 흉상이 육사 내에 있는 것이 부적절하다는 논리가 먹히지 않자, 이제는 자유시참변을 들고 나왔다. 홍 장군이 자유시참변에서 가해자의 편에서 참변의 정당성을 옹호했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서는 먼저 자유시참변에 대해 개념정리가 필요하다. 자유시참변은 한인 독립부대들끼리 지도력 문제로 다투다 한 쪽이 다른 쪽을 제압한 불상사가 아니다. 자유시참변은 이르쿠츠크에 기반을 둔 국제공산당 코민테른 정부가 극동 시베리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해가는 과정에서 혁명군에 통합하기로 했던 사할린부대 등 일부 한인 독립부대가 혁명군내 리더십에 문제를 제기하며 통합을 미루자, 당시 자유지 통합군 책임자 칼란다리시빌리의 '카프카즈군과 혁명군'이 한인 사할린 부대에 발포하고 무장해제를 시킨 사건이다.
먼저 자유시에 와 통합에 가담한 홍범도·최진동 등의 한인부대가 사할린부대를 공격한 적은 없다는 이야기다. 간도에서 온 홍 장군과 최진동·안무·지청천 등은 한인 부대가 통합돼 독립을 목표로 단일대오를 형성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고 여기에 집중했다. 그래서 칼란다리시빌리 고려인군 총사령관의 권위 아래 먼저 들어간 것 뿐이다.
▲ 홍범도 장군(연합뉴스 자료사진). |
ⓒ 연합뉴스 |
홍범도를 비판하는 자들은 사할린부대 무력진압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성명서에 홍범도 이름이 나와 있는 것을 문제 삼는다.
반병률 한국외대 명예교수는 "이 문제는 역사학계에서 이미 뒤집어져 결론이 난 문제"라고 말했다. 홍범도 등 독립운동부대 지도자들의 이름이 모두 도용됐다는 것이다. 반 교수의 연구 및 언론 인터뷰 등에 따르면 1922년 2월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의에 참석했던 홍범도·최진동이 김동한과 공동명의로 <조선유격운동에 대한 보고서>를 당시 소비에트 지도부에 제출한다. 바로 이 보고서에서 홍 장군 등은 자신들의 이름이 사실상 도용됐음을 '보고'한 것이다. 나아가 이들은 "이렇게 부끄러운 성명서에 우리는 서명할 수 없었으며 최후통첩을 했지만 우리는 서명을 거부했다"고 말했다. 자유시참변 정당성을 주장하는 성명서에 홍범도 등 독립부대 리더들의 이름을 도용했다는 것이다(2023년 9월 <경향신문> 등 인터뷰).
허근 등이 1921년 10월 코민테른 본부에 제출한 '자유시사변에 대한 보고서'에도 자유시참변의 책임소재가 더 명확하게 나온다. 당시 우리 독립군 최대 피해부대를 이끌던 허근 등 한인 독립군지도자들은 "귀 의회 정부가 총사령관을 보내 풍파를 야기하려 자유시에서 한국 군대를 포위·공격했다. 사변의 진상규명과 책임자 문책을 강력히 요구한다"고 보고했다. 자유시참변의 책임이 슈미야츠키 코민테른 극동지부의 지휘 아래 고려인군 총괄사령관인 칼란다리시빌리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대목이다.
홍범도가 자유시참변의 '가해자' 측이 아니라는 증명은 이뿐만 아니다. 홍범도 등 간도 독립군 지도자 28명이 참변의 최대피해자에게 협상전권을 준 것이다. 홍 장군 등은 코민테른 정부와의 참변 협상이 시작되자 참변의 최대피해자인 상하이파 핵심인물 김동한에게 협상전권을 위임했다. 홍 장군이 자유시참변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했다면 피해 인사에게 협상 전권을 맡길 이유가 없다.
홈범도 재판위원 역임은 "형식적이고 절차적인 기록용"
혹자는 자유시참변에서 홍 장군이 참변의 재판위원으로 기록되고 있는 점도 지적한다. 가해자 측 인사여서 재판원을 맡았고, 피해자를 징계했다는 것. 그러나 반병률 교수에 따르면 정확히 당시 재판장은 홍범도가 아닌 채동순이었고, 또 당시 50명의 배심원이 있었다고 한다. 배심원에는 여운형, 김규식, 지청천, 안무 등 대한민국의 독립운동지도자들이 망라돼 있다. 일종의 형식적이고 기록용이라는 것이다.
'반혁명군'을 재판하면서 재판의 결과도 이를 증명한다. 대부분 피고들이 방면됐다. 그나마 5명 정도도 고작해야 징역 1~2년 등의 식이었다. 홍범도가 재판위원이어서 가해자였을 것이라는 추론은 내전당시 볼셰비기 혁명군 재판시스템을 이해하지 못하고 하는 말이다.
1920년대는 코민테른 정부가 중부시베리아 이르쿠츠크와 치타에서 극동 시베리아로 세력을 확장해가는 전쟁 중인 기간, 자유시부대 지휘관인 칼란다리쉬빌리가 내전당시 다른 지역에서 재판한 것을 들여다 보면, 홍 장군의 재판위원이 형식적이었다는 점을 이해할 수 있다.
칼란다리시빌리가 이르쿠츠크에서 금괴 탈취범 라브로프를 체포해 재판에 올릴 때다. 그는 자기 명령으로 재판위원을 현장에서 찾아 임명한다. 그리고 재판절차를 시작하려는데 그의 부하가 재판의 피고를 현장에서 사살한다. 그 부하는 피고에 원한을 갖고 있었는데, 재판장이나 재판위원이 있어도 그냥 총살해버린 것이다. 이것이 혁명군 재판의 실상이다.
홍 장군이 내전기간 중 재판위원을 했다는 사실 자체는 비중이 있는 사안은 아니라는 것이다. 전시사령관이 피고한인들을 대상으로 재판원을 구성하는데 당연히 '영향력있는' 한국인 재판위원을 임명하지 않을까.
▲ ‘홍범도 장군은 우리가 지킨다 공동행동 추진위원회’는 지난 14일 창원진해 북원광장 이순신 장군 동상 앞에서 해군사관학교 앞 남원광장 백범김구선생친필시비까지 거리행진을 했다. |
ⓒ 윤성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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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글쓴이 유민씨는 광복회 대외협력국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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