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성희의 시시각각] ‘육각형 인간’의 시대

양성희 2023. 10. 23. 0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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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수학적 관점에서 육각형은 가장 경제적 도형이다. 같은 길이의 선으로 도형을 만들면 육각형이 삼각형이나 사각형보다 넓은 면적을 만들 수 있다. 단위 도형당 넓이는 원이 가장 넓지만, 원을 여러 개 이어붙이면 빈틈이 생기는 반면, 육각형은 한치의 남김없이 딱 맞물린다.

칸영화제에 참석한 걸그룹 블랙핑크 제니. 세계적 셀럽인 제니는 '육각형 아이돌'의 대표주자다. [뉴스1]

벌집은 대표적인 육각형 구조물이다. 균형 있게 힘을 배분해 내구성을 높이는 육각형 구조 덕에 집 무게의 30배나 되는 꿀을 저장할 수 있다. 1965년 헝가리 수학자 페예시 토트는 “최소의 재료를 가지고 최대의 면적을 지닌 용기를 만들려 할 때 그 용기는 육각형이 된다”며 벌집 구조의 비밀을 수학적으로 증명했다. 가벼우면서 강도 높은 골판지나 신소재, 고속열차 KTX의 앞부분 충격흡수장치에도 벌집 구조가 쓰인다. 바르셀로나의 명물인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대성당 등 건축물에도 활용된다. 눈(雪)의 결정도 육각형이다. 빈틈없이 꽉 차고, 강하고, 아름다운 도형이 육각형이다.

「 '가장 완벽한 도형' 육각형처럼
노력보다 타고난 자질 더 선망
성취형 인간 설 자리는 어디에

최근 인터넷에는 ‘육각형 연예인’ ‘육각형 남친’ ‘육각형 스트라이커’ 같은 표현이 자주 등장한다. 뭐 하나 빠질 것 없이 여러 조건을 두루 갖춘 완성형이라는 의미다. 서울대 소비자학과 김난도 교수팀의 『트렌드 코리아 2024』는 내년 주요 트렌드의 하나로 ‘육각형 인간’을 꼽았다. 외모·성격·학력· 직업·자산·집안 등 육각형 그래프에서 약점 없이 완벽한 인간형을 선망하는 경향을 뜻한다. 특히 집안이나 성형하지 않은 외모 등 노력으로 되지 않는 ‘타고난’ 자질을 높이 평가한다는 데 특징이 있다. 책에 따르면 2000년대 초 미국 대학가에서 많이 쓰였다는 ‘아무 노력 없이도 완벽한(effortlessly perfect)’이란 표현 그대로다.
이는 젊은 층의 이상적 인간형인 아이돌 문화에서 잘 드러난다. 과거에는 아이돌 멤버들이 보컬, 비주얼, 댄스 등 역할이 나뉘었다면 이제는 보컬, 댄스, 비주얼, 예능감 등을 두루 갖춘 ‘올라운더’들이 각광받는다. 머리도 좋아야 하고, ‘공항패션’으로 불리는 사복도 잘 입어야 한다. 세계적 셀럽인 블랙핑크 제니처럼 미모나 실력은 기본이고, 강남 출신, 해외 유학 경험, 엘리트 재력가 부모 등 집안까지 좋아야 한다. 지하 연습실에서 배를 곯아가면서 연습했다는 흙수저 성공 신화가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흙내’를 묻히지 않으려고 중소기획사들까지 무리해서라도 연습생 숙소를 강남에 얻는 일도 있다. 신인 아이돌이 데뷔하면 인터넷에 곧장 ‘과사'(과거 사진)가 ‘털리는데’ 성형 여부를 따지는 절차다. 아이돌은 성격도 좋아야 하기에 과거 학폭이나 SNS 활동 내역까지도 대중의 매운 검증을 받는다. ‘육각형 아이돌’ 탄생을 위한 통과의례로 보일 정도다.
최근 패션에서 유행하는 ‘올드머니룩’도 비슷한 맥락이다. 올드머니룩이란 신흥부자들의 ‘뉴머니룩’에 대비되는, 전통적 부자들의 귀티 나는 패션 스타일이다. 대중화된 명품 대신 차별화를 추구해 겉으로 로고가 드러나진 않지만 아는 사람들은 아는 브랜드에, 값비싼 최고급 소재가 특징이다. 돈 있다고 따라 할 수 없고, 숨기려 해도 숨겨지지 않는 고급스러운 아우라가 핵심이다.
육각형 인간의 시대는 각 개인에게 육각형 인간이 되라고 압박하는 시대이자 육각형 인간은 아무나 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벽을 치는 시대다. 아무리 ‘노오력’해도 계층 이동이 쉽지 않은 현실 속에서, 차라리 ‘타고난 완벽함’을 기준으로 타인을 품평하고 서열화하는 데서 쾌감을 느끼는 반발 심리도 읽힌다. 이제는 아이돌 팬들도 좋아하는 팀을 1군, 2군 등으로 등급화해 부르는 것에 익숙하다.
매 순간 타인과 비교당하며 순위가 매겨지고 좌절하는 SNS 시대다. 그저 주변 친구들과 비교되는 정도가 아니라 유명 연예인, 재벌 2·3세의 일상까지 실시간 공유하며 비교당한다. 그것도 뭐 하나 빠지는 것 없고, 노력해도 안 되는 타고난 육각형 인간이 표준이란다. 살기 어려운 세상이다.

양성희 중앙일보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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