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자식 잃고 25㎏ 빠졌다…악플에 두번 우는 유족들 [이태원 참사 1년①]

윤정민, 하준호, 이영근, 이찬규 2023. 10. 23.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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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원 참사의 159번째 희생자인 고 이재현군의 어머니 송해진씨가 지난 9일 서울시청 합동분향소에서 이재현 군의 사진을 어루 만지고 있다. 김종호 기자

지난해 10월 29일 발생한 이태원 참사의 희생자 수는 159명(행정안전부 발표)이다. 159번째 희생자는 그날의 이태원이 아닌, 43일 뒤 서울 마포구에서 스스로 생을 마감한 고등학생 이재현(참사 당시 16세)군이다. 생존자 이군을 마지막 희생자로 만든 건 몸이 아닌 마음의 상처, 트라우마였다. 이군은 그날 속마음을 털어놓던 절친, 그리고 여자친구와 이태원에 갔다. 살아남은 건 이군 뿐이었다. 이군의 어머니 송해진(47)씨는 지난 6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둘이 떠나고 나선 주변 다른 친구나 가족에게 마음을 터놓을 수 없었던 것 같다”고 말했다.

“반에서 가장 인기 많은 아이”라는 말을 듣던 이군은 참사 후 완전히 딴 사람이 됐다. 송씨는 “거대한 벽이 생긴 듯했다. 어떤 말도 귀에 닿지 않는 것 같았고, 눈을 마주치는 느낌도 없었다”고 했다. 학교에서 웃고 떠든 날도 집에 오면 “너무 외롭고 죽고 싶다”는 말을 꺼냈다. 등굣길, 사람이 가득 찬 버스에 탈 수 없어 오르막을 힘겹게 걸어 올랐다. 가쁜 숨을 내쉬며 교실에 앉으면 이태원에서 본 끔찍한 광경이 끝없이 떠올랐다고 한다.

박경민 기자

이군은 사력을 다해 트라우마에 맞섰다. 송씨가 보여준 휴대전화 속에는 노력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친하게 지내줘서 너무 고마워. 너희 부모님이랑 ○○이 부모님께서 너희 몫까지 꼭 열심히 살아 달라고 부탁하셨어. 진짜 열심히 살게. 이 형 끝까지 보고 있어라.” 이군이 지난해 11월 17일, 참사로 먼저 떠난 친구에게 보낸 메시지다. 헬스장에 등록해 운동을 시작하고 밥도 열심히 챙겨 먹었다. 송씨는 “아이가 ‘힘들어서 일부러 게임도 하고 밥도 잘 먹으려 한다’는 말을 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괜찮은 것처럼 보였던 그 순간에도 트라우마는 이군을 집어 삼키고 있었다. 혼자 살아남았다는 미안함과 죄책감, 그리고 고립감은 아무리 마음을 굳게 먹어도 떨쳐지지 않았다. 그리움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종종 먼저 간 친구에게 “아침에 꿈에서 ○○이 나왔는데 오늘 밤에는 네가 나올 거라고 믿을게”, “보고싶다” 등의 메시지를 보냈고, 함께 찍은 사진을 꺼내봤다.

참사를 향한 부정적인 시선은 이군을 ‘2차 트라우마’에 빠뜨렸다. 소셜미디어(SNS) 등에 쏟아진 생존자와 희생자들을 비난하는 글들. 송씨는 “친구들을 ‘노는데 환장해 질서도 안 지킨 무분별한 애들’이라고 비난하거나 심지어 ‘마약을 했다’고 단정하는 댓글까지 보면, 사회와 주변 상황이 절대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다는 걸 알 수밖에 없는 나이였다. 그런 분위기가 고립감과 죄책감을 부추겨 누구에게도 손을 내밀기 힘들게 만든 것 같다”고 말했다.

참사 희생자인 고 박가영(당시 21세)씨의 어머니 최선미(49)씨는 ″참사 이후 불면증이 있고, 음식의 맛도 느끼지 못한다″고 말했다. 사진은 최씨가 지난 6일 서울광장에 위치한 이태원 참사 분향소에서 이태원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는 뜻을 담은 보라색 리본을 만드는 모습. 이영근 기자


이군은 참사를 다룬 한 유튜브 영상에 자신이 피해자임을 밝히고 1537자에 달하는 긴 댓글을 남겼다. 왜 이태원에 갔고 어떻게 인파에 휩쓸렸는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해명했다. “죽고 싶었어요, 지금도 죽고 싶고 그 둘한테 너무 미안하고 모든 게 제 잘못 같고 세상이 저를 버린 것 같았어요”라고도 적었다. 그리고 얼마 뒤 친구에게 “최대한 안 아프게 빨리 갈테니깐 걱정하지 말고 기다려”라는 메시지를 보냈고, 끝내 세상을 떠났다.


