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길밖에 없다’던 이건희 회장 [김선걸 칼럼]
덕분에 오래 잊고 있었던 故 이건희 회장과 신경영을 떠올렸다. 이 회장은 1993년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꿔라”라며 대변혁을 주창했다. 현장기자의 작은 특권은 다양한 사람을 직접 만날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타이쿤(Tycoon) 이 회장도 몇 차례 조우했다.
한 번은 2003년 체코 프라하에 ‘2010년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단’으로 갔을 때, 또 한 번은 2013년 새 정부 출범 직후 미국 워싱턴에서 정상회담 풀기자를 맡았을 때다.
10년 지났지만 2013년의 장면은 아직 또렷하다. 5월 8일 워싱턴DC 백악관 옆의 더 헤이아담스호텔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 후 대기업 총수들을 처음 만나는 자리였다. 건강이 악화된 이 회장은 양쪽에서 직원들이 부축해 들어왔다. 잘 주무셨냐는 인사를 할 때만 해도 특유의 어눌한 말투가 잘 안 들렸다. 귀를 바짝 대고 대화하며 속으로 ‘쓸 만한 멘트는 안 나오겠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당시 정부가 추진하던 창조 경제의 IT 부분을 간단히 언급하며 질문하자 아주 또렷하게 “그 길밖에 없습니다”라는 단호한 대답이 돌아왔다. 인상적이어서 수첩에 얼른 메모했던 기억이 있다. 사실 그 전에 유수의 다른 대기업 회장들 코멘트도 땄다. 다 좋은 말들이었지만 대부분 두루뭉술했다. 반면에 이 회장은 말이 느렸지만 질문마다 메시지가 명확하고 단호했다. 당일은 새벽에 이른바 ‘윤창중 성추행’이 있던 날이다. 경황이 없던 중에도 이 회장 멘트는 열심히 청와대 출입기자단에 전달했던 기억이 난다.
돌아보면 이 회장 건강은 해외 출장에 무리였던 것 같다. 행사 때 경제수석이 “불편하시니 앉아서 발언해달라”고 할 정도였다. 결국 그로부터 정확히 1년 뒤인 2014년 5월에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후 다시 일어나질 못했다.
올해 학술대회를 보니 공감되는 분석이 몇 개 있다. 로저 마틴 토론토대 명예교수는 이 회장을 ‘예고 홈런’을 실현한 홈런왕 베이브 루스에 비유했다. 반도체, 스마트폰 등 미래의 목표를 정한 뒤 현실서 일궈냈다는 것이다. 실제 반도체의 경우 부친인 이병철 창업주나 직원들이 반대할 때 사재를 들여 거목 삼성전자로 키워냈다. 스마트폰도 세계 최강자인 노키아마저 회피할 때 밀어붙여 결국 최대 메이커가 됐다. 수조원 투자하는 사업은 경영자가 ‘이 길밖에 없다’고 책임지지 않으면 절대 이룰 수 없다.
이 회장은 결단을 이뤄내는 방법도 명쾌했다. 바로 ‘인재 경영’이다. 패트릭 라이트 사우스캐롤라이나대 교수는 “신경영의 요체는 최고의 보수로 최고급 두뇌를 영입하는 것”이라며 “특히 학력이 아닌 기술(역량) 수준에 기반해 채용한 정책은 30년이 지난 현재 구글과 IBM 등이 그대로 따라한다”고 말했다. 실제 이 회장은 2002년 “S급 인재 10명을 확보하면 회사 1개보다 낫다”며 사장단 인사 평가의 40%를 핵심 인력 확보 여부로 정하겠다고 공언했다. 사장들은 살아남기 위해 인재들을 대거 영입했다.
2013년의 기억으로 돌아간다. 그날 행사장 밖에는 이재용 당시 삼성전자 부회장이 있었다. 필자가 들어가자고 해도 앉지도 않고 계속 서서 부친을 기다렸다. 1년 뒤 이 회장이 쓰러지고 정권이 바뀌며 고초를 겪을 줄 짐작조차 못했을 것이다.
신경영의 요체는 기업가 정신과 인재 경영이었다. 진정으로 기업에는 ‘그 길’밖에 없다.
실제 기업은 더 이상 잘할 수 없을 정도로 잘하고 있지 않은가. 대한민국에 기업을 훼방하고 상처 내는 세력이 늘어나는 게 유일한 걱정거리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31호 (2023.10.25~2023.10.3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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