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사촌은 옛말, 어린이집 '이웃가족' 되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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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진 기자]
제 어린 시절 운동회는 마을전체 행사였습니다. 운동장 펄럭이는 만국기는 우리 집에서도 보일 정도로 하늘을 꽉 채웠지요.
남색반바지에 짙은 노란 상의, 상의와 같은 색깔의 창모자, 국민학교시절 운동회 옷차림이에요. 전교생이 똑같은 옷을 입고 있어도 엄마는 신기하게 언니와 저를 찾아냈습니다.
그 당시 매일 일하던 엄마는 운동회에 매년 올 수 없었어요. 초등학교 3학년때인가, 일하다가 손을 다쳐서 일을 나갈 수 없던 엄마가 이웃 가까운 친구 어머니들과 함께 운동회에 오셨습니다. 그날의 점심시간이 어른이 된 지금 눈을 감아도 환히 떠오릅니다.
찐 밤, 김밥, 사과, 배, 찐계란, 식혜 등등 추석을 막 보낸 뒤라 가을곡식, 햇과일로 꽉 찬 점심시간이었어요. 서로가 싸 온 음식을 꺼내니 어느새 진수성찬이 되었지요, '보고만 있어도 배가 부르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행복해보이던 엄마, 그때처럼 가을 운동회
엄마의 활짝 웃던 모습은 그날이 최고였어요. 행복해 보이는 엄마의 모습에 저도 덩달아 신이 났었지요. 있는 힘껏 달려 손등에 2등 도장도 찍었답니다. 저의 달리기 2등은 엄마를 더 기쁘게 해 주고픈 마음이 이뤄낸 엄청난 사건이었습니다.
▲ 행운을 나눕니다. |
ⓒ 박서진 |
저 역시 이왕 하는 거 북적이는 행사였으면 하고 욕심이 났지만, 그건 결과물을 기대하는 어른의 계산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람이 적어도 아이들은 마냥 즐겁겠다는 기대로, 좋은 가을날 가족이 함께하는 시간을 마련해 주기 위해 어렵지만 행사를 진행했습니다.
참석한 것은 총 열한 가족. 어린이집 원생 중 자매, 남매가 많고, 당일 부득이한 사정으로 참여가 취소된 가족도 있었습니다.
인근 초등학교의 강당을 대여했어요. 지붕이 높고 공간이 넓은 체육관이 썰렁하지 않도록 선물포장부터 행사안내문, 가족이름표등을 아기자기하게 꾸며 볼거리가 될 수 있게 했습니다.
인근 천원짜리 마트에서 구입한, 소소한 각종 경품은 가족이 적극 참여할 수 있는 동기부여가 되었어요. 그리고 솜사탕, 팝콘 등 간식거리와 김밥, 돈가스로 그날의 푸짐한 점심시간을 대신했습니다.
2인3각 경기를 시작으로 쉴 틈 없이 활동이 이뤄졌어요. 아이들은 엄마 손을 잡고, 아빠 품에 안겨, 또 할머니 손을 끌어당기며 경기를 주도합니다. 쌍둥이 여동생을 둔 오빠는 엄마 곁에서 떨어지고 싶지 않다며 엄마 손을 놓지 않으려 해요.
그동안 쌍둥이들한테 엄마를 양보했으니, 오늘은 무조건 엄마는 '오빠차지'가 되어야겠죠! 그 덕에 쌍둥이 여동생들은 아빠와 선생님이 각각 담당했어요.
▲ 아빠와 함께! |
ⓒ 박서진 |
처음엔 서로 서먹서먹했던 가족들이 똑같은 마음이 되어 "영!" 하면 "차!" 하며 어느덧 일심동체가 되었습니다.
엄마를 안고 림보를 통과해야 하는 '커플게임'의 시간, 경기를 보는 사람들의 환호와 박수가 공간을 가득 채웁니다.
"우와~ 선생님, 우리 아빠는 천하장사였어요."
그중, 현장에서 커플이 된 여-여팀의 어머니가 비슷한 체격을 가진 동성 여성을 번쩍 안아 들어올리고 림보를 통과하는 모습은 그날의 '레전드'였습니다.
점심시간에 잠깐 짬을 내어 참석한 초등학교 6학년 오빠는 모든 아이들의 오빠, 형아가 되어 꼬맹이들의 손을 잡고 함께 달려주었답니다. 뿐만 아니라 모든 가족의 큰아들이 되어 약방의 감초가 되어주었어요.
이름도 지었답니다. 각자 '몸 튼튼' 팀, '마음 튼튼' 팀이던 두 팀은 어느새 '몸 튼튼! 마음 튼튼' 팀으로 한 팀이 되었어요.
▲ 마음튼튼 팀!이겨라, 몸튼튼팀 이겨라! |
ⓒ 박서진 |
반짝이는 빛이 가족 모두의 얼굴을 비춥니다. 활짝 웃는 가족들 모습이 마치 슬로우 비디오처럼 천천히 가슴에 새겨집니다.
"원장님, 내년에 또 해요!"
몇몇 부모님들의 앙코르요청이 여기저기서 계속됩니다. 지금 무릎치료 중이라 게임을 많이 할 수 없었다는 아버님도 내년을 기약하십니다.
"그럼 우리 내년에는 공설 운동장에서 만날까요?"
"네~ 원장님! 우리 내년에는 공설운동장을 들었다 놨다 해봐요!"
처음엔 다 따로따로였던 가족의 마음이 하나가 된, 행복이 넝쿨째 굴러온 것만 같은 참 기분 좋은 운동회였습니다.
어린이집 가을운동회, 작은 가족이 큰 가족을 이뤄 든든한 하루를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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