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균의 역사와 비평] 지금 세계는 1차 대전 직후의 카오스 보는 듯

2023. 10. 24. 00: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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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운 짙은 지구촌, 세계대전 일어날까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20세기 초 ‘전간기(戰間期)’로 불리는 시기가 있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부터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약 20년으로, 전쟁 사이의 시기라는 뜻이다. 인류 역사의 긴 호흡으로 보면 20년은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다. 그러나 전간기는 인류 역사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많은 교훈을 주고 있다.

선발 제국과 후발 제국의 전쟁

인류 역사상 가장 큰 규모의 전쟁이 4년 이상 계속되었던 제1차 세계대전은 총력전이면서 진지전이었기에 엄청난 인적·물적 피해를 초래했다. 여기에 더해 종전 직전부터 시작된 스페인 독감에 수많은 민간 희생자가 생겼다. 그러나 전쟁과 전염병에 따른 피해에도 불구하고 평화에 대한 절대적 교훈을 얻지 못했다.

「 1차 대전과 2차 대전 사이의 ‘전간기’에 대한 관심 커져
민족주의에 불황 겹치며 공산주의·파시즘·나치즘 대두
전쟁에 대한 반성 없이 또 다른 세계대전의 씨앗 키워
팬데믹과 국지전의 오늘…국가·민족주의로 세계가 양분

1차 세계대전 직후 세계 각국에서는 민족주의가 발흥했다. 2차 세계대전과는 달리 선발 제국과 후발 제국 사이의 주도권 전쟁이었기에 전쟁에 대한 철저한 반성이 없었고 전범재판도 열리지 않았다.

따라서 전쟁패배에 대한 책임을 제외하고 향후 전쟁을 막기 위한 조치가 이뤄지지 않았다. 전후 처리 문제도 전쟁에 대한 반성보다 배상 문제에 집중됐다. 국제연맹이 조직되고 1920년대 몇 차례 해군 군축을 위한 회의가 개최됐으며,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 된다는 켈로그-브리앙 조약이 맺어졌지만, 전쟁을 막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전 세계 뒤흔든 러시아 공산혁명

1916년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군 참호를 점령한 영국군의 모습. 전쟁의 후유증은 컸다. 1차 대전 이후 민족주의·파시즘·나치즘이 대두하며 세계는 다시 제2차 대전의 포화로 빠져들었다. [사진 위키피디아]

오히려 군축 조약에서 나타난 불균등성, 패전국의 식민지와 조차지 이양으로 인한 제국 간 불균형은 각국의 민족주의를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왔다. 패전국 독일은 과도한 배상으로 인접국에 대한 적대감을 키워 갔고, 승전국 일본은 독일의 조차지를 이양받았지만, 군국주의자 사이에선 군축회의에서 차별받았다는 생각이 퍼졌다.

전간기에 나타난 또 하나의 특징은 공산주의의 대두였다. 1차 세계대전이 진행 중이었던 1917년 러시아혁명은 전 세계를 뒤흔들었다.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의 틀로 발전했던 근대 세계에는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소비에트는 세계공산주의의 본부인 코민테른을 설립하고, 세계혁명을 목표로 유럽과 아시아의 공산당을 지원했다. 코민테른이 세계혁명을 겨냥한 만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사이의 전쟁은 불가피해 보였다.

공산주의의 대안? 파시즘의 등장

이런 상황에서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파시즘이었다. 1919년 3월 이탈리아에서 파시즘이 일어난 때는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이 정점에 달했을 때였다. 이탈리아 국민은 파시즘을 이용해서 공산주의와 노동조합 운동을 막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파시즘의 백색테러를 용인했고, 자유주의자들은 선거에서 파시즘과 연합했다.

거리의 백색테러 단체가 이제 정치무대에서 시민권을 획득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1922년 무솔리니가 39살의 최연소 나이에 총리직에 취임했다. 무솔리니와 파시스트들은 ‘정상화’를 외치며 ‘볼셰비즘’에 맞서 조국을 지키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들에게 반(反) 볼셰비즘은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수단에 불과했다. 파시스트들의 무혈 쿠데타에서 방관자이자 공모자였던 국민은 결국 파시스트들에 의해 억압과 동원의 대상으로 전락했다.

합법적으로 권력 장악한 파시즘

파시즘은 1929년 대공황으로 인해 더 큰 힘을 받게 됐다. 미국 정부는 시장에 대한 적극적 개입을 통해 내부에서 수요를 창출함으로써 공황을 극복하는 뉴딜 정책을 실시했다. 미국 자체의 생산력과 소비력으로 전대미문의 위기를 해결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탈리아와 독일, 일본의 사정은 달랐다. 후발 산업국가로서 생산력 수준이 높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내부 소비력과 자원 역시 부족했다. 이들 세 국가의 대안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강화된 민족주의와 파시즘을 결합하는 것이었다. 다른 민족국가로 세력을 확대함으로써 생산력과 시장을 확대하고, 외부로부터 자원을 충원하고자 했다.

