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는 복사기가 귀했는데 지금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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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동환 기자]
▲ 채상기 명진사 대표. 공장에서나 볼법한 대형 제단기를 수십년동안 사용하고 있다. |
ⓒ <무한정보> 황동환 |
'명진사'는 채상기(67) 대표의 부친 고 채희덕씨가 1974년에 복사·청사진 전문 가게로 시작했다. 1980년에 부친이 숙환으로 돌아가시면서 물려받은 채 대표가 올해 43년째 운영하고 있다.
인터뷰 요청에 "할 이야기도 없고, 보여드릴 만한 것도 없어"라며 손사래를 쳤지만, "50여 년 동안 읍내 중심에서 가게를 운영하며 벌어진 지역의 변화를 생생히 목격하셨을 텐데 그런 이야기도 나눠주시면 됩니다"라고 너스레를 떨자, 그제야 옛 이야기를 풀어낸다.
채 대표는 "당시 큰 형님이 인쇄 청사진 업종에 종사 했는데, 아버지께 앞으로 이쪽 분야가 괜찮을 것 같다고 권유해 시작했다"며 "그때 가족이 천안에서 예산으로 이사를 왔다"고 한다.
▲ 부친이 시작한 가게를 물려받은 복사 가게를 43년째 운영 중이다. |
ⓒ <무한정보> 황동환 |
"예전에는 복사기가 귀한 시절이라, 농협, 군청, 읍사무소에 복사기가 없었지. 그래서 우리집에 복사하러들 많이 왔어"라는 그의 말에서 세월의 흐름과 함께 복사 가게들이 겪었던 변화가 느껴진다.
"그땐 지금과 같은 복사기가 아니고, 사진기 플래시가 터지듯 빛이 들어오면 복사가 되는 방식이었다. 그 다음에도 여러 공정을 거쳐야 1장이 나오기 때문에, 밤을 새워 복사해야 몇 백 장 복사하던 때"라고 말한다.
초창기에 갖췄던 장비는 복사기와 청사진 출력기가 전부였다. 시장의 수요도 여기에 주로 맞춰져 있었다.
그는 "예산군에 대산건설이 생기면서 청사진 복사 의뢰가 많았다. 그 뒤 농지개량조합이 들어서면서 청사진 의뢰가 부쩍 늘었다. 조합에서도 왔지만, 조합으로부터 다리, 도로 공사를 수주 받은 건설회사들이 조합에 제출할 도면 청사진이 필요해 가게를 많이 찾았다"고 회상했다. 채 대표가 말하는 농지개량조합은 현재 한국농어촌공사 예산지사가 됐다.
가게가 개업할 무렵 예산읍에 활자 인쇄소는 몇 군데 있었지만, 복사 전문 가게는 명진사가 유일했다고 한다. 요즘도 청양에서 복사를 맡기러 오는 고객들도 있다. 청양엔 이런 곳이 없기 때문이란다.
▲ 작두는 1974년 개업 때부터 사용하던 장비 가운데 유일하게 남은 장비다. |
ⓒ <무한정보> 황동환 |
가게를 찾아오는 손님 중에는 도장을 파달라고 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도장 파는 일을 겸하는 복사 가게들도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채 대표는 그런 일은 일부러 피한다.
"도장파는 기계만 갖다놓으면 누구나 다 할 수 있다. 도시에 가면 복사집에서 현수막도 제작하고, 문구점, 도장 파는 일도 같이 하는데, 저는 그런 일은 하지 않는다. 그 일을 주업으로 먹고사는 사람도 있는데 뺐고 싶지 않았다."
전에 사용하던 청사진기, 로트링펜 등은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다 없애고, 지금은 작두와 재단기가 남아 50년 세월의 역사를 말없이 전하고 있다. 작두는 1974년 개업 때부터 사용하고 있다.
천안이 고향인 채 대표는 부친을 따라 예산에 내려와 정착한 시간이 50년이다. 가게 창문 밖으로 군청사가 시야에 들어온다. 예전에 예산농전·버스터미널이 있던 자리다. 지역의 변화를 누구보다도 생생히 목격했을 채 대표. 그는 어떤 기억을 갖고 있을까?
"군청, 보건소 자리까지 3만4000평 정도 되는 땅이 전부 학교 자리였지. 당시 학교 입구 양쪽으로 은사시 나무가 장관이었는데 업자에게 팔렸다. 만일 지자체가 지금처럼 활기를 띠었다면 살릴 수도 있었을텐데, 그렇게 좋은 터였는데 지금 이렇게 돼 버렸네요…"
그가 말하는 학교는 지금은 사라진 예산농업고등학교다. 농업전문대학으로 바뀌었다가 대회리로 이전했다. 현재 공주대학교 산업과학대학의 전신이다.
지금의 학교가 있을 당시 학생들이 가게를 많이 찾았다고 한다. 그는 "처음엔 복사할 줄 모르는 학생들이 찾았다면, 차츰 전문서적 복사 의뢰가 들어왔다. 워낙에 전공서적들이 비쌌으니까"라며 옛일을 떠올린다.
▲ 채 대표가 복사를 위해 가게를 찾은 할머니 두 분과 담소를 나누고 있다. |
ⓒ <무한정보> 황동환 |
조근조근 건네는 그의 이야기속으로 빠져드는데, 마침 할머니 두 분이 가게 문을 열고 등장했다. "4장만 복사해 주세요"라고 부탁한다. 복사 비용은 500원이다. 지갑을 꺼내 든 할머니는 예상했던 금액보다 저렴하다고 생각했던지, "이렇게 드리면 되겠네요"라며 2000원을 채 대표 손에 쥐어준다.
의외의 상황에 주인이 "고맙습니다"라며 허허 웃자, 할머니는 "별 것도 아닌데, 다른 데서도 팁을 주면 이상하게 생각하더라구,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말거나…"라는 말을 남기며 웃는다. 그대로 닮고 싶은 푸근한 시골 인심이다.
채 대표는 현역에서 물러나 자유롭게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소망을 전했다. 그도 언젠가는 가게를 누군가에게 물려 줄 것이다. 설령 그가 없더라도 수많은 사람들이 명진사를 통해 이뤄진 교감을 똑같이 나눠가질 것이다, 마치 복사된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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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충남 예산군에서 발행되는 <무한정보>에서 취재한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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