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빌리시의 오래된 성당을 통해 배우는 역사
[이상기 기자]
▲ 트빌리시 시온 성당 |
ⓒ 이상기 |
그 후 이슬람 제국의 침입으로 파괴되었고, 12세기 다비드 4세에 의해 재건되었다.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티무르제국, 사파비제국 같은 이슬람 세력에 의해 또 다시 파괴되는 수난을 겪었다. 1657년 트빌리시 대교구장이던 사기나슈빌리(Elise Saginashvili)가 현재 건물의 토대가 되는 성당을 지었다. 1668년 지진이 나 성당 일부가 파괴되었고, 1710년 돔, 벽 등이 복구되었다.
1802년 조지아가 러시아 제국에 병합되었고, 조지아 정교는 사실상 러시아 정교의 영향력 하에 놓이게 되었다. 1812년에는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받은 돈으로 종탑을 건설했다. 1850년에서 1860년 사이에는 러시아 예술가들에 의해 성당의 실내장식과 벽화가 바뀌게 된다. 이때 중세풍의 프레스코화와 조지아 전통의 벽화가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코노스타시스도 가가린(Grigory Gagarin)의 디자인으로 새롭게 만들어졌다.
▲ 성당 서쪽 출입구 위 벽화 |
ⓒ 이상기 |
시온 성당은 동방의 비잔틴 양식과 서방의 로마네스크 양식을 결합한 중세 조지아 성당 건축의 전형이다. 서쪽에 입구가 있고, 동쪽 끝 반원형 공간에 제단을 중심으로 한 성소(聖所)가 있다. 서쪽 입구로 들어가기 전 우리는 종탑을 만날 수 있다.
러시아 제국 시절 만들어서 그런지 사각형의 현대적인 모습이다. 시온 성당의 서쪽 입구에는 벽화 형식의 예수상과 모자이크 형식의 성모자상이 상하로 배치되어 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면 전체적으로 어둡다. 그렇지만 돔의 창으로부터 들어오는 빛이 비치는 성소는 상대적으로 밝은 편이다.
돔의 천정에는 근엄한 모습의 예수상이 상반부만 그려져 있다. 왼손에는 성경을 들고 오른손은 높이 들어 온 세상에 축복을 내린다. 머리 뒤에는 두광이 있고, 양쪽으로 IC와 XC라는 글자가 있다. 이것은 동방정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한다.
▲ 시온성당 돔과 예수 그리스도상 |
ⓒ 이상기 |
성당의 벽화와 장식 등 내부를 살펴보는데, 이코노스타시스가 열리면서 신부가 밖으로 나오면서 미사를 진행한다. 지금까지 다녀 본 성당 중 유일하게 이곳에서 신부와 신도들이 함께 미사를 드리기 시작한다. 성가도 울려 퍼진다. 그 때문에 돔과 제단 그리고 벽화 등을 더 이상 자세히 살펴보기 어려웠다. 또 미사진행원들이 우리에게 밖으로 나가길 요청한다.
아쉬운 마음으로 성당을 나오면서 주변의 벽화를 대충 살펴본다. 성 삼위일체 대성당 벽화에 비하면 종교성과 예술성이 훨씬 뛰어나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성당이 가지는 역사성과 그림이 보여주는 아우라 때문으로 여겨진다.
▲ 타마다 |
ⓒ 이상기 |
시온 성당을 나온 우리는 트빌리시 역사박물관을 지난다. 트빌리시 역사박물관은 과거 카라반사라이로 사용되던 건물을 개조한 것이다. 위층에 트빌리시 역사와 관련된 유물과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아래층은 시민과 관광객 누구나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다. 인근에는 트빌리시 와인박물관도 있다.
이곳을 지나면 골목길 입구에서 술을 즐기는 사람 타마다(Tamada) 동상을 볼 수 있다. 타마다는 원래 축제나 행사에서 최초로 건배를 제의하는 사람이다. 그는 뿔잔을 들고 유머나 덕담을 하면서 행사를 이끌어갔다. 그러므로 행사의 리더로 여겨진다.
