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영 30년…‘전략적 변곡점’ 맞은 삼성
故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은 1993년 6월 7일 “마누라와 자식만 빼고 다 바꿔라”라는 말로 잘 알려진 ‘신경영 선언’을 했다. 신경영 선언은 삼성전자가 국내 일류를 넘어 세계 초일류 기업으로 도약하는 변곡점이 됐다. 올해는 이건희 회장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신경영을 선언하고 본격적인 경영 혁신에 나선 지 30주년이 되는 동시에 고인의 3주기다.
이를 기념해 지난 10월 18일 삼성전자 서초사옥에서는 ‘이건희 회장 3주기 추모·삼성 신경영 3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가 열렸다. 학술대회에는 로저 마틴 토론토대 명예교수를 비롯 세계적인 석학들이 참석해 선대회장의 경영 철학을 돌아보는 한편, 새로운 신경영에 관한 제언이 쏟아졌다. 요약하면, 전문가들은 삼성전자가 반도체 산업 질서가 재편되는 ‘전략적 변곡점(Strategic Inflection Point)’과 맞닥뜨렸다고 진단하면서 ‘비허가형 조직(Permissionless Organization)’ 구축 등을 통해 ‘고몰입 인적 자원 시스템’으로 재편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재용 회장은 학술대회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지만 재계에서는 이날 행사가 ‘JY 시대’ 삼성에 요구되는 신경영 화두를 모색하려는 목적도 있다고 본다.
급변하는 질서 속 경쟁 우위 재창조
기조연설에 나선 로저 마틴 명예교수는 이건희 선대회장을 ‘전략 이론가(Strategy Theorist)’이자 ‘통합적 사상가(Integrative Thinker)’로서 면모를 보였다고 돌아봤다. 특히 그가 강조한 대목은 통합적 사상가로서의 면모다. ‘통합적 사고’는 로저 마틴 교수의 2007년 저서 ‘The Opposable Mind’에서 제시된 핵심 개념이다.
그에 따르면 보통 경영자들은 분석적 사고(신뢰성)와 직관적 사고(타당성) 가운데 어느 한쪽을 택하는 식으로 의사 결정을 한다. 통합적 사고는 서로 상반되는 유형의 사고방식 가운데 어느 한쪽을 버리고 다른 하나를 선택하는 게 아니라, 개별 요소를 아우르는 선택을 함으로써 각각의 경우만을 선택했을 때보다 더 창의적인 해결책을 만들어내는 능력을 일컫는다.
통합적 사고는 로저 마틴이 강조한 ‘혁신의 깔때기’를 통해 구체적인 경로를 짐작할 수 있다. 로저 마틴은 그의 저서와 논문 등에서 “지식의 발전은 깔때기 모양을 닮았다”며 이 깔때기를 ‘지식 생산 필터’라고 불렀다. 이 필터는 크게 미스터리, 휴리스틱, 알고리즘 등 세 단계로 구성된다. 불규칙적인 카오스적 현상(미스터리)을 보고 겪으며 나름의 경험칙을 확립(휴리스틱)하는 과정을 거쳐 루틴과 원칙으로 매뉴얼화(알고리즘)하는 의사 결정을 내리는 것이 통합적 사고를 구현할 수 있는 경로라는 게 로저 마틴의 주장이다.
신경영 선언을 예로 들면, ‘삼성이 초일류 기업으로 도약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인가’가 미스터리, ‘삼성에는 전사적인 변화가 필요한 상황이다’가 휴리스틱, ‘마누라와 자식 빼고는 다 바꾸는 신경영 선언’이 알고리즘에 각각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리타 맥그래스 컬럼비아대 경영대 교수는 신경영이 경영 환경이 급변하는 오늘날 성공 전략과 상당 부분 흡사하다고 진단했다.
리타 교수는 ‘경쟁 우위’를 강조한 마이클 포터 하버드대 교수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면서 학계에서 스타로 떠오른 인물이다.
포터 교수는 1979년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에 ‘경쟁력이 어떻게 전략을 만드는가(How Competitive Forces Shape Strategy)’라는 논문을 싣고 다섯 가지 요인이 특정 산업의 경쟁 강도와 수익성을 결정한다는 주장을 폈다.
맥그래스 교수는 ‘경쟁우위의 종말(The End of Competitive Advan tage)’이라는 책에서 포터 교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다. 맥그래스 교수 주장을 요약하면 “과거에는 산업 간 경계가 명확했지만 이 경계가 무너진 오늘날에는 전통적 의미의 경쟁 우위는 무의미하며 오히려 같은 산업 영역에 있지 않은 기업이 가장 큰 경쟁자, 즉 ‘링 밖의 챔피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에 비춰, 신경영 선언은 급변하는 글로벌 전자 산업 판도를 정확하게 간파하고 경쟁 우위가 변화하는 양상을 제대로 짚어내 오늘날 삼성을 초일류 기업 반열로 올려놨다는 진단이다.