“괜히 살았나” 불안·죄책 시달린 1년…15명 심층 인터뷰


참사와 관련된 많은 사람들이 이군과 같이 트라우마를 안은 채 하루하루를 살아내고 있다. 중앙일보는 이태원 참사 1년을 앞두고 생존자와 유가족, 소방관과 경찰관, 인근 상인 등 15명을 심층 인터뷰했다. 모두가 트라우마로 인한 크고 작은 고통을 겪었고 일부는 지금도 고통이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고 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예외는 없었다. 이중 13명은 국립정신건강센터의 ‘재난정신건강평가’에 응했는데, 3명은 자살위험이 있는 ‘고위험군’, 9명은 ‘관심군’이었다. ‘정상군’으로 분류된 단 한 명(생존자 김모씨) 역시 “출퇴근 길 지하철 2호선을 탈 때마다 압사 사고가 나진 않을까 불안하다”고 했다.
김영옥 기자

이들을 가장 괴롭힌 건 공포와 불안감이다. 매일 하던 사소한 일도 어려워졌다. 참사로 친구를 잃은 생존자 전모(32)씨는 한동안 해가 진 뒤에는 골목이 무서워 가까운 편의점도 못 갔다. 술을 안 마시면 불안을 견디지 못해 내내 취한 상태로 3개월 정도를 흘려 보냈다. 구급차가 지나갈 때도, 사소한 소음에도 과도하게 놀랐다. 그는 “한때는 위로하는 사람들을 다 공격하고 싶은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무서웠고 불안했다. 전보단 나아졌지만 여전히 마음이 불편하고 위축된 느낌”이라고 말했다. 생존자인 20대 A씨도 “사람이 많거나 폐쇄된 공간에 가면 숨을 잘 못 쉰다. 많이 돌아가더라도 지하철 대신 버스를 탔다”고 말했다.

또 이들 대부분이 죄책감에 시달렸다. 희생자 고 이해린(당시 25세)씨 어머니 김이순(52)씨는 “늘 딸에게 미안하다”며 “내가 잘못했든 안 했든 자식 먼저 잃었으면 잘못한거다. 지켜주지 못한 내 잘못이다”라고 말했다. 고 김연희(당시 23세)씨 아버지 김상민(56)씨 역시 “살아있는 것 자체가 죄스럽다. 다가오는 딸 생일을 어떻게 맞아야 할지 막막하다”고 했고, 생존자 전씨는 “사고 후 2주 간 숙소를 잡고 매일 참사 현장에 갔다. 친구를 혼자 두고 온 것 같았다. 괜히 살아 나왔단 생각도 했다”며 눈물을 보였다.

이태원 참사 희생자 고 이해린(당시 25)씨의 아버지 이종민씨는 참사 1년을 앞두고 진행한 중앙일보와의 심층 인터뷰에서 ″딸을 지키주지 못해 미안하다″고 말했다. 이씨를 비롯한 대부분의 유가족과 생존자들은 여전히 불안감과 죄책감 등 트라우마로 인한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었다. 이씨가 지난달 29일 서울광장 분향소에서 합동차례를 마치고 음식을 나누는 모습. 이찬규 기자

소방관과 경찰관들도 일상이나 업무에 어려움을 겪을 정도로 죄책감에 짓눌려 있다. 최모(34) 소방관은 “핼러윈 분장을 한 분에게 심폐소생술을 하던 순간이 떠오른다. 더 빨리 가서 2~3명이라도 더 살렸다면 그 유족과 지인은 슬픔이 덜했지 않겠나. 여전히 죄송하고 괴롭다”고 했다. 유모(32) 소방관은 “아직도 ‘살려주세요, 꺼내주세요’ 하던 목소리들이 들리는 것 같다. 더 빨리 움직여서 더 살렸어야 했다”고 말했고, 이태원파출소에서 근무한 김모 경장은 “그게 최선이었을까 하는 생각에 괴롭다”고 말했다. 경찰청이 이성만 더불어민주당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참사 당일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 1371명 중 327명(24%)이 긴급심리지원을 신청해 총 340회의 상담이 이뤄졌다.


