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 추격자 오류

김찬희 2023. 10. 24. 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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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기자와 연신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앞에서 그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평생을 '모노즈쿠리(장인정신) 기업'에서 '돈 되지 않는 연구원'으로 일할 수 있는 조직문화, 그런 과학자와 기초과학을 우대하는 일본 사회였다.

그래서 한국의 R&D 투자액 대비 지식재산사용료 수익 비중은 9.9%(2018년 기준)로 OECD 평균인 27.7%에 턱없이 밑돈다.

그런데 눈앞 성과에 사로잡혀 또 추격자 오류에 빠지지 않을까 우려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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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찬희 편집국 부국장


수많은 기자와 연신 터지는 카메라 플래시 앞에서 그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회사에서 주는 푸른색 작업복 상의를 입은 채였다. 시작점은 2002년 10월 9일 수요일이었다. 늘 그렇듯 출근해 일하는데 전화가 걸려 왔다. 수화기 건너편에서 누군가 영어로 얘기했고, ‘해외에서 주관하는 상을 받게 됐다’ 정도로 알아들었다고 한다. ‘노벨’이라는 단어를 얼핏 들었다고도 했다. 통화를 마치자 직장 내 전화기들이 일제히 울리면서 다나카 고이치를 찾았다.

2002년에 ‘연성 레이저 이탈기법’으로 노벨 화학상을 받은 다나카 고이치는 ‘무명’이었다. 도호쿠대학을 졸업하고 1983년 교토의 정밀기기 업체 ‘시마즈제작소’에 입사한 게 이력의 전부였다. 연구만 하게 해달라면서 승진시험도 치르지 않았다. 당시 세상이 놀란 것은 현재까지도 유일한 ‘학사학위 노벨상 수상자’라는 점도, 그의 연구 결과도 아니었다. 평생을 ‘모노즈쿠리(장인정신) 기업’에서 ‘돈 되지 않는 연구원’으로 일할 수 있는 조직문화, 그런 과학자와 기초과학을 우대하는 일본 사회였다.

이런 풍토에서 일본은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 새로운 제품·기술을 빠르게 쫓아가는 추격자) 전략을 구사해 경제 성장과 과학기술 발전을 일궜고, ‘퍼스트 무버’(first mover, 선도자)로 올라섰다. 추격자 전략은 한국에도 효과적이었다, 10년 전까지. 한국의 주요 수출 품목을 보면 1970년대 1위는 섬유였고 2위와 3위를 의류, 선박이 차지했다. 이 순위표는 80년대에 선박, 섬유, 의류 순으로 바뀌었고 90년대 들어 반도체, 자동차, 선박으로 달라졌다. 혁신의 힘이고, 기술의 성과였다. 하지만 그 뒤로 큰 변화가 없다. 세계적 컨설팅사인 맥킨지앤드컴퍼니는 지난 19일 아시아 언론 간담회에서 2005년과 지난해 한국의 수출 상위 10개 품목을 비교하면 디스플레이 하나 빼고 그대로라고 꼬집었다. 1위 기업, 1등 기술을 벤치마킹해 더 나은 제품·서비스·기술을 내놓는 추격자 전략이 수명을 다한 것이다.

사라진 역동성을 찾는 방식은 여럿이겠지만, 가장 밑바닥에 깔린 건 과학기술이다. 정부와 기업, 학계가 마냥 손을 놓은 건 아니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 대비 연구·개발(R&D) 투자액 비중은 2021년 기준 4.93%에 이른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가운데 이스라엘에 이어 2위다. 2011년 이후로 이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왜 일본처럼 과학 분야 노벨상 수상자가 나오지 않을까.

‘추격자 오류’에 빠져서다. R&D에 매년 막대한 돈을 쏟아붓고 있지만 ‘연구’보다 ‘개발’에 치중한다. 산업에 곧바로 응용할 수 있는 기술 개발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기초과학 연구는 상대적으로 빈약하다. 그래서 한국의 R&D 투자액 대비 지식재산사용료 수익 비중은 9.9%(2018년 기준)로 OECD 평균인 27.7%에 턱없이 밑돈다.

물론 돈을 제대로 못 쓴다고 생각할 법하다. 그래서 정부는 내년 R&D 예산을 올해보다 16.7% 삭감해 편성한다. 새는 걸 묶고, 솎아내는 것이다. 그런데 눈앞 성과에 사로잡혀 또 추격자 오류에 빠지지 않을까 우려가 크다. 징후는 보인다. RNA 치료제 분야에서 세계적 석학인 김빛내리 서울대 생명과학부 석좌교수는 지난 6일 열린 ‘2023 한국생물공학회 추계 학술대회’에서 기자들과 만나 “효율성, 성과와 무관하게 예산이 삭감돼 새로운 연구로의 확장이 힘들다. 아무리 집안이 어려워도 학비는 내는 것처럼 미래를 위한 투자로 봐주면 좋겠다”고 했다.

역동성을 잃으면 산업·경제는 가라앉는다. 추격자에서 선도자로 발돋움하려면 ‘돈 안 되는 기초과학’에 돈을 써야 한다.

김찬희 편집국 부국장 chki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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