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구세력에 짓밟힌 정지상과 묘청
필자는 이제까지 개인사 중심의 인물평전을 써왔는데, 이번에는 우리 역사에서, 비록 주역은 아니지만 말과 글 또는 행적을 통해 새날을 열고, 민중의 벗이 되고, 후대에도 흠모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는 인물들을 찾기로 했다. 이들을 소환한 이유는 그들이 남긴 글·말·행적이 지금에도 가치가 있고 유효하기 때문이다. 생몰의 시대순을 따르지 않고 준비된 인물들을 차례로 소개하고자 한다. <기자말>
[김삼웅 기자]
고려 500년 간에 숱한 문인걸사가 살았다. 그 중에 제일류의 시인이요 거리낌 없이 곧은 말을 하고 명문을 남긴 이는 정지상(鄭知常 ?~1135)이다. 고려 중기의 관료이자 시인으로 서명(西京) 출신이다.
일찍이 과거에 급제하여 인종 5년(1127) 좌정언으로 당대의 권세가 이자겸을 제거한 공을 믿고 발호하는 척준경을 탄핵해 유배보내는 활약을 하였다.
중국의 사신들이 고려 문인들의 시나 시조를 하찮게 여기며 비웃었으나 정지상의 작품만은 예외였다.
비 개인 긴 둑에는 다북한 풀빛
슬픈 노래 남포로 님을 보낸다
대동강 물이 어느 제 다할 것인가
해마다 이별의 눈물 창파를 보태니.
ㅡ 대동강 시
복사꽃 하늘 하늘 새소리는 지지배배
집을 메운 청산은 아지랑이 자욱
기우 쓴 오사모(관복을 입을 때 사대부들이 쓴 모자)
꽃동산에 취하여 강남꿈 즐기네.
ㅡ 취후시(醉後詩)
당대의 또 다른 권세가 김부식(<삼국사기> 저자)이 정지상을 시기하였다. 그의 시문이 자신을 압도하면서 생긴 시샘이었다. 어느날 김부식이 정지상과 산사(山寺)에 가서 놀다가 정지상이 시 한구를 지었다.
사원의 불경소리 그치니
하늘이 유리알처럼 맑구나.
김부식이 천고(千古)의 절조(絶調)라며 싯구를 자기에게 양도하라고 요청했다. 시인이라면 쉽게 들어줄 수 없는 청이었다. 정중하게 거절한 그에게 김부식의 증오심은 더욱 거칠어졌다.
당시 고려에서는 서경천도가 정치적인 큰 이슈였다. 승려 묘청이 검교소감(檢校少監) 백수한 등과 인종에게 서경천도를 요청하는 상소를 하였다.
서경은 그 업이 이미 쇠하여 궁궐이 다 소진하였은 즉 왕기(王氣)가 다하고 서경의 임원역은 음양가의 이른바 큰 꽃송이 된 형세이다. 만일 그곳에 궁궐을 세우고 왕께서 이어하시면 가히 천하를 통일하고 금국(金國)이 스스로 와서 항복하고 36국이 다 조공을 바치게 된다.
당시 고려사회는 풍수지리설과 도참사상이 맹위를 떨치고 있었다. 개경은 이자겸의 난으로 궁전이 불타고 정치 기강이 해이해서 수도 개경의 분위기가 흉흉했다. 거기에 날로 강성해진 여진족의 외교적 압력으로 고려는 시달리고 있었다. 묘청 등의 상소에 따라 인종은 직접 서경을 방문하여 임원역에 신궁을 짓도록 하고 추운 겨울에 공사가 착수되었다.
대화궁이 낙성되자 인종은 서경에 행차하여 신궁에 들어갔다. 이에 힘 입은 정지상과 묘청 등은 이 기회에 왕을 황제라 칭하고 연호도 따로 제정하며 금국징벌 등 자주적인 기백과 내정혁신안을 제시하였다.
개경에 정치적 뿌리를 둔 김부식 등 기득세력은 만약 수도가 서경으로 옮겨지면 곧 자신들의 세력이 크게 꺾일 수밖에 없으므로 한사코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서경천도는 이념문제에서 이해관계로 바뀌게 되고, 개경세력과 서경세력의 대치로 굳어졌다.
