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발 헤어지자고 해줘" 죽음 앞둔 남자의 애원

양형석 2023. 10. 23.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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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시절, 우리가 좋아했던 영화] 허진호 감독의 네 번째 장편 영화 <행복>

[양형석 기자]

지난해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수리남>에서 한인교회 목사로 위장한 수리남의 마약 대부 전요환을 연기한 황정민은 1억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한 한국의 대표 배우다. 지금이야 정치인부터 경찰, 검사, 외교관, 무당, 산악인까지 각종 캐릭터를 모두 소화할 수 있는 만능 배우가 됐지만 2000년대 중반까지 황정민은 '멜로' 이미지가 강했다. 지금까지도 황정민의 대표작을 2005년작 <너는 내 운명>으로 기억하는 관객들이 적지 않을 정도다.

2003년 김지운 감독의 <장화, 홍련>으로 스타덤에 올랐고 올해 <거미집>을 통해 김지운 감독과 20년 만에 재회했던 임수정도 '멜로의 여왕'으로 유명하다. 물론 <각설탕> 같은 가족 드라마나 <시간이탈자> 같은 판타지 스릴러 등 다양한 작품에 출연했지만 임수정의 필모그래피 중 상당수는 멜로물로 채워져 있다. 특히 2004년에 방영됐던 드라마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현재까지도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그의 대표 멜로드라마다.

황정민과 임수정이 각각 멜로로 이름을 날리던 2007년 두 사람은 1999년 장편영화 데뷔 후 멜로영화만 세 편을 만들었던 '멜로 전문 감독'을 만났다. 바로 < 8월의 크리스마스 >와 <봄날은 간다> <외출>을 연출했던 허진호 감독이었다. 그렇게 '멜로 장인' 허진호 감독과 황정민,임수정은 2007년 시골 요양원에서 만난 남녀의 이야기를 통해 사랑과 행복에 대해 생각하게 되는 멜로영화 <행복>을 만들었다.
 
 <행복>은 허진호 감독과 황정민,임수정으로 이어지는 '멜로장인' 3인이 뭉쳐서 만든 영화다.
ⓒ (주)쇼박스
 
청춘 멜로와는 다른 '어른 멜로'의 매력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슴 설레는 멜로 감성은 청춘들의 전유물이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실제로 멜로 장르의 영화나 드라마는 한창 떠오르는 풋풋한 젊은 배우들이 주인공을 맡는 경우가 대다수다. 하지만 진실되고 때로는 격정적인 사랑의 감정이 찾아오는 시기는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다. 가끔은 '숙성이 잘된 김치'처럼 잘 만들어진 '어른들의 멜로 영화'가 중년 이상의 성숙한 관객들을 사로잡기도 한다.

여름이 끝날 무렵인 지난 8월 15일에는 <달짝지근해: 7510>이라는 다소 독특한 제목의 영화가 개봉했다. 전성기 시절이던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까지 출연하는 영화마다 흥행에서 큰 재미를 보지 못했던 김희선이 2005년 홍콩영화 <신화: 진시황릉의 비밀> 이후 18년 만에 선택한 영화였다. 중년의 로맨스를 유쾌하게 풀어간 <달짝지근해>는 전국 138만 관객을 동원하며 손익분기점을 돌파했다(영화관입장권 통합전산망 기준).

박찬욱 감독에게 칸 영화제 감독상을 안겨준 <헤어질 결심>은 변사사건을 수사하게 된 형사(박해일 분)가 사망자의 아내(탕웨이 분)를 만나면서 의심과 관심을 동시에 느끼게 되는 독특한 정서의 멜로 영화다. 평론가들 사이에서는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호평을 얻었던 <헤어질 결심>은 박해일과 탕웨이를 비롯한 배우들의 호연과 박찬욱 감독의 섬세한 연출이 더해지면서 전국 189만 관객으로 관객들에게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2016년 BBC에서 선정한 '21세기 100대 영화 순위' 2위에 오른 왕가위 감독의 걸작 <화양연화> 역시 '중년 멜로'의 진수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실제로 <화양연화> 출연 당시 양조위는 만 38세, 장만옥 역시 만 36세로 '청춘'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하지만 두 배우는 왕가위 감독 특유의 미장센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완숙한 연기를 선보이면서 영화 제목이 의미하는 '인생에서 꽃과 같이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시간'을 잘 표현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주연과 연출, 제작을 맡은 동명 소설 원작의 <메디슨 카운티의 다리>는 중년을 넘어 노년이 얼마 남지 않은 남녀의 사랑을 담은 작품이다. 특히 여주인공 프란체스카(메릴 스트립 분)는 남편과 아이들까지 있는 가정주부였다. 하지만 로버트(클린트 이스트우드 분)는 프란체스카에게 "애매함으로 둘러싸인 이 우주에서 이런 확실한 감정은 단 한 번만 오는 거요"라는 명대사를 던지며 함께 떠나자고 고백한다.