현재 타마다 동상의 원형은 쿠타이시(Kutaisi) 서남쪽 바니(Vani)에서 발굴된 기원전 7세기 청동 조각상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이때부터 이미 조지아 지역에서 와인이 삶의 중요한 요소였음을 알 수 있다. 후대에 이 조각상이 조금은 우스꽝스럽게 변형되면서 술주정꾼으로 변질된 것 같다.
▲ 피로스마니의 그림 |
ⓒ 이상기 |
이곳에서는 또한 피로스마니의 그림을 볼 수 있다. 인물과 동물이 공존하는 이상한 그림이다. 그림 아랫 부분에 두 명의 여인이 기대거나 누워 있다. 가운데 모자를 쓴 소녀가 풍선을 들고 있다. 소녀 양쪽으로 기린과 사슴이 보인다. 사슴 뒤로는 옷을 근사하게 차려입은 여인이 있다.
그런데 피로스마니 화집에는 이 그림이 없다. 여러 그림에 나오는 인물과 동물을 합성한 것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인물들의 얼굴에 구멍을 뚫어놓았다. 그곳에 얼굴을 대고 기념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 메테키 성당 |
ⓒ 이상기 |
얀 샤르데니 거리가 끝나는 곳에 박탕 고르가살리 광장이 있고, 그곳에서 꽈리강 건너 언덕을 보면 성당이 보인다. 그것이 중세 때 세워진 메테키 성당이다. 메테키 성당은 메테키 다리 건너 높은 언덕 위에 우뚝하게 솟아 있다.
우리는 언덕길을 돌아 메테키 성당으로 올라간다. 성당 앞에는 고리가살리 왕의 동상이 서 있고, 아래로는 꽈리강이 유장하게 흐른다. 메테키 성당의 공식명칭은 메테키 성모승천 성당이다. 현재 건물은 바그라티 왕조의 데메트리우스 2세(Demetrius II) 때인 1278년부터 1289년 사이 지어졌다.
그렇지만 이 성당의 기원은 5세기 고르가살리왕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런 연유로 성당 바깥에 고르가살리왕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것이다. 1195년에는 이슬람 세력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타마르(Tamar) 여왕이 신발을 벗고 성당 안으로 들어왔다는 기록이 있다. 그 때문인지 성당 안에서 타마르 여왕을 그린 벽화를 볼 수 있다.
▲ 모자이크 장식 여인상 |
ⓒ 이상기 |
성당은 십자가 형태로 만들어졌으며 가운데 돔이 우뚝하다. 동쪽에 반원형의 제단이 있고, 출입구는 남쪽과 북쪽으로 나 있다. 제단에는 이코노스타시스가 설치되어 있다. 가운데 문을 중심으로 양쪽에 두 개씩 모자이크 양식과 금박장식 성화가 판을 장식하고 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은 모자이크로 장식한 세 명의 여성 성인상이다. 가운데 여인이 성모 마리아로 보이고 왼쪽 여인이 타마린 여왕으로 보인다. 오른쪽 여인은 이슬람식 터번을 쓰고 있다. 이들 머리 위로 이름을 표기해 놓은 것 같은데 읽기가 어렵다.
메테키 성당은 바위 언덕 위에 있어 공간이 협소하기는 하지만 동쪽에 장미장원이 만들어져 있다. 장미정원을 지나면 메테키 언덕과 연결된다. 메테키 성당은 동쪽으로만 평탄하고 서쪽과 남북쪽이 벼랑이다. 그 때문에 메테키 성당은 성채로서의 기능도 충분히 할 수 있었을 것이다.
▲ 나라칼라 요새로 오르는 케이블카 승강장 |
ⓒ 이상기 |
유럽광장 한편에서는 나리칼라 요새로 오르내리는 케이블카 운행이 분주하다. 우리는 이제 나리칼라 요새를 구경하고 트빌리시 시내를 조망하기 위해 케이블카 승강장으로 이동한다. 이 케이블카는 티롤 지방에서 케이블카를 운행하는 라이트너(Leitner)사에 의해 시공되었다. 입구에 써 있는 안내판을 보니 나라칼라 요새까지 높이 94m 길이 508m를 1분 42초 동안 운행한다. 나라칼라 요새 승강장의 해발은 492m로 나와 있다. 우리는 이제 그곳으로 올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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