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힘 뺌의 미학, ‘조정’의 재발견
1799년 여름 조지 워싱턴은 유언장을 작성한다. 말미에 다음을 쓴다. 앞으로 다툼이 생기지 않길 바라지만 혹시나 그러하다면 법원으로 가지 말라. 대신 세 명의 현인(賢人)을 정해 “법으로부터 자유롭게” 결정토록 했다. 내밀한 다툼이 법적 절차로 해결되긴 쉽지 않음을 에둘러 표현했다.
이런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다. 최근 국제사회에 비슷한 움직임이 있다. 기업 간 국제적 성격의 분쟁을 지금처럼 법원이나 중재절차로 갖고 갔더니 득도 많지만 때론 실도 있다는 자각이다. 판결이 나와도 밑에 깔린 갈등은 오히려 그 과정에서 더 커진다. 장기적으로 영업 관계를 이어가야 하는 국제 기업들엔 마이너스다. 대안은 뭘까. 법원·중재 대신 믿을 만한 제3자를 찾아 이 사람의 ‘조정(調停·mediation)’으로 해결방안을 찾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다. 이기는 쪽도 지는 쪽도 없다. 갈등을 인정하고 윈윈 계획을 구체적으로 그리는 작업이다. 당사자 간 협상과 법적 해결의 중간쯤 있는 ‘하이브리드’ 방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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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패보다 상생 협력의 해법 모색
한 템포 늦춘 ‘저강도’ 절차에 관심
여러 국제 위기와 복합 분쟁에서
갈등해결 위한 창조적 대안 제시
」
여러 국가에서 국내적으론 이미 이런 제도가 익숙하다. 문제는 국제 분쟁으로 가면 마땅한 기제가 없다는 점이다. 이 빈틈을 메우고자 유엔 주도로 새로운 조약도 들어왔다. 2019년 싱가포르 협약이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56개국이 서명했다. 기업 간 조정의 ‘국제화’를 위한 첫걸음이다.
기업만이 아니다. 국가 간 분쟁도 이런 움직임이 활발하다. 여태 국가 간 분쟁 해결은 ‘모 아니면 도’였다. 다투는 두 나라가 외교적 협의를 하거나, 아니면 국제법원이나 중재절차로 법률의 끝단으로 치닫는다. 중간이 없다. 그러나 때론 딱 중간 정도가 필요할 때도 있다. 잘잘못을 따지되 양쪽이 서로 양보하고 협력해야 문제 해결에 이르는 분쟁이 바로 그러하다. 법적 문제를 포함, 여러 이슈를 통섭적으로 평가해 솔로몬의 지혜를 내는 현인이 이땐 필요하다. 분쟁도 해결하고 관계도 이어간다.
국가는 기업보다 더 절박하다. 다른 곳으로 본사를 옮길 수도 없다. 밉다고 사업 종목을 바꿀 수도 없다. 서로 고구마 줄기처럼 얽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도 많다. 자연스레 ‘관계 유지형’ 분쟁해결에 관심이 간다. 그래서 지금 여러 조약·협정에선 국가 간 분쟁을 위한 다양한 형태의 조정절차가 속속 들어오고 있다. 기존의 ‘고강도’ 법적 절차를 없애는 게 아니다. 이는 그대로 둔다. 새로운 ‘저강도’ 선택지를 추가할 따름이다. 둘 중 골라 맞춤형으로 가라는 이야기다. 그저 조정을 권고하는 게 아니라 자세히 절차를 규정한다. 그간 조정이 활용되지 않은 큰 이유가 세부 내용이 없어 국가들이 선뜻 선택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사실 최근 국제사회 현실은 분쟁해결 수단으로서 조정의 유용성을 새롭게 부각한다. 두 측면이다. 먼저, 적지 않은 분쟁들은 외교, 정치, 감정, 법률이 얽혀 있다. 법적 문제만 발라내 딱 잘라 결론 내리기 쉽지 않다. “법적으로 문제가 끝났다고 인간적으로도 문제가 끝난 건 아니며, 서로 협력하지 않으면 영속적 관계에 도달할 수 없다.” 2022년 8월 도쿄에서 열린 한일 포럼에서 오와다 히사시 전 국제사법재판소장의 말이다. 국제법원 수장의 말이라 더 공감이 간다.
그다음으로, 법이 현실과 동떨어져 있거나 아예 없다면 어찌할 것인가. 기후변화, 디지털, 공급망이 그러하다. 흔히 ‘규범 기반 (rules-based)’ 체제라고들 이야기한다. 맞는 이야기다. 하지만 이게 작동하려면 ‘규범’이 무엇인지 먼저 명확해야 한다. 이게 애매하면 법적 해결의 전제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다.
위 두 상황에선 기존 법적 절차로 결과가 나와도 국가 간 분쟁이 원만한 수준으로 해결되긴 어렵다. 진 쪽이 마음으로 수용할 수 있을까. 여기서 조정은 빛을 발한다. 조정을 통해 낮은 단계의, 그러나 객관성을 담보한, 결론이 나온다면 오히려 문제 해결에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다.
물론 모든 문제가 이 방식으로 해결될 순 없다. 국가 간에도 때론 법적 절차가 유일한 해결 방안인 경우도 많다. 어떤 일이 있어도 얼굴을 붉혀 반드시 승패를 갈라야 할 때도 있다. 그러나 어떤 다툼들은 소통과 상생의 논의에 친하다.
중동에서 전운이 감돈다. 중동에선 전쟁도, 법적 다툼도 많았다. 그리고 조정으로 문제 해결을 시도한 사례도 적지 않다. 이집트-이스라엘 분쟁을 끝낸 1979년 캠프 데이비드 협정, 이스라엘-아랍에미리트 갈등을 마무리한 2020년 아브라함 합의는 모두 조정의 결과다. 1979년 테헤란 미 대사관 인질 사건으로 시작된 미국-이란 분쟁이 1981년 한풀 꺾인 것도 조정이다. 그간 경험을 되새겨, 그리고 조정에 대한 새로운 국제적 관심을 배경으로 지금의 위기도 최악의 상황을 피하는 타협점을 찾기를 기대한다.
모든 일이 그러하듯 국가 간 분쟁도 완벽한 해결은 쉽지 않다. 그러나 합리적인 차선책, 차차선책은 찾을 수 있다. 국제법원만큼 화끈하거나 시원하진 않아도 ‘저강도’ 옵션이 때론 요긴하다. 힘 뺀 절차지만 힘 있는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이재민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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