“미각도 잃은 엄마, 소금 한없이 넣어”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가 심해지면 음식을 먹거나 잠을 자는 것조차 고통이다. 참사 희생자인 고 박가영(당시 21세)씨 어머니 최선미(49)씨는 “지금도 2~3일 정도 못 자다 하루 자고, 음식을 먹어도 맛을 못 느낀다. 자식 잃은 엄마들 중엔 아예 짠 맛을 못 느끼는 사람도 있다. 설렁탕 먹는데 소금을 넣고 또 넣더라”고 말했다. 참사 현장에서 신발가게를 운영한 남인석(82)씨는 “애들이 억울하게 죽은 걸 보고 한동안 잠을 못잤다”며 “요새도 새벽 2시고 3시고 깬다. 깊은 잠을 잘 수 없다”고 했다.
박경민 기자

마음의 병은 질병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최선미씨 입안 4~5곳에 난 염증은 8개월 동안 없어지지 않고 있다. 스스로 ‘숨만 쉬어도 살이 찌는 체질’이라고 소개했지만, 참사 후 체중이 25㎏ 줄었다. 그는 “머리나 이가 빠진 유족도 많다”고 말했다. 생계를 포기하거나 직장ㆍ가게를 옮긴 이들도 6명에 달했다. 제조업체에서 일했던 김상민씨는 1년 가까이 휴직 중이고, 최씨도 사회복지사 일을 그만뒀다. 사람 만나는 게 두려웠다던 생존자 전씨는 헬스 트레이너 일을 관뒀고, 아예 다른 일을 찾고 있다.

이태원에서 신발가게를 운영하던 남인석(82)씨가 지난 12일 오전 이태원 참사가 발생했던 서울 이태원 해밀턴 호텔 옆 골목을 찾아 생각에 잠겨 있다. 남씨는 참사 당시 현장 바로 앞에서 상황을 목격했고 시민들의 구조도 도왔지만, 지금까지도 트라우마로 잠을 잘 이루지 못하는 등 고통을 받고 있다. 전민규 기자

“같이 죽었어야지”…편견·비난에 ‘2차 트라우마’


비교적 빨리 마음을 다잡았다고 한 생존자들도 이군과 같이 부정적 시선이나 악성 댓글로 인한 ‘2차 트라우마’ 앞에선 다시 무너졌다. 인터뷰에 응한 15명 중 상인 두 명을 제외한 모두가 주위 비난과 댓글 때문에 상처 받고 분노했다고 답했다. 생존자 A씨는 “앞에선 괜찮아졌냐 묻고 걱정하던 회사 사람들이 뒤에선 이태원에 간 걸 좀 안 좋게 본단 얘기를 전해 들었다. 참사 얘기를 아예 안하는 게 좋겠다고 조언한 분도 있었다. 충격이 컸다”고 말했다. 전씨는 한 방송 인터뷰에 응했다가 ‘친구 죽었는데 맨정신으로 인터뷰하는 사이코패스’라거나 ‘여자 만나러 간 것 아니냐. 같이 죽었어야지 왜 살았냐’는 댓글을 보고 “멘털이 흔들렸다”고 했다.

비난과 외면은 유가족의 상처도 덧나게 했다. ‘희생자에 대한 막말’과 ‘고립감’이 가장 힘들었다는 게 유족들의 공통된 말이다. “정쟁거리가 아니라 사람의 삶과 죽음에 대한 일인데 그걸 조롱하니까 더 상처가 커졌다”(김상민씨)는 것이다. 이군 어머니 송씨는 “모든 사람이 다른 세상에 살고, 나만 지구 밖에 있는 것 같다. 큰 재난에 대해 조금 더 공감하고 추모하는 사회 분위기였다면 우리 아이도 손을 내밀었을지 모른다”며 “정부도 없던 일처럼 무시하지 말고 상처를 어루만질 수 있도록 제 역할을 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참사 희생자 고 김연희(23)씨의 아버지 김상민(56)씨는 딸의 지키지 못한 미안함에 매주 주말 참사 유가족 행사에 무조건 참여한다고 한다. 사진은 김씨가 지난달 16일 광주시 남구청 인근 도보를 행진하는 모습. 이찬규 기자

윤정민ㆍ하준호ㆍ이영근ㆍ이찬규 기자 yunj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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