헤어진 후 뒤늦게 깨닫는 진정한 '행복'
 
 <행복>에서는 '그렇게 두 사람은 오래 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같은 식의 동화 같은 결말은 나오지 않는다.
ⓒ (주)쇼박스
 
서울에서 클럽을 운영하던 영수(황정민 분)는 병원에서 간 경변 판정을 받고 운영하던 클럽을 친구에게 넘기고 시골 요양원 '희망의 집'으로 들어온다. 희망의 집에는 숨이 차면 죽을 수도 있는 중증 폐질환을 앓고 있는 은희(임수정 분)가 있었고 여전히 가슴이 뜨거운 두 사람은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며 점점 가까워진다. 그렇게 요양원에서 소문난 커플이 된 영수와 은희는 요양원을 나와 두 사람만 따로 살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허진호 감독이 만든 <행복>이 흔한 동화의 결말처럼 '그렇게 두 사람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로 끝날 리 없다. 희망의 집에 들어와 은희를 만나기 전, 누구보다 자유분방하게 살았던 영수는 친구 동준(류승수 분)과 옛 연인 수연(공효진 분)의 방문을 계기로 흔들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잠시 다녀온 서울에서 과거의 화려했던 생활을 다시 경험한 영수는 은희와의 시골생활이 점점 지루하고 짜증나게 느껴진다. 

결국 영수는 은희에게 "제발 나에게 '헤어지자'고 말해줘"라고 애원하고 그렇게 두 사람은 여느 연인들처럼 이별을 선택한다. 하지만 자신의 '행복'이었던 은희와 헤어진 영수는 급격하게 건강이 악화되고 목욕탕에서 피를 토한 후 병원에 입원한다. 그렇게 폐인이 된 영수는 희망의 집 원장으로부터 죽음을 앞둔 은희의 소식을 듣게 되고 은희를 하늘나라로 보낸 영수는 은희와의 추억이 있는 희망의 집으로 돌아간다.

<행복>은 사랑의 완성을 통해 이야기가 마무리되는 여느 멜로 영화들과 달리 영원하지 못한 사람의 마음과 변심, 그리고 잔인한 이별의 과정을 가감 없이 보여주면서 사랑이 가진 양면성에 대해 이야기하는 영화다. <행복>에서는 "XXX, 네가 사람이니?" 같은 격양된 욕설부터 "제발 '헤어지자'고 해줘"처럼 < 8월의 크리스마스 >나 <봄날은 간다>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허진호 감독의 직설적이고 솔직해진 대사들로 더욱 현실적인 멜로감성을 보여준다.

허진호 감독의 3번째 영화 <외출>은 최고의 주가를 올리던 '욘사마' 배용준을 캐스팅하고도 국내에서 80만 관객을 동원하는 데 그쳤다(대신 <외출>은 일본에서 엄청난 흥행성적을 기록했다). 하지만 황정민과 임수정이 출연한 <행복>은 전국 123만 관객을 동원하며 어렵지 않게 손익분기점을 넘겼다. 허진호 감독은 2016년 <외출>로 한 차례 호흡을 맞췄던 손예진과 재회한 <덕혜옹주>를 통해 559만 관객을 모으며 커리어 최고흥행기록을 경신했다.

좌절 느끼고 극단적 선택하는 요양원의 모범생
 
 석구 역의 박인환 배우는 <행복>에서 짧지만 강렬한 존재감을 보여줬다.
ⓒ (주)쇼박스
 
드라마 <고맙습니다>로 한창 주가를 올리던 공효진은 <행복>에서 황정민이 연기한 영수의 전 여자친구 수연 역으로 특별 출연했다. 수연은 영화 초반 요양원으로 들어가는 영수와 이별하는 장면 이후 등장이 뜸했지만 동준과 함께 영수와 은희의 집에 찾아오면서 다시 등장한다. 수연 역시 요양원에 들어가기 전의 영수처럼 자유분방한 성격과 행동의 소유자지만 영수가 요양원에 들어간 후 외로움을 느끼고 영수에게 다시 만나자고 이야기한다.

2000년대 영화와 드라마를 넘나들며 '명품 조연'으로 이름을 날리던 류승수는 <행복>에서 영수에게 클럽을 인수하는 친구 동준 역을 맡았다. 동준은 영수를 만나러 집에 찾아갔다가 영수가 시골생활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한다는 걸 눈치채고 서울로 온 영수에게 새로 오픈하는 클럽을 맡아 달라고 제안한다. 하지만 클럽을 맡은 영수가 주색에 빠져 정신을 못 차리자 "다시는 보지 말자"며 영수를 '손절'한다.

영수는 '희망의 집'에 들어갔을 때 룸메이트로 덕수(박인환 배우 분)라는 노인을 만난다. 덕수는 영수에게 받은 담배를 잘라 버리는 등 요양원의 룰을 철저히 지키는 모범생으로 은희와 함께 영수가 요양원에 적응할 수 있게 많은 도움을 줬다. 하지만 덕수는 병원 진료에서 상태가 호전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크게 좌절해 영수 앞으로 "나는 잘 죽는다. 너는 잘 살아라"라는 짧은 메모를 남긴 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세상은 요지경>이라는 히트곡 때문에 대중들에게 유쾌한 이미지가 강한 배우 신신애는 <행복>에서 평범하고 따뜻한 인물인 희망의 집 원장을 연기했다. 영수와 은희의 연애사실을 알게 된 후에는 은희를 걱정해 우려의 말을 전한 원장은 두 사람이 살림을 차려 나갈 땐 딸 같은 은희를 따뜻하게 안아주며 응원했다. 희망의 집 원장은 영수와 은희가 헤어진 후 은희의 병세가 악화됐을 때도 마지막까지 은희를 돌봐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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