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로 승승장구, 대법관 후보도 거절한 그가 고향에 온 이유
누군가에게 고향은 출신지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같은 하늘 아래 공기부터 다르게 느껴지는 시간의 무게로 잠깐 낯설다가도 곧바로 안정감을 느끼는 마음의 공간이다. 일자리를 찾아, 원대한 꿈을 위해 정든 고향을 떠나 각지를 떠돌며 밤낮없이 일에 매달릴 때에도 떠올리면 따뜻하고 언제나 그리운 곳이 고향일 것이다. 이처럼 여전히 고향 함양을 그리며 살아가는 향우들이 전국 곳곳에 있다. 주간함양은 매달 한 편씩 연재되는 ‘함양 향우를 찾아서’ 특집을 통해 각지에 있는 고향 향우들을 만나 끈끈한 정을 느껴보고자 한다. <기자말>
[주간함양 김경민·최경인]
▲ 박종연 변호사 |
ⓒ 주간함양 |
"여름에 친구들과 투망을 들고 강에 뛰어다니면서 물고기를 잡던 시절이 아직도 생생하네요. 새까맣게 탄 얼굴로 어탕을 끓여먹기도 했죠(웃음)"
고향 함양을 생각하면 순수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리면서 자연스레 웃음이 나오는 박종연 변호사. 머물고 있는 경남 진주와 그리 멀지 않은 고향이지만 아련한 느낌은 아직 남아있는 듯하다
서울에서 오랜 기간 법관 생활을 해온 그는 고향에 대한 애정으로 인근 지방 진주로 내려왔고 변호사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박 변호사는 무료법률상담 서비스와 사회공헌 활동을 이어오며 법조계의 귀감이 되어온 인물이기도 하다. 자랑스러운 향우 박 변호사를 진주시 신안동에서 만났다.
판사직을 내려놓고 지방으로
박 변호사는 경남 함양 안의면 이전리에서 태어났다. 안의초·중·고를 마치고 서울로 올라가 서울대학교 법대를 졸업했다. 1982년도에 제24회 사법시험에 합격하고 서울민사지법 판사로 임관하면서 법조인으로서의 삶을 시작한다.
서울남부지원·강경지원·대전고등법원·서울고등법원(대법원행정처 송부심의관 겸임) 등에서 판사를 지내며 법조인으로서 승승장구의 길을 걷던 중 돌연 사직한 뒤 1996년에 지방으로 돌아간다. 판사들이 선망하는 근무처인 대법원행정처 근무를 내려놓고 온갖 혜택을 뿌리치는 등 그의 행보가 다수 언론에 보도되면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 당시 개인적으로 참 고민이 많았습니다. 법관 생활 10여년을 해오면서 앞으로 어떻게 사는 것이 나에게 있어 바람직한 삶일까라는 고민을 계속해서 이어갔습니다. 아무래도 시골 사람들은 고향에 대한 애정과 그리움이 커서 회귀성이 더 강하게 작용하는 면도 있구요. 서울에서는 저 같은 사람이 없어도 잘 돌아갈 것 같았고 상대적으로 열악한 고향을 포함한 지방으로 가면 제가 좀 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습니다. 결국 의지할 수 있는 고향 인근으로 내려와 나머지 인생 후반부를 살아가면서 스스로에게 좀 더 충실하자고 결정을 내린 것이죠."
박 변호사는 1996년 변호사사무소를 개업하고 서민들을 대상으로 매일 무료 법률상담을 지속해왔다. 더불어 공익 소송을 제기하며 잘못된 법제도를 개선하려 법조인으로 노력했다.
대표적으로 '미결수 수의 착용에 대한 국가 손해배상 청구'가 있다. 1997년도 당시 은행 자금 횡령 재판과 관련해 유죄 판결을 받지 않은 구속된 피고인에게 푸른 수의를 입히는 것은 부당하다며 제도 개선을 목적으로 법원에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법무부 장관의 미결수 사복 착용 제도 개선 발표를 이끌어낸 만큼 파급력이 상당했다.
