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은주의 아트&디자인] 단색화 거장 박서보의 ‘마지막 잎새’
“하루 사이 바람의 결이 바뀌었다. 가을인가(···) 내년에도 이 바람에 귀 기울일 수 있으면 좋으련만.”(9월 22일)
내년의 가을을 보고 싶다던 그의 바람은 끝내 이뤄지지 않았습니다. ‘한국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 화백은 자신의 SNS에 쓴 이 글을 마지막으로 지난 14일 92세를 일기로 영면에 들었습니다.
그는 참으로 성공한 예술가였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자라고, 교육받은 화가로 생전에 그처럼 세계 곳곳에서 개인전을 열며 이만큼 널리 사랑받은 작가도 거의 없었습니다. SNS엔 한스 울리히 오브리스트(영국 서펜타인갤러리 디렉터)를 비롯해 내로라하는 세계 미술 관계자들의 추모가 뜨겁게 이어졌습니다. 그러나 한 예술가의 성공이 명성이나 높은 작품 가격, 추모 열기로 헤아려지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몸이 너무 안 좋아 작업을 전혀 못 하는 날도 있다. 하루 3시간 만이라도 작업을 했으면 좋겠다”(7월 29일). 평생 작업을 해오고도 ‘하루 3시간’의 작업을 간절히 원했을 만큼 자기 일을 사랑했다는 점에서 그는 진정으로 성공한 작가였습니다.
그가 성공한 예술가로 보여준 남다른 면모는 또 있습니다. 후학 양성을 위해 40억원을 기탁해 박서보장학재단(배순훈 이사장)을 설립했고, 미술상 제정도 추진했습니다. 광주비엔날레를 통해 수여하려 했던 미술상 제정은 끝내 좌초됐지만, 박서보재단 관계자는 본지에 “어떤 형태로든 미술상 제정에 대한 고인의 뜻을 반드시 실천하겠다”고 밝혔습니다.
화가이기도 했지만, 교육자이기도 했던 그는 예술을 넘어 사회를 생각했습니다. 그는 “내 모든 것을 사회에 환원하고 가야겠다”고 했고 “(미술관 건립으로) 많은 사람이 그림을 소유하지 않고도 예술을 맘껏 향유할 수 있게 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2년 전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죽음도 삶이다, 죽음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삶”이라고 말한 그의 뜻이 이제 조금씩 헤아려집니다.
“단색화는 수행을 위한 도구이며, 행위의 무목적성과 무한반복성이 이뤄낸 결과물이다” “변화하지 않으면 추락한다. 변화해도 추락한다” “흙수저로 자라도, 외국 유학 못 가도 ‘진실한 내 것’이 있으면 (언젠가) 인정받는다” “사람들의 분노와 고통을 흡인지처럼 빨아들이고 편안함과 행복의 감정만을 남겨야 한다. 그게 내가 생각하는 예술이다”.
그가 평생 도 닦듯이 반복했던 붓질처럼 수차례 반복해 들려줬던 말이 계속 귓가에 맴돌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2년 전 인터뷰에서 그가 들려준 말이 가장 잊히지 않습니다. “한국의 예술은 질(質)을 추구하는 게 아니라 격(格)을 추구한다. 우리 미술의 격을 이해하고 기억해달라.” 그러고 보니 한국 미술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자리가 절대 작지 않습니다. 그가 작품과 삶으로 보여준 격의 의미를 곱씹게 되는 가을입니다.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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