이 과정에서 나치가 독일을 장악했다. 무솔리니를 정치적 스승으로 삼았던 히틀러의 나치당은 1928년 의회에서 고작 12석을 갖고 있었지만, 1932년 총선에서 37.2%의 득표율과 230석의 의석을 차지했다. 그리고 1933년 히틀러는 합법적으로 총리에 취임했다. 우파와 좌파의 합작을 두려워한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히틀러가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다. (이상 장문석, ‘전간기 유럽사회와 피시즘의 전개’)

독일의 나치즘과 일본 군국주의

이탈리아와 독일을 장악한 파시즘과 나치즘은 이제 유럽 전체를 전무후무한 최악의 학살터로 만들었다. 파시즘과 나치즘이 등장하는 과정을 보면 몇 가지 점에서 공통점이 있다.

첫째로 자신들의 힘이 아니라 좌파를 두려워한 자유주의자들에 의해서 합법적으로 정치 무대에 등장했다는 점이다. 자유주의 정치인과 국민의 안이함이 이들에게 정권을 넘겨주었다. 그리고 그들은 바로 파시스트들에 의해 팽당했다.

둘째로 전간기의 사회적 불안과 경제 대공황이 파시즘의 등장에 큰 배경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탈리아·독일 국민은 파시즘과 나치즘이 사회를 구원할 대안이라고 생각했다. 러시아 혁명으로 촉발된 볼셰비즘을 막기 위한 대안이기도 했다. 1930년대 이후 동아시아에서 히틀러의 『나의 투쟁』은 베스트셀러 중 하나였다. 일본에서는 1932년 2·26 쿠데타 실패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지지자들에 의해 만주국이 수립되고, 군국주의 정권이 탄생하는 배경이 됐다.

강대국 미국과 영국의 외교 실패

물론 국내 정치에서만 안이했던 것이 아니다. 당시 최강대국 영국과 미국의 대외정책 역시 허술했다. 1930년대부터 전쟁이 곳곳에서 잇따랐다. 1931년 일본 군국주의자에 의해 만주침략이 시작된 이래 이탈리아의 에티오피아 침략(1935년), 독일의 프랑스와의 국경불가침조약 파기(1936년)와 라인란트 및 오스트리아 병합(1938년)이 이어졌다. 이러한 침략행위 대해 국제사회의 항의가 이어지자 파시스트들은 국제연맹에서 탈퇴했다.

영국과 미국은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기는 했지만, 적극적이지 않았다. 독일이 소련을 공격한다면 공산주의를 위축시킬 수 있다고 판단했고, 일본이 확장하더라도 미국 영토인 하와이까지 침공하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 결과는 인류 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제2차 세계대전이었다.

최근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이 “세계대전이 또 발발할 것인가”이다. 실제 지금의 세계는 100여 년 전의 전간기와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경제적 불안은 2008년 경제위기로부터 시작됐지만, 팬데믹을 거치면서 더 깊어졌다. 인플레이션과 비정상적 소비, 요동치는 자원 가격과 주식시장은 마치 1920년대를 다시 옮겨 놓은 듯하다. 팬데믹은 또한 배타적인 민족주의의 고양을 불러일으켰다. 항산(恒産)이 없으면 항심(恒心)도 없기 마련이다.

또 다른 냉전, 위태로운 한국

30년 전 냉전이 해체됐지만, 또 다른 냉전이 시작되고 있다. 냉전과 냉전 사이의 전간기를 거치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1990년대 걸프전에서부터 유고 내전, 르완다 학살, 2000년대 초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의 전쟁, 그리고 최근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 팔레스타인 간의 전쟁이 연이어 발생하고 있다.

특히 최근의 전쟁은 미국과 중국, 즉 선발 제국과 후발 제국 사이의 힘겨루기와 연결된 것처럼 보인다. 영국과 미국이 한편에서, 그리고 다른 한편에서 독일·일본·이탈리아의 방공협정이 겨루고 있었던 1930년대를 연상케 한다. 국지전은 모두 국가주의·종족주의·민족주의로부터 비롯되고 있다.

이러한 상황이 한국에는 더 심각하게 다가온다. 경제도 안 좋은데 타이완 위기와 하마스의 이스라엘 공격은 북핵 무장이 고조된 한반도 상황에 또 다른 위기감을 던져주고 있다. 미국과 중국이라는 선·후발 제국은 모든 한국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여기에 더해 사회 내부에서는 극단적 분열이 나타나고 있다. 어떤 뉴스가 객관적인 뉴스인지 판단하기조차 어렵다. 또 우리 사회는 국내외적 위기에 대응할 힘조차 달려 보인다. 그런데도 정책적 대안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국민이 현명한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내년 총선에서 이 땅의 지도자들은 희망을 보여줄 수 있을까.

박태균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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