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문제에 집중하라

송세영 2023. 10. 24. 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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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세영 편집국 부국장

보수적 가치를 추구하되
이념적이지 않을 것으로
기대한 윤석열정부의
이념·역사전쟁

이념에 매몰되면
현실 제대로 보지 못해

민생에 중요한 문제들 산적
선명성 대신
문제 해결 능력 보여주길

어떤 이념과 가치를 내걸고 당선됐느냐가 정부의 성패를 좌지우지할 것 같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다.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깃발도 아니고 한두 번의 전투에서 이기는 것도 아니고 최종 승리 여부다. 크고 선명한 깃발을 내걸었는데 패배만 거듭한다면 조롱거리로 전락할 뿐이다. 어떤 깃발을 들었든 미션을 완수해야 한다. 문제를 해결하고 성과를 내야 한다. 그러지 못하면 소수의 맹목적인 지지층만 남고 나머지는 등을 돌릴 것이다.

모든 정당은 표방하고 추구하는 가치가 있다. 유권자들의 선택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가치와 가치들이 경쟁하고 충돌하면서 때로 조화를 이루고 융합하는 게 민주주의다. 문제는 가치 추구를 뛰어넘어 이념에 매몰되는 것이다. 이념적 접근법은 현실을 직시하기 어렵게 만든다. 복잡한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게 하고 흑백논리나 이분법으로 단순화시킨다. 자유와 인권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것과 이런 가치가 이념화된 자유주의나 인권주의를 추종하는 것은 다르다. 생명이나 평화처럼 사회 구성원 대부분이 공감하는 가치도 이념화되는 순간, 다른 가치를 억압하고 획일화하려는 속성을 띤다. 여기에 극단주의 성향까지 가세하면 재앙이다.

자유를 추구해도 다른 가치와 충돌할 때는 우선순위를 달리할 수 있다. 반면 자유주의 이념을 추종한다면 우선순위가 바뀌지 않는다. 늘 자유가 최고의 가치다. 이념적 속성상 자유주의는 자유지상주의로 번지고 이는 전체주의와 폭력을 수반한다. 이념이 현실을 지배하고 사람들은 이념을 위해 복무한다. 그 부작용을 혹독하게 겪었기에 지난 세기말 많은 지식인이 이념의 시대에 종언을 고했다.

윤석열정부의 이념전쟁·역사전쟁을 지켜보면서 당혹감이 든 것은 이런 이유다. 정치 경험이 거의 없는 윤석열 검사가 대통령이 된 것은 그가 선명한 강성 보수 이념의 수호자여서가 아니다. 좌파들과 이념전쟁에서 승리하는 데 적임자라서도 아니다. 그랬다면 훨씬 낮은 득표율로 낙선했을 가능성이 높다.

중도층은 그가 보수적 가치를 추구하지만 이념적이진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직전 정부에서 이념과 진영의 잣대를 고집하면서 문제 해결에 실패한 데 실망했기 때문이다. 이는 1980년대 민주화운동을 한 586세대 용퇴론의 배경이기도 하다. 이들의 이념적 사고와 진영적 행태는 문제를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자기만의 색안경을 끼고 보게 만들었다. 문재인정부가 부동산·연금·교육·의료·빈부격차 등의 문제에서 성과를 내지 못한 데는 이들의 이념적·관성적 접근 탓이 컸다.

586세대를 앞장서서 비판해온 뉴라이트는 다를까. 그동안 지켜본 그들의 모습은 586과 동전의 양면이었다. 뉴라이트의 주축은 80년대 학생운동권 출신이다. 사상적으로 전향해 진영이 바뀌었을 뿐 이념적 사고는 동일했다. 586이 시대적 소명을 다함과 동시에 그 안티테제였던 뉴라이트의 역할도 끝났다.

그런 뉴라이트의 그림자가 현 정부 행보에서 짙게 느껴질수록 민생의 존재감은 희미해졌다. 국민 삶을 좌우하는 시급하고 중요한 문제가 많은데도 노조를 겨냥한 노동개혁이나 좌파 척결 목소리만 크게 들렸다. 한·미동맹 강화와 한·일 관계 개선은 국익과 외교·안보 측면에서 의미와 전망을 논의할 수 있는 사안인데도 이념적 이슈로 변질해버렸다. 게다가 공공기관 지방 이전, 연금개혁 등 중요한 개혁 일정 일부는 총선 이후로 미뤄졌다. 현 정부에선 이념과 총선 승리가 민생보다 우선인가, 소수의 이념 집단과 이권 세력이 정부를 좌지우지하는 건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이 많다.

우리 앞에는 진보냐 보수냐의 이분법으로 재단하기 힘든 문제가 많다. 저출생·고령화나 인구 감소 문제에 진보와 보수가 갖는 위기의식이 다르지 않다. 의사 부족, 연금개혁, 규제 타파, 교육개혁 같은 문제도 마찬가지다.

국정과제 목록부터 살펴보며 우선순위를 다시 정하면 좋겠다. 보수 이념에 부합하느냐, 색깔을 드러내는 데 도움이 되느냐는 고려 사항에서 빼야 한다. 내년 총선에서 유불리를 고려하고 싶은 유혹이 크겠지만, 인내해야 한다. 국민이 정부에 기대하는 것은 선거공학의 달인이 아니라 마땅히 해야 할 일은 어떻게든 해내는 믿음직한 일꾼의 모습이다. 국민적 공감대가 있는 문제, 일부 이권세력의 저항이 있어도 정부의 의지와 결단만 있으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부터 집중하면 좋겠다. 차곡차곡 착실하게 점수를 따다 보면 민심은 따라온다.

송세영 편집국 부국장 sysohng@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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