개경의 기득권 세력은 막강했다. 결국 서경천도는 없었던 일이 되고, 풍파를 일으킨 묘청 등을 단죄하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묘청 등 서경세력은 청제건원, 금국정벌, 자주적 기백과 내정개혁 등의 기치를 들고 서경에서 반기를 들었다.
김부식이 반군진압 사령관인 평서원수로 임명되어 즉각 토벌에 나섰다. 김부식은 출정에 나서면서 먼저 개경에 남아 있는 정지상·백수안 등을 처단하고 파죽지세로 서경으로 진격하였다. 김부식이 정지상을 죽인 것은 과거 사원도 크게 적용했다.
공방 끝에 전세가 반군 측에 불리해지면서 배신자들이 나타났다. 반군 측의 지도자 조광이 묘청·유담 등의 목을 베어 관군에 바쳤으나 투항이 거부되자 이들은 결사항전으로 맞섰다. 1년 여의 항전 끝에 1136년 2월 반군지도자들이 자결하면서 서경천도의 꿈도 좌절되고 말았다.
서경세력이 내건 자주정신·국정개혁 등 당위에도 불구하고 실패한 것은, 황당한 풍수도참설로 인한 비현실적인 주장과 전략상의 미숙이었다. 즉 개경에 있는 정지상·김안 등 개혁파 인사들을 적진에 두어 앉아서 죽게 만들고, 개경의 기득세력과 대결할 충분한 군사력을 갖추지 못한 채 반기를 든 것이다.
단재 신채호는 '서경전역'의 실패가 고려, 조선, 1천 년 동안의 가장 큰 사건이라 분석한다.
옛 성현의 말이면 그대로 좇고 선대(先代)의 일이면 그대로 행하여 세상을 온통 잔약·쇠퇴·부자유의 길로 들어가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가. 왕건의 창업 때문인가, 위화도의 회군 때문인가, 임진왜란인가, 병자호란인가, 사색당파인가, 양반과 상민의 계급 때문인가. 문을 귀하게 여기고 무를 천시한 폐단인가, 정주학설(程朱學說)이 끼친 해독 때문인가. 무슨 사건이 앞에서 말한 종교·학술·정치·풍속 각 방면에 노예성을 낳게 하였는가. 나는 한 마디로 대답하여서 고려 인종 13년(1135년) 서경전역(西京戰役) 즉 묘청이 김부식에게 패함이 그 원인이라고 한다.
서경전역의 양편 병력이 서로 수만 명에 지나지 않고 전역의 기간이 2개 년도 안 되지만 그 전역의 결과가 조선사회에 끼친 영향은 서경전역 이전에 고구려의 후예요 북방의 대국인 발해 멸망의 전역보다도, 서경전역 이후 고려 대 몽고의 60년 전역보다도 몇 갑절이나 더한 사건이니 대개 고려에서 이조에 이르는 1천 년 사이에 서경전역보다 더 중요한 대 사건이 없을 것이다.
서경전역을 역대의 사가들이 다만 왕의 군대가 반란의 무리를 친 전역으로 알았을 뿐이었으나 이는 근시안적 관찰이다. 그 실상은 전역이 곧 낭불양가(郎佛兩家) 대 유가(儒家)의 싸움이며, 국풍파(國風派) 대 한학파(漢學派)의 싸움이며, 독립당(獨立黨) 대 사대당(事大黨)의 싸움이며, 진취사상 대 보수사상의 싸움이다.
묘청은 곧 전자의 대표요, 김부식은 곧 후자의 대표이었던 것이다. 이 전역에 묘청 등이 패하고 김부식이 승리하였으므로 조선사가 사대적·보수적·속박적 사상 즉 유교사상에 정복되고 말았거니와 만일 이와 반대로 김부식이 패하고 묘청 등이 이겼더라면 조선사가 독립적·진취적 방면으로 진전하였을 것이니 이 전역을 어찌 1천년에 제일대사건이라 하지 아니하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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