"한때 은행 횡령과 관련 구속된 피고인 사건을 맡은 바 있었습니다. 피고인은 자신이 누명을 썼다며 무죄를 주장하면서 억울함을 토로했는데 그 과정에서 푸른 수의를 입고 가족들 앞에 서야 하는 현실을 너무 힘들어했어요. 이미 선진국에서는 무죄 추정의 원칙에 따라 유죄 판결을 받지 않은 피고인에겐 수의를 입히지 않는 상황이었던 점을 볼 때 인권 보호에 있어 해당 제도가 부당하다는 문제의식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법원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고 언론에서도 조명하면서 법무부 장관이 미결수 사복 착용 제도 개선을 발표하는 것으로 이어졌죠. 노태우 전 대통령이 재판을 받고 있었는데 사복을 입고 나타나는 모습을 보면서 좀 새로운 느낌을 받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법 모르는 서민들 위해 직접 만든 소송 대응 안내문
박 변호사의 이같은 문제의식은 판사로 재직하던 때부터 이어져왔다. 판사 초임시절에는 법을 모르는 국민들을 위해 소송 대응 안내문을 만들어 피고들에게 전달하는 등 국민들이 소송대응에 있어 부당한 일을 겪지 않도록 세심한 노력을 기울였다. 해당 안내문은 현재까지도 전국 법원에서 소송 대응 안내문으로 사용되고 있다.
"피고가 갑자기 법원에서 생전 처음 소장을 받아보면 당황하기 일쑤입니다. 그러다 보니 대응에 있어서도 어려움이 많고요. 또 그때 당시에는 변호사를 살 돈이 없는 사람이 태반이었습니다. 그런 부분들이 마음이 쓰였죠. 소송 대응하는 요령만 제대로 이해해도 억울하고 부당한 일을 안 당할 수 있는데. 그래서 일반인들 시각에 맞춰서 소송 안내문들을 제가 만들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판사 생활하면서 보람 있었던 일로 기억이 되네요."
국민의 눈높이에 맞추며 법조인의 삶을 살아가던 그는 2014년 대법원으로부터 대법관 후보가 됐다는 통보를 받는다. 큰 영광의 자리이지만 결국 사양했다. 판사 생활을 접을 때 다짐했던 나머지 인생 후반부를 지역 이웃들과 지내며 보내겠다는 뜻은 아직 유효했던 것이다.
"진주로 내려갈 때 이미 종신할 생각으로 마음을 다 잡은 상태였습니다. 삶을 살아오면서 사회로부터 많은 혜택을 받았고 고향을 포함한 지역 이웃들에게 받은 혜택을 갚는 마음으로 책임을 다해야 된다고 생각했죠. 우스갯소리지만 판사 생활 말년에는 고향과 가까운 거창지원장으로 지원을 넣기도 했었습니다. 그만큼 돌아가고픈 갈망이 있었죠. 또 제가 원래 높은 자리에 대한 의욕이 없기도 하고 내가 만족할 수 있는, 나에게 맞는 생활에 충실하는 방향으로 항상 결정하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현재 그는 청각 장애로 재판 대응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1심에서 패소한 한 노인을 돕고 있다. 억울하지만 의사소통의 어려움으로 위기에 처한 노인을 돕고자 필담을 하며 변호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등 박 변호사는 지역 이웃과 호흡하며 법조인으로서의 삶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예정이다.
박 변호사는 끝으로 고향 함양에 대한 따뜻한 애정을 표했다.
"제 고향이 함양이라는 데 대해서 항상 마음에 의지가 되고 친구들도 아직 많이 있어서 생각만 해도 따뜻합니다.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주시고 고향에 계신 모든 분들이 항상 행복하시길 바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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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함양뉴스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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