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한국 보수의 선 자리와 갈 길
이번과 다음 칼럼은 우리 보수와 진보의 선 자리와 갈 길을 계속 다룬다는 점을 미리 밝혀두고 싶다. 이 주제를 꺼낸 것은 내년 4월 10일 총선에서 보수와 진보가 다시 한번 시험대에 오르기 때문이다.
서구사회에서 보수의 고전적 기초를 세운 이는 18세기 후반에 활동한 영국 정치가인 에드먼드 버크다. 버크는 인간의 합리성에 한계가 있고, 사회가 이성보다 도덕과 관습으로 재생산되며, 문명의 진보가 안정의 기반 위 점진적 개혁을 통해 가능하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버크의 보수주의는 전통주의·질서주의·점진주의를 앞세워 계몽주의의 진보에 맞서는 이념적 대항 거점을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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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용과 통합 강조 지구촌 보수
이념과 갈라치기의 한국 보수
박정희주의·선진화론을 넘어
‘열린 보수 3.0’으로 나아가야
」
서구 보수가 두 차례 혁신을 모색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였다. 첫 번째 혁신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와 밀턴 프리드먼의 경제이론으로 무장한 1980년대 초반 ‘신보수’였다. 감세, 민영화, 규제완화 등을 내건 신자유주의와 가족 및 국가의 가치를 중시한 공동체주의는 신보수주의의 양 날개였다. 미국 레이건 정부와 영국 대처 정부는 그 성공 사례였다.
두 번째 혁신은 좌파의 ‘제3의 길’을 벤치마킹한 2000년대 초반 ‘우파적 제3의 길’이었다. 좌파적 제3의 길이란 신보수로부터 권력을 탈환한 영국 블레어 정부와 독일 슈뢰더 정부의 신사회민주주의를 지칭했다. 우파적 제3의 길은 실용과 통합을 내세워 신자유주의에 온기를 불어넣으려는 정치적 기획이었다. 영국 캐머런 정부는 ‘따듯한 자본주의’를, 독일 메르켈 정부는 ‘탈이념적 정치연합’을 추구해 보수의 21세기적 지평을 열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서구 보수는 미국 공화당에서 독일 기민당까지 넓은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독일 기민당이 시장·통합·품격을 중시하는 전통적 보수 노선을 걸어왔다면, 미국 공화당은 ‘트럼프주의’라는 보수적 포퓰리즘 노선으로 전환했다. 특히 미국 트럼프 전 대통령은 기성 정치인들을 기득권자로 공격하고 외국인 노동자를 적대시하며 리버럴한 개인보다 ‘위대한 미국’이라는 국가주의를 앞세우는 전략을 구사했다. 트럼프주의가 내년 미국 대선에서 한번 더 승리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광복 이후 보수의 동의어는 ‘박정희주의’였다. 박정희주의는 경제성장이란 목표를 위해 민주주의를 유보할 수 있다는 통치 논리가 핵심을 이뤘다.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성장제일주의가 ‘시장 보수’로 거듭났다면, 개인의 인권보다 국가의 안보를 중시하는 반공권위주의는 ‘안보 보수’로 나타났다. 시장 보수가 이명박 정부의 정체성이었다면, 안보 보수는 박근혜 정부의 정체성이었다.
주목할 것은 박정희주의에 대한 성찰적 담론이 보수 안에서 태동했다는 점이다. 박세일의 선진화론이다. 박세일은 선진국으로 도약하는 선진화를 건국·산업화·민주화를 잇는 새로운 시대정신으로 내놓았다. 특히 박세일이 주조한 ‘공동체자유주의’는 개인과 공동체의 가치를 모두 강조함으로써 선진화를 위한 철학적 기초를 제공했다. 박정희주의가 ‘한국 보수1.0’을 이뤘다면, 선진화론은 ‘한국 보수2.0’이라 부를 만했다.
2000년대에 보수로서 세 번째 집권에 성공한 윤석열 정부에게 요구된 것은 ‘한국 보수3.0’이었을 것이다. 그 방향은 가시화된 신냉전 질서에 대처하는 안보 역량과 가속하는 과학기술혁명을 선도하는 경제 역량을 강화하는 동시에 따듯한 사회통합이라는 보수 본래의 가치를 구현하는 데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보수의 안보적 과제를 성취했더라도 경제적·사회적 과제에 대한 불만과 비판이 커져 왔다는 점이다. 게다가 일방향 명령 식의 국정운영은 쌍방향 소통이 만개한 지식정보 시대에 철 지난 통치 방식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21세기 지구적 보수가 실용과 중도통합의 ‘열린 보수’로 나아가는 것에 반해 윤석열 정부가 이념과 갈라치기의 ‘닫힌 보수’를 고수하는 것은 비전·정책·전략의 측면에서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
보수는 하나로 이뤄져 있지 않다. 변화보다 안정을 선호하는 ‘기질적 보수’, 정부개입보다 자유시장을 중시하는 ‘정치적 보수’, 개인과 공동체의 공존을 소망하는 ‘철학적 보수’ 모두 보수라는 큰 울타리 안에 존재한다. 개인의 자연스러운 욕망을 배려하고, 공동체를 위한 사회의 통합을 구현하며, 부국(富國)을 위한 국가의 성장에 매진하는 것이 보수의 일차적인 덕목이다. 욕망의 배려, 사회의 통합, 국가의 성장, 더하여 소통의 거버넌스를 중시하는 ‘열린 보수’는 ‘한국 보수 3.0’이 가야 할 길일 것이다.
나는 보수를 지지하지 않는다. 그러나 보수와 진보가 ‘적대적 공존’이 아닌 ‘생산적 경쟁’ 관계를 이룰 때 우리 사회가 발전할 수 있다고 믿는다. “모든 이론은 회색이라네. 삶의 황금나무는 초록색이지”라고 노래한 이는 요한 볼프강 폰 괴테다. 지나간 이론과 이념을 넘어서 현재와 미래의 생활과 행복을 놓고 ‘열린 보수’와 ‘열린 진보’가 생산적으로 경쟁하기를 바라는 이, 결코 나만은 아닐 것이다.
김호기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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