맥그래스 교수는 “이건희 회장은 기업 경쟁 우위에는 수명 주기가 있으며, 그 주기가 점점 짧아지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며 “영원한 위기 정신, 운명을 건 투자, 신속하고 두려움 없는 실험, 실패를 통한 학습 등 오늘날 성공 전략과 완전히 일치하는 방식으로 신경영을 수립해 삼성을 초일류 기업으로 일궜다”고 평가했다.
고몰입 조직 구축 과제
신경영을 발전적으로 계승할 여러 제언도 잇따라 주목받았다.
로저 마틴 교수는 ‘고몰입 인적 자원 관리 시스템’ 구축을 제언했다. 아마존, 구글, 애플, 테슬라 등 글로벌 혁신 기업에서는 구성원의 자발적이고 과감한 시도, 내재적 동기 부여, 직무에 대한 높은 헌신과 몰입 등을 강조하는 고몰입 인적 자원 관리 시스템이 탄탄히 구축돼 있다. 고몰입 인사 제도는 실패를 권장하므로 조직의 단기 성과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혁신 기업에서 고몰입 조직이 확산하는 것에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 학계 진단이다.
즉, 기술 변화가 불연속적이고 상시적인 4차 산업혁명 환경에서는 기존 경쟁 우위를 지키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경쟁 우위를 남보다 먼저 만들어내는 조직이 생존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삼성 최고경영진 역시 창조적 혁신과 민첩성 등을 동기 부여할 수 있는 완전히 새로운 형태의 고몰입 조직을 구축해야 한다는 게 마틴 교수의 제언이다.
그는 “삼성이 직원의 몰입도를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려 건전한 성장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직원들의 ‘행복의 삼위일체’ 달성이 필요하다”며 커뮤니티로부터의 가치 인정, 타인의 가치 인정, 스스로의 가치 인정 등 세 가지 요소의 조화를 강조했다.
맥그래스 교수는 경쟁 우위의 가변성, 영원한 위기 정신, 속도감 있는 모험적 시도, 비허가형 조직 구축, 발견 중심적 리더십, 전략적 변곡점에 대한 단호한 조치 등 6가지 화두를 던져 이목을 끌었다. 이 가운데 경쟁 우위의 가변성 등 4가지 요소는 신경영을 발전적으로 계승한 차원이라면, 비허가형 조직과 전략적 변곡점 등 두 가지 화두는 JY 시대 삼성에 새롭게 접목할 만한 화두라는 게 학계 진단이다.
비허가형 조직은 마이클 J. 시코르스키가 주창한 개념이다. 이 조직은 인공지능(AI)을 비롯한 고도화된 디지털 기술을 사용함으로써 조직 구성원들이 보고와 조정의 ‘무한 루프’에 갇히지 않고 창의적이고 협력적인 잠재력을 발휘하게 해준다는 점에서 ‘비허가형’이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쉽게 말해, 신기술을 적극 활용해 계층적 칸막이를 줄이거나 제거함으로써 각각의 팀에 독립성과 책임성을 부여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조직 내 부서 간 장벽인 ‘사일로(부서 이기주의로 비효율의 원천)’를 끊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전략적 변곡점은 현재 삼성이 처한 경영 환경에 비춰 새로운 화두로 꼽힌다. 이는 앤디 그로브 인텔 전 CEO가 주장한 개념으로 기업의 생존과 번영을 결정짓는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시점을 뜻한다. 전략적 변곡점에 관한 대응 역량을 높이기 위해서는 빠르면서도 수평적인 정보의 흐름이 중요한데, 결국 이런 역량은 비허가형 조직 확산 등 조직 재구성(Reconfiguration)으로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이외에도 삼성이 귀담아들을 만한 제언이 잇따랐다.
패트릭 라이트 사우스캐롤라이나대 경영대 교수는 비즈니스 가속화, 정보 동원, 인적 역량 향상, 협업 촉진, 복잡성 단순화 등 5가지 과제를 제안했다. 김태완 카네기멜론대 경영윤리 교수는 삼성 내부에 윤리 전문가(AI 윤리, 윤리 이론, 정치 철학 등)로 이뤄진 ‘지속가능경영전담팀’을 구성할 것을 조언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과학대 교수는 “미래 세대에게도 매력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제2의 신경영’이 필요하다”며 디지털 경영(디지털 트랜스포메이션 가속), 개성 경영(자율성 독려), 컬래버 경영(협력 경영), 인권 경영 등을 키워드로 꼽았다.
[본 기사는 매경이코노미 제2231호 (2023.10.25~2023.10.31일